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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웅식 Feb 19. 2024

순수한 기독교(3)예배란 삶에 밑줄을 긋는 것

예배란 삶에 밑줄을 긋는 것

                        순수한 기독교 (3) ‘예배’란 삶에 밑줄을 긋는 것.     

                                                                   

                                                                                                                  최웅식 소설가     


 교회에 가서 보게 되는 주보에 빠지지 않는 단어, 다른 글자보다 크게 찍혀서 잘 보이는 단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향기로운 예물이다. ‘예배’ 밑에는 기도, 찬양, 말씀, 이런 단어들이 나열될 것이다. 아, 맞다. 교회 광고도 덧붙여야 한다. ‘향기로운 예물’ 밑에는 우선 십일조라는 말이 차지하고 있을 텐데, 그 아래로 온갖 헌금 이름, 이를테면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과 헌금을 드린 이름들이 빽빽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내 서랍에는 당신이 교회에 가서 들었던 단어들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일단,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향기로운 예물과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한다. 당신이 주보를 지금 갖고 있다면, 주보를 꺼내 확인해보라. 예배라는 글자가 있는가? 

 나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었다. 담임 목사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게, 하나님의 뜻이고,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정당하다고 했다. 나는 그 설교를 듣고 일어나 흔히 말하는 예배의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저런 헛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는 게, 예수에 대한 모욕인 게야.’

앞자리에서 일어나 몇십 미터는 걸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유유히 사라졌다. 바닥에 침을 뱉고 싶은 마음도 들 정도였다. 그래도 침을 뱉지는 않았다. 청소하시는 분만 불편했을 것이다. 청소하시는 분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괜히 냄새나는 내 침을 닦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터이니.

 나는 장애인 부서에 가서 애들과 말씀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 분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대예배 안 드리세요?”     

‘아, 네. 담임 목사님이 헛소리해서, 또는 반기독교적인 설교를 해서, 안 가요. 사람 죽이는 전쟁을 찬양하는 게 말이 되나요?’,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예배는 뭡니까? 소예배도 있고, 대예배도 있는 겁니까?’ 

이런 말도 하고 싶었지만 하지는 않았다. 

 가끔 벽 같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벽을 만나면 그냥 쳐다만 보고 지나쳐야 한다. 벽에 말을 하면 내 입만 아프다.

 나는 그 이후, 그분의 설교를 듣지 않았다. 장애인 부서에 있었지만, 몇 년 동안 담임 목사의 설교를 듣지 않았다. 나는 ‘대예배’(?)라고 불리는 종교행사에 ‘보이콧!’, 했다.

 자 그렇다면 예배는 뭘까? 내가 좋아하는 시인, 기형도의 말을 변주하면, 삶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 9행부터 16행을 인용해보겠다.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나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시행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아, 기형도가 보는 눈은 날카로웠다. 그의 마음은 섬세했다. 나는 그의 마음과 눈에 반했다. 예배는 삶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것, 당신의 하루가, 당신의 살아낸 시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예배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을 제시했다. 당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산 제물로 드려라,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당신의 몸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몸과 예수가 살아온 삶이 깃들어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준 새로운 삶, 당신이 살아가는, 살아낼 올바른 삶. 그것이 합당한 예배다.

교회 가서 설교 듣고, 교회 광고 듣고, 찬양하는 행위가 예배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가 있다고 하자. 그가 교회 가서 설교 듣고, 교회 광고 듣고, 찬양하면 예배를 드린 것인가? 

 따라서 나는 주보에 예배라는 말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그냥 ‘말씀 듣기, 찬양하기’ 이런 말만 쓰는 것이 어떨까? 예배라는 말을 꼭 써야 하겠다면, 새로 시작되는 한 주도 올바른 삶을 살아내세요, 그것이 예배입니다. 라고 한 주의 삶을 응원하는 표현으로 바꾸자.


 예배는 교회에 가서 말씀 듣고 찬양하는 행위를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것, 살아냄이다. 그 삶을 드리는 게 예배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안에 예수가 준 빛을 간직한 채 빛 한줄기 같은 삶을 살아냈는가? 항상 그렇지는 않다. 사실 똑바로 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어둠 속에 있을 때도 많다. 그러면 나는 예배자로 사는 삶을 못 살아낸 거나 안 살아낸 거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잘 넘어지는 자다. 그렇지만 내 삶에 한 줄기 빛이 찾아와, 내 삶으로 한 줄기 빛을 보여줄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내 안에 있는 환한 빛줄기를 느낀다. 그 빛은 따스하다.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빛이 흔들리고 있다. 


#예배란#순수한기독교#한줄기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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