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씌워드릴게요’ 아직도 이런 말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그날 밤 잠 못 잘 것 같다. 산에 누워 속수무책 비 젖으실 부모까지 걱정되고 소나기 오는데 ‘우산이라도 사주고 떠날 걸’ 했던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이십대는 폭우시절이었고 벼락이 잦았기에 이십대였다. 마당이 없으니 빨래 걷기 장독뚜껑 덮기 같은 비설거지도 없다. 남쪽 지방 폭우 예보를 들어도 거기 사는 사람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지렁이 보고 호들갑 떨어도 귀엽게 보이던 사람과 걷던, 비개인 날들은 휩쓸려갔는데 혼자 남아 거미줄 같은 포장도로에 갇혔다. 재난영화 보고 나왔더니 위험하던 천변길이 안온해 보이고 꼬맹이들의 웃음소리는 또 얼마나 맑았는지 그간의 조바심들을 버렸다.
얼음이 녹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싱거워지는 것처럼 여름 연애는 쉽게 끝났다. 손은 못 잡고 팔짱끼고 걷기엔 서로 힘들어서 여름 연애는 쉽게 잊힌다. 어금니로 단번에 얼음을 바스러트리더라도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은 있었다. 팥빙수 먹으며 눈맞춤도 즐겼지만 빙수 토핑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오후의 속삭임도 잊었다. 꿈이라는 걸 빤하게 알게 되는 꿈을 꾸고 일어나면 운명 같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젖은 구두에서는 방황이 보이고 젖은 바짓단에선 내가 보였다. 가느다란 우산살에서 안간힘을 느꼈다.
원고 펑크를 채우려는 셈인지 마감일이 일주일인 청탁서를 받았다. 불쾌한 반가움이 스쳤다. 그나마를 반가워했다는 것이 환멸스러웠다. 청탁서를 출력해 거꾸로 붙여 놓았다가 유치해서 뒤죽박죽인 책꽂이나 정리했다. 퇴고중인 시편을 누구라도 못 보게 서랍 안에 넣었다. 삶도 퇴고할 수 있다면 자문(諮問)받느라 부모님이 바쁠 것이다. 우린 5남매니까 더 바쁘시겠지. 비가 잦아서 산소 축대가 걱정스럽다. 그게 무너지면 우리 가계(家系)도 무너질 것이다. 난관이 들이닥쳤기에 가족 전부가 들어갈 수 있는 우산을 아쉬워했었다.
사막 다큐를 보면 눅눅함을 떨칠 것 같아 YouTube 여기저기를 찾다가 정오처럼 환하게 웃는 당신 사진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장마가 끝나기도 전에 내려놓겠지. 다툼의 원인이 차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설득했다. 그 차이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거리엔 작고 큰 우산들, 형형색색이 속살거리는데 우산에 갇힌 수인(囚人)이 되어 걸어 다녔다. 식탁에서 떨어진 자두가 굴러가다가 멈춘 거기까지가 여름의 넓이 아닐까. 어쩌면 혼자 쓴 우산의 공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