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악당과 천진한 날라리. 그리고 아픈 손가락.
2011년 2월 어느 날 오후. 휴대전화에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발신번호가 떴다. 학교였다. 방학 중에 학교로부터 오는 전화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고난과 시련을 의미한다.
“지은 씨?”
1년 차 때부터 나를 ‘지은 씨’로 부르던 부장 선생님이었다. 업무분장 발표 이틀 전에, 그것도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는 고연차 부장교사의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심장이 두근(?) 거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순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게 허무할 정도로 전화기 너머에서는 솔깃한 제안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방과후교육부 부장을 맡게 되었고, 내가 방과후학교 담당 업무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 이름도 찬란한 ‘비담임’을 제안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달라는 내 말에 부장 선생님은 지금 부장회의 중이니 기다리겠다며 전화를 들고 대기했다. 지금 바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최경희 부장님은 정말 좋은 기회를 주는 거라며 몇 번씩 강조하고는, 끝내 내 입에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후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딱히 고마워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방과후학교 업무는 학교에서 가장 힘든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부에서는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방과후 수업 개설을 몹시 장려했는데 그러다 보니 한 분기 당 강좌가 30개 이상씩 개설되었다.(일 년에 총 4분기로 진행된다.) 거기다 교육청에서 권고하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교장, 교감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선생님이 방과후학교 업무로 교감 선생님에게 압박을 당하고는 교무실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교육복지우선지원학교였으므로 기초생활수급자에 해당하는 학생에게는 전액 무료, 차상위계층에 해당하는 학생에게는 일부 무료로 수강을 지원했는데 이 계산을 모두 담당자가 해야 했다. 더해서, 각 강좌를 맡은 선생님들에게 지급되는 강사료도 담당자가 처리해야 했으며 외부강사 관리도 담당자가 맡아야 했다.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에듀파인(Edufine, 학교회계시스템)이 몹시 불안정했음에도 모든 회계처리를 에듀파인을 통해서 해야 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모든 업무의 처리 속도가 몇 배로 지연되고는 했다.
이렇게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임에도 맡고자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비담임’. 나는 담임을 맡으면 에너지 소모가 몹시 큰 편이었는데, 담임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2년째 투병 중이던 갑상선 항진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비담임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달리 이틀 뒤 업무분장 회의에서 나는 1학년 담임에 배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균 시수(일주일 동안 하는 수업의 양)가 18시간이던 국어과에서 여덟 명 중 유일하게 가장 많은 20시간을 맡게 되었다. 최경희 부장님은 난감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도저히 담임에서 빼 줄 수가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노력했는데 역부족이었다나. 그러면서 업무도 거의 없는 고연차 선생님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다만, 우리 학교에는 그런 고연차 선생님이 너무 많았을 뿐이었고 그들을 배려(?)하는 대가로 소수의 저연차나 중간연차 선생님들이 갈려나간 건 덤이었다.) 최경희 부장님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너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 테니 이해하라고 했다. 우리 학교가 고연차 선생님들의 선호학교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인기 덕에 2년째 신규발령이 0명이었을 정도였으니까.
최경희 부장님의 말은 그럴듯했지만 일부는 거짓부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조금 달랐는데, 이 모든 게 최경희 부장님의 설계(?)였다고 한다. 애초에 나를 비담임으로 고려한 적이 없으며, ‘나’를 앉히면 담임과 업무를 동시에 맡길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어과 시수 회의에서 내가 잠시 교과서를 가지러 간 사이에 나에게 시수를 몰아준 것도 최경희 부장님이었다고 한다.
