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웅식 Feb 25. 2024

순수한 기독교 (4)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거짓말과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거짓말과 향기로운 예물이 사라졌다는 관점 (1)

                                                                                                                       최웅식 소설가 

    

 십일조를 교회에 내서 부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제대 후 교회에서 장학생으로 뽑혀 장학금을 3년간 받았는데, 받은 장학금의 1/10을 헌금함에 넣었는데, 정말 딱 한 번이었다. 교회 주보에 있는 내 이름을 보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복 준다는 책도 있는데 왜 나는 부끄러운 감정이 올라왔을까?

 그 후로는 십일조를 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교회 계좌로 돈을 보냈는데, 그 돈이 착오로 십일조로 적힌 적이 몇 번 있었다. 재정 담당자가 실수해서 내가 보낸 돈을 십일조로 기록한 모양이다.  

    

 나는 군대에서 성경을 읽으며 십일조를 교회에 내는 것이 타당한지 살펴보았다. 주마다 설교를 한 번이나 두 번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많이 봐야 했다. 또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온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을 본받아 교회에서 배웠던 가르침을 모두 버리고 내가 스스로 답을 찾고 있었기에. 데카르트는 진리를 찾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거짓으로 간주하여 던져버렸다.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말은 진리인가? 거짓인가? 당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성경적 근거를 들 수 있는가?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내 글을 읽는 당신의 성격은 좀 급할 것도 같기에.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문자적으로는 거짓이다.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형 들었어. XX목사는 십일조를 안 내면 암에 걸린다고 했대. 인터넷에 나왔어”

  “진짜. 황당하네. 완전 삯꾼이네.”

 성경에 십일조를 안 내면 암에 걸린다고 했는가? 십일조 내면 복 준다고, 안 내면 암에 걸리고, 이렇게 말하는 목사도 있었다.     


 자 그렇다면 십일조를 교회에 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근거는? 두 가지로 접근해보겠다. 첫째는 십일조는 무엇의 십 분의 일인가? 둘째, 십일조는 누구에게 준 것인가? 

 둘째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십일조는 신약에 거의 나오지 않고 구약에 나오는데, 구약시대에는 지금의 교회가 없었다. 초대교회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설립된다는 것에 당신은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내는 것은 아니다, 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가톨릭에서는 십일조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당에서는 십일조 헌금 봉투가 없다.

 성당에 돈 내면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반박했던 루터의 종교 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개신교만 아이러니하게 십일조를 요구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가톨릭, 즉 천주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고하면서 들어주기를.        


 첫째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십일조가 월급의 1/10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구약에서 율법으로 정한 십일조는 대게, 신이 준 땅에서 나온, 농산물 수확량의 1/10이다. 민수기 18장 20절과 21절을 인용하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땅’이다. 열두 지파 중 레위지파만 땅이 없었다. 현대어 성경을 참조했다. 

    

20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받은 땅으로 들어가 땅을 나누어 갖더라도 네게 돌아갈 땅은 없다. 너와 네 후손들에게 어떤 몫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나 여호와가 너와 네 후손들이 받을 몫이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바치는 예물을 너와 네 후손들의 몫으로 주겠다. 

21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가져오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그들 몫으로 줄 것이다. 그리하여 레위인들이 만남의 장막에서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     


신명기 14장 22절과 23절의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십일조가 곡식의 소산에서 나온 것이다.


22 너희는 해마다 농토에서 나오는 모든 곡식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23 너희의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첫 새끼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지고 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나누어 먹고 언제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을 배워라.      


 민수기 18장, 신명기 14장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당신은 신에게서 받은 땅이 있는가? 당신은 자작농이 되어 농사를 지어야 일단 십일조를 낼 수 있다.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물적 토대가 농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바뀐 지 오래된 사회에서, 교인 중에 몇이 자작농이겠는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내라고 요구하면 당신에게는 땅이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분명 민수기 18장과 신명기 14장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십일조는 곡식 즉, 농산물이다. 또한 레위기 27장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십일조에 소나 양, 가축도 포함된다. 레위기 27장 30절과 32절이다.


 30 밭에서 나는 곡식이나 나무에서 거두어들이는 과일이나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소출 가운데서 그 10분의 1은 나 여호와의 것이라. 내게 바쳐야 하는 거룩한 것이다. 

