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를 고르면 손님 앞에서 내려주는 (오마카세)카페가 동네에 있다. 커피 가격이 만만찮은 곳이라 화단 꽃마저도 어여쁜가 싶었다. 중국집에서 몇 걸음 모퉁이라서 식사 후 느끼함을 지울 겸 들어갔다가 머쓱해서 돌아 나왔다. 싸구려 원두를 사서 실패하곤 했지만 (저렴한)콜드부르로 마시는 내가 그럴 수는 없으니까. 원두 1Kg사면 한참 마신다. 화단의 그 분홍 낮달맞이 꽃은 공짜라서 지나치다가 한참이고 들여다본다. 저 인간이 꺾는 건 아닐까, 게다가 한 움큼 뿌리 채 뽑아 달아나는 건 아닐까 하면서 주인은 나를 경계했으리라. 주인이 심은 거겠지만 꽃은 신의 오마카세다. 오마카세는 믿고 맡긴다는 뜻이니 믿어마지않는 신이 내어준 꽃을 만인이 경탄하는 것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저만치 계단 아래에 야생인 듯이 한 무더기 낮달맞이꽃이 피어있다. 한 시간 걸은 무렵이라 피곤도하고 잠간 멈췄다가 지나친다. 꽤 오래 보았는데도 여전히 아름답다. 알고 보니 초여름부터 9월까지도 피운단다. 집에 들이면 좋겠어서 탐냈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오래도록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내 욕망을 의심했다. 소유욕을 발현시키는 것도 아름다움 아닌가 싶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소유한 것들에게 소유당하는 일이 된다. 애써 얻은 것에게 집착해 애면글면하는 일 말이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일까”?(에리히 프롬)하는 생각이 자욱해진다. 남들은 까짓 꽃 하나를 두고 심각하냐고 하겠지만 직장을 놓치고 집에 있으면서 내 것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내 책들로 빼곡한 서재에 앉아서도 저것들이 나인지, 저것들이 나를 대변(代辯)하는지 궁금했다. 나의 소유가 곧 나라는 존재라면 책보다 꽃을 소유하고 싶다.
어느 날인가 그 달맞이꽃 풀들을 솎아내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계단을 내려가 꽃이 어여쁘다며 옆에 앉았다. 아내와 함께였으니 경계하진 않는 것 같았다. 염치불구하고 몇 포기 주실 수 있느냐 했더니 이건 뿌리로 퍼진다면서 뽑아주셨다.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는데 한 술 더 떠서 물로 적셔 달라했다. 가는 동안 마르면 어떡하나. 화분에 심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기적 같이 꽃을 피웠다. 요 근래 그만큼 기쁜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꽃이 아름답다기보다 그윽했다.
욕심을 더 부려서 쿠팡에서 씨앗을 샀다. 반신반의하며 파종했는데 놀랍게도(?) 싹이 튼 것이다. 아들들이 태어나 성장하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아비의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제 터를 잃고 낯선 곳으로 데려온 것이 꽃을 피워주고, 씨앗도 싹을 틔우니 심신이 만사 평화로울 거라 기대했다. 예전 같으면 추진하는 것들 다 이루어지리라 하면서 욕심 부렸겠지만 이젠 평화롭기를 바란다. 씨앗을 뿌리고 꾸준히 물을 주면 싹이 튼다는 것을, 이토록 순정한 일을 모르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