몹시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나는 그저 군말 없이 맡은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의 나는 거절을 잘 못했고,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무서웠고, 어른들이 어려웠다. 유능한 15년 차 기간제 선생님이 교감 선생님의 예쁨을 받는다는 이유로 고연차 선생님들에게 따돌림과 뒷담화 당하는 것을 보면서, 3년 차 신규인 내가 어설프게 옳고 그름을 따졌다가는 박살이 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냥 이를 악물면 일 년 정도야 어떻게든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굳은 각오에도 그해의 업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되었다. 처음 하는 업무였지만 전임자가 전보를 가서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최경희 부장님 역시 처음 맡는 업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장님은 업무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방과후학교 업무가 전혀 전산화되지 않아서 종이로 신청서를 받았는데 33개 강좌에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35명이 신청했다. 평균 700~800번의 신청내용을 엑셀파일에 입력하다 보면 오류가 나기도 했는데 그러면 다시 모든 신청서를 체크해야 했다. 또, 수강취소와 추가신청이 빈번했기 때문에 8시까지 초과근무를 하고도 신청서를 싸들고 집에 가서 새벽까지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렇게 3월 한 달간을 하루에 한두 시간을 자면서 버텼다.(게다가 중학교 1학년 담임은 새 학기에 할 일이 정말, 참, 아주 많다...) 최경희 부장님은 늘 4시 30분에 칼퇴근을 하면서도 나한테 초과근무 상신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 일을 너무 오래 하면 몸이 상하니 일찍 퇴근하라고. 나는 그 말에 일 분이라도 일찍 퇴근하려고 저녁도 먹지 않고 일했다.
학기 초에 여러 선생님들이 우리 부서에 위로차(?) 방문했다. 우르르 닥친 선생님들은 최경희 부장님을 독려하며 방과후업무가 많아서 힘들겠다고 했다. 최경희 부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죽겠어, 정말.’을 연발하며 징징거렸다. 그러면 다들 일 년만 고생하라며, 이렇게 힘든 일을 맡아서 어쩌면 좋냐며 앞다투어 위로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초과근무를 상신하면 안 되는 이유를. 나는 문 바로 앞의 입구 책상에서 그들이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들어오는 웃풍을 맞으며 담임 업무와 수업 틈틈이 미친 듯이 업무를 처리했다.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3월 내내 고행에 가까운 날들을 보내고 4월이 되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최경희 부장님이 병가를 낸 것이다. 병명은 갑상선 암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50대 초반의 싱글이었던 최경희 선생님은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없으므로 요양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2개월의 병가가 끝난 뒤에도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4월 초에 병가에 들어갔던 최경희 부장님이 학교로 돌아온 것은 12월 28일. 방학을 이틀 남긴 날이었다.(그 덕에 일 년 내내 일한 기간제 선생님은 방학 전 퇴직하게 되었고, 최경희 부장님은 방학 중 월급을 전액 받았다.)
나는 그해 내내 담임 업무와 방과 후 업무로 고군분투하면서, 동시에 부장이 해야 할 몫까지 하느라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강약약강인 선생님들이 부장이 없는 부서의 부원은 또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한 수학과 남자 선생님은 방과 후 수업 개설 신청을 하지 않아 놓고 나중에 왜 개설하지 않았냐고 따지기도 했다. 전화로 소리를 질러대며 1층 교무실의 자기 자리에 내려와서 사과하라고 난리를 치길래 2층에 있던 내가 내려가 ‘신청을 안 하셔서 개설을 안 했습니다.’라고 하자 나를 향해 컵을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본 한 고연차 여자 선생님은 나를 복도로 데리고 나가 ‘선생님이 잘못한 거야. 남자 선생님들은 방학 때 집에 있는 걸 싫어해. 그러니까 신청 안 해도 당연히 개설해야 하는 거야.’라고 했다. 장님 나라에선 애꾸가 병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또 죄송해야만 했다.
우리 부서의 하이라이트 업무였던 교내 축제가 12월 26일에 끝났다. 그리고 모든 업무가 마무리되자 최경희 부장님이 복직했다. 방학을 앞둔 12월 28일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교무실로 들어 온 최경희 부장님의 손에는 분홍색 스카프가 들려있었다. 나한테 고생 많았다며 내민 그 스카프를 받으며, 일년 간의 수많은 출근길을 떠올렸다. 차라리 버스에 치여서 죽기를 바라던 매일매일의 출근길을. 그리고 최경희 부장님은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경쾌한 사과를 내뱉으며 그런 내 어깨를 툭툭치고 지나갔다.