32 소든 양이든 그 10분의 1은 나 여호와의 것이다. 가축 떼를 셀 때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째 가축은 나 여호와의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는 곡식, 소, 양, 가축이다.  그 당시에도 레위기 27장을 참고하면 세겔이라는 돈은 있었지만, 돈은 여호와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었다. 이 부분을 읽고 흥미로웠다.     

 그러니, 십일조가 문자적으로 소득세 원천 징수당하고 받은 월급에서의 1/10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3장이나, 누가복음 11장에서 오히려 십일조 낸 바리새인이, 예수한테 욕 듣는 구절과 구약에서 전리품의 1/10을 내주는 이야기는 율법 시대의 이전의 내용, 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결단하는 내용이라서 논의에서 제외했다.    

 

 당신이 십일조를 월급의 1/10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주관이 들어간 해석이다. 그 해석은 사전적인 또는 문자적인 해석은 아니라는 점은 당신은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주관에 따른 해석을 나는 존중하겠다.   

  

둘째에 관한 내용이다. 누구한테 십일조를 주었는가? 하는 내용이다. 

 땅의 소산의 1/10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는가? 가장 많은 사람이 언급된 구절이다. 신명기 14장 28절과 29절을 인용하겠다.

     

28 그러나 3년에 한 번 씩은 성소로 가지 말고 그해 수확의 모든 십일조를 모아서 마을의 창고에 쌓아놓아라.

29 그것은 너희와 함께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 사람과 너희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마음껏 가져다 먹게 하여라. 너희가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 


다른 근거도 제시하기를 원한다면. 신명기 12장이나 신명기 13장, 민수기 18장도 같이 읽어보기를. 

 십일조를 받는 사람은, 땅이 없는 사람들, 즉 레위인이다. 성경에는 레위인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 그리고 초기 성경 번역자들이‘객’으로 번역한 외국인, 고아와 과부다. 십일조는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려는 목적과 소외된 이웃과 축제를 나누는 행위다.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문에 비추어 해석하자면, 레위 지파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레위인에게 여호와는 먹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3년에 한 번은 축제를 열어 같이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과 음식을 나누라고 했다

 만약 이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밥벌이할 수 없는 선교사나 목사 즉 목회자, 난민, 구직 활동하는 이주노동자, 파업해서 월급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해고 노동자, 부모가 없어서 보육시설에서 자랐는데, 성년이 되어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청소년, 또는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은 고아, 아이를 혼자 키우기 힘든 미혼모, 또는 경제적으로 힘든, 남편을 잃은 여성,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장애인 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성경 어디에 십일조를 드리라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은 없다.  나는 개신교에서 십일조 헌금을 폐지했으면 하는 바이다. 

교회는 교회 운영 재정이 필요하기에 ‘교회 재정헌금’과 이웃을 위해 쓰는‘이웃 사랑 헌금’으로 헌금을 두 가지로 제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당신이 십일조의 정신을 새롭게 적용하고 싶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십일조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어도 일용할 양식은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꿈 같은 것은 아닐까?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부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또는 지구라는 소행성에 사는 지구인들에게 적절하게 분배되는 사회, 경제적인 사회 안전망 구축, 그게 십일조의 정신 같다. 그런 꿈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어떨까?

 십일조를 돈으로 생각하는데, 당신에게 나눠줄 돈이 없다면, 자그마한 시간, 당신이 활동하는 시간의 1/10이 아니어도 괜찮다. 당신보다 더 힘든 사람과 같이 조금의 시간을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다양하기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책에 실린「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 가난한 사람이 돈을 이웃과 나누는 대목이 나온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의 몫을 빼앗아 바벨탑 같은 부를 쌓고, 가난한 자는 돈이 없는데, 사랑 때문에 돈을 나눈다는 사실이 가난한 자의 가계부에 적혀 있다. 당신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대목이라서 인용해보겠다. ‘교통사고 문병비’와 ‘불우이웃돕기’와 ‘길 잃은 할머니’와‘송별비’에서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그건 사랑의 파도였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 시간에 나는 어머니의 가계부를 보았다

 콩나물 50원   왜간장 120원   고등어 자반 150원  통일 밀쌀 3,800원  영희 티셔츠 900

 앞집 아이 교통사고 문병 230원    새우젓 50원     방세 15,000원 

 영호 직장 동료 퇴직 송별비 500원    길 잃은 할머니 140원    방범비 50원  

 정부미 6,100원 ……소금 100원     연탄 2,320… …불우이웃돕기 150               

작가의 이전글 순수한 기독교(3)예배란 삶에 밑줄을 긋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