한창 업무에 시달리던 3월 어느 월요일, 아침 8시 20분.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 10분 전이었다. 정신없이 아이들에게 공지할 전달사항을 정리하고 있는데 교무실로 1학년 8반 담임을 찾는 전화가 왔다. 나를 찾는 전화가.
“네, 1학년 8반 담임입니다.”
그때였다. 무방비로 받은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야, 이 XX 년아. 너 때문에 우리 딸이 가출했어. 너 이 년,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가서 너 찢어 죽여버릴 테니까.”
2년 만에 듣는 숫자 섞인 욕설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3분 넘는 폭언 중에 욕을 소거하면 남는 내용이 별로 없어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칼을 들고 나를 찔러 죽이러 오겠다는 경고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그제야 나도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교무실이 고요해졌다.
나중에 파악한 내용은 이랬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민지 어머니였는데 민지가 주말에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요일 과학수업시간에 민지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다가 과학 선생님에게 휴대전화를 압수당했고, 그 때문에 가출한 민지에게 전화를 할 수 없어 민지를 집으로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마침 민지의 네 살 터울 언니가 우리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강제전학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던 민지 어머니는, 이 일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학교로 전화를 해 담임인 나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다.
민지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고, (심지어 압수당한 사실도 몰랐고.)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것과 가출이 인과관계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내내 칼을 어느 쪽으로 맞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그날 민지 어머니는 학교에 오지 않았고, 민지는 짧은 가출을 마치고 다음 날인 화요일에 학교에 등교했다.
민지는 천진난만한 날라리였다. 담배를 피우냐고 물어보면 4학년 때 배워서 6학년 때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민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4학년 때 배운 건 맞지만 끊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민지 근처에 가면 늘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애교가 있다가도 수 틀리는 상황에서는 돌변하는 아이였으므로 지도하기 쉬운 아이는 아니었다.
민지는 한 달에 일고여덟 번 정도의 길고 짧은 가출을 반복했다. 민지가 가출할 때마다 민지 엄마는 교무실로 전화해 1학년 8반 담임을 찾았다. 그리고 ‘여보세요’하는 네 음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육두문자를 뱉었다. 아니, 질렀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단전에서부터 분노와 화를 끌어올려 머리통 전체를 울리며 내뱉는 사자후랄까. 그런 민지 어머니가 딱 한 번, 나를 ‘XX 년’이 아닌 ‘선생님’으로 부른 적이 있다.
9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민지가 가출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보통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오던 민지의, 유난히 긴 가출이 이어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교무실 전화기가 울렸고 익숙한 발신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민지 어머니의 고성을 대비해 귀에 귀마개를 꽂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에서는 ‘선생님, 도와주세요.’라는 평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지 어머니는 민지 친구를 통해 민지의 위치를 알게 되었는데, 당신은 갈 수 없는 곳이니 담임인 내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 학교로 오겠으니 같이 가달라고 했다. 협박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그리고 늘 학교에 와서 나를 찔러 죽여버리겠다고 했던,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민지 어머니가 그날은 정말 학교에 왔다.
마침 퇴근시간이어서 그날 남은 업무를 백팩에 넣어 둘러메고 교문 앞으로 나가 민지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약간 몸집이 크고 한쪽 다리를 저는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민지 어머니였다. 민지 어머니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지 친구의 제보(?)에 따르면 민지는 지하 노래방에 있었다. 하지만 편측 마비가 있었던 민지 어머니는 지하의 계단을 내려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 누군가가 담임인 나였던 것이다. 민지 어머니가 편측마비가 있다는 사실보다 놀라웠던 건 민지 어머니의 태도였다. 도무지 몇 달 동안 나를 죽이려고 벼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지 어머니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걷다 보니 십 분 거리의 노래방까지 가는 데에 훨씬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 민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삼 남매의 막내인 민지는 애교가 많고 엄마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 어머니도 그런 민지가 귀여워서 아직도 껴안고 잔다는 것, 요즘 들어 동네 깡패들과 어울리며 가출을 유독 많이 한다는 것, 민지가 가출을 하면 민지 언니가 찾아가서 끌고 온다는 것 등등. 내용은 비범(?)했지만 아이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섞인 엄마의 마음만은 여느 누구와도 같았던, 평범한 학부모 상담이었다.
노래방에 도착해 보니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좁고 가팔랐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 있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혼자 계단을 내려가 노래방을 급습(?)했는데 노래방 안은 주인아줌마 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미 도망갔겠거니 싶어 나오려는데 가장 큰 방에서 음악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가보니 사람 없는 방에 기계가 켜져 있고 덜 마신 술과 음료수가 탁자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래방에는 뒷문이 있었다.
뒷문으로 올라가 보니 넓은 공터가 나왔는데 거기서는 황당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학교의 날고 기는 일진 아이들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개중에는 수업시간에 지적을 받은 게 화가 나서 왜소하고 나이가 많은 여자 선생님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진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무슨 얼음땡이라도 하듯 겁에 질려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를 눌러쓴 큰 덩치의 남자가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아이들을 겁주고 있었다.
“강민지, 나와.”
배에 힘을 주고 힘껏 뱉은 고함에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보았고, 덩치 큰 모자남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노려 보았다. 모자남이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모자남에게 민지 담임임을 밝혔다. 그리고 그러는 그쪽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모자남은 자신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묻는 말에 맞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배움이 짧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와 계시니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나 모자남은 본인이 싫다는 데 어떻게 데리고 갈 거냐며 나에게 바짝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아, 나는 왜 백팩을 메고 간 걸까. 왜 머리를 질끈 묶었나. 왜 화장을 하지 않았나. 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나. 내가 만만한 차림이라 기세에 밀리는 것 같아 일단 눈알이라도 힘껏 부라렸다.
그때였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아이들 몇 명이 골목 쪽으로 도망쳤다. 그중에는 민지도 있었다. 모자남이 모자를 벗으며 이겼다는 듯이 웃었다. 그 순간 모자남의 짧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생이냐고 묻는 내 말에 모자남이 얼버무렸다. 알고 보니 모자남은 인근 지역의 한 직업고등학교 학생이었고, 몇 달 전부터 우리 학교 일진 아이들과 연결되어 온갖 비행을 전수(?)하던 중이었다. 정체를 들킨 모자남에게 민지를 또 데리고 있으면 학교에 연락해서 조치하겠다고 경고하고 돌아 나왔다. 노래방 입구에서 민지 어머니가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망스러운 소식에도 민지 어머니는 나에게 고맙다고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불편한 걸음으로 온 길을 돌아서 갔다. 그리고 나 역시 불편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섰다.
며칠 후 민지는 한 술집에서 모자남 옆에 앉아 술을 따르다가 발견되었고, 그 모습을 발견한 민지 언니는 소주병을 깨 모자남을 참교육(?) 시킨 뒤 민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집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그 뒤로도 민지의 가출은 계속되었는데 다만 달라진 건, 하루에 한 번은 아이가 안전한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학교에 밥 먹으러 와.’라는 내 문자에 민지가 정말 점심시간에 학교에 나타났기 때문이다.(그리고 정말 밥만 먹고 도망갔다.)
어떤 날은 가출한 다른 학교 친구를 데려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반찬 통을 가지고 와서 반찬만 싸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민지는 하루에 한 번, 점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에 나타났다. 다른 선생님들은 점심시간마다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가출한 아이를 기다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밥만 먹고 가는 아이를 웃는 얼굴로 보내는 건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민지를 놓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아이와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다행히 민지의 가출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12월에는 단 한 번의 가출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가출 안 하냐는 내 농담에 민지는 예의 그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학교 밥이 제일 맛있더라고요.”라고.
윤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아이였다. 윤하 어머니는 미성년자일 때 혼자 윤하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윤하를 부모님께 맡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윤하는 줄곧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언젠가부터 윤하는 엄마와 연락을 하고 간혹 만나기도 했는데, 그 만남이 자유롭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윤하 어머니는 재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물여덟이던 나보다 세네 살 많았던 윤하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었다.
천진난만한 유형이던 민지와 달리 윤하는 머리가 좋고 조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 데다 외할아버지의 투병으로 외할머니가 집을 자주 비우게 되자 윤하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지와 윤하는 성향이 다른 편이었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둘이 함께 있을수록 비행의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탐색기가 끝나고 4월이 되자 복장 불량, 흡연, 태도 문제 등으로 민지와 윤하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선생님들은 생글거리다가 순간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민지에 비해 묘하게 예의 없는 태도를 보이는 윤하를 더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어떤 쪽이었냐면, 윤하가 더 마음이 쓰였다. 윤하를 보면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아빠와 늘 우울했던 엄마 사이에서, 부모의 사랑에 목말랐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내가 썩 어른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윤하에게 다가가는 것이 참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호시탐탐 윤하의 틈(?)을 노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5월 수련회였다. 장기자랑 무대에 오른 윤하가 노래를 꽤 잘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윤하에게 노래하는 게 좋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청 지원 사업을 뒤져 300만 원의 예산을 끌어 와 학교에 없던 ‘밴드부’를 만들었다. 업무에 치여 죽기 일보직전인 데다 음악에 문외한인 국어 교사가 밴드부를 만든다고 하니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교장, 교감선생님만은 사업이 추가되어 학교 점수에 반영된다는 측면에서 환영해 주었다.
밴드부를 모집하니 다행히도 기타 치는 아이, 베이스 치는 아이, 드럼 치는 아이, 건반 치는 아이가 각각 한 명씩 들어왔다. 그리고 보컬은 윤하였다. 다섯 명의 아이를 데리고 낙원상가에 다니며 교체가 필요했던 스네어 드럼과 키보드를 골랐다. 예산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상의 끝에 고른 품목이었는데, 내가 문외한인 탓에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정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악기를 사고 피자를 함께 먹으며 앞으로 나갈 대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악기를 다루는 아이들이 밴드 활동에 적극적인데 비해 윤하는 시큰둥한 편이었다. 하지만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아서 그랬는지 윤하는 밴드부 모임에 곧잘 참여했다. 업무 부담이 너무 컸지만 윤하가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밴드부 활동 초반에 잘 참여하던 윤하가 학기 말이 될수록 달라지기 시작했다. 연습에도 잘 나오지 않았고 대회 당일에 연락이 안 된 적도 있었다. 민지의 가출도 점점 심해지던 시점이었는데 민지와 함께 인근 공고의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예쁜 얼굴의 윤하가 고등학생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불안했다. 왜냐하면 윤하가 외로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떠나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 앉아 있는 윤하의 얼굴은 늘 공허했다. 다행히 윤하는 1학년을 그럭저럭 마무리했다. 하지만 윤하의 텅 빈 표정과 깊은 외로움이 깃든 눈동자를 보면 내 마음이 늘 좋지 않았다.
나는 그해 내내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죽고 싶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리라 결심했다. 다만, 맡은 일들과 맡은 아이들이 있으니 일단 일 년을 마무리하자고 생각했다. 왜 진작 그만두지 않았냐고 한다면, 놀고먹는 쉬운 직업이어서도 아니고 방학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 년 내내 종업식을, 그러니까 '면직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학년 말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만두겠습니다.’가 아니었다. ‘내년에 2학년 담임을 주십시오.’라는 말이었다. 3년 차인 내가 학년을 지정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나 대신 윤하를 데리고 올라가겠다는 말에 선배 선생님들은 흔쾌히 나를 2학년 담임으로 배정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또 면직에 실패했다. 그리고 아픈 손가락을 꼭 쥔 채 4년 차 교사가 되었다.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