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와 추격자. 그리고 사자인형 필통과 작은 귀를 가진 소년
첫해를 후회 없이 보낸 신규 교사가 있다면 전생에 최소 페스탈로치였거나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유능하고 싶었지만 부족함이 많았던 그냥 보통의 신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첫해의 처참한 실패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담임이 지나치게 온정적이거나 유약하면 오히려 아이들이 불안해한다는 것과 단순한 외부자극인 체벌은 효과가 없다는 것.
2010년 3월 2일 화요일. 신규 1년 차에 몸과 마음을 갈아서 얻은 이 결론을 교무수첩 맨 앞장에 비장하게 쓴 뒤. 2년 차 새 학기를 야심 차게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학교는 양파였다. 까도 까도 새로운 고난이 끝없이 펼쳐지는 아주 매운 양파.(줄줄 나는 눈물은 덤이다.)
그 해 새 학기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학교에 쳐들어온 한 남자의 등장으로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졸업생의 아버지였는데, 자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발급해 보고 종합의견에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다소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라는 평가를 생활기록부에 쓰는 교사는 교사 자격이 없다나. 아무튼 그 대가로 중 3 때의 담임을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순간 교무실이 일시정지 되었고, ‘중 3 때의 담임’이 대체 누구인지 찾는 눈알들만이 분주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몸을 낮춰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한 성격의 40대 여자 선생님이었다. 야구방망이를 든 남자는 빠른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그때부터 학교 건물에서 일대 추격전이 벌어졌다. 도망가는 선생님의 모습도 충격이었고, 욕설을 내뱉으며 그 뒤를 따라가는 남자의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충격이었던 건 모두가 그 모습을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는 거다. 마초맨이었던 체육과 출신의 교무부장도, 욕과 고함이 특기‧적성이던 교감 선생님도 제자리에서 목만 길게 빼고 추격의 동향을 살필 뿐이었다.
교무실이 있던 1층을 두어 바퀴 돈 후에도 남자의 추격이 끝나지 않자 도망치던 선생님은 교장실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남자는 여전히 야구방망이를 높이 쳐들고 소리를 지르며 교장실로 도망치는 그 선생님을 쫓아갔는데, 그 남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홍해처럼 갈라지던 동료교사들이 잊히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 담임 선생님은 교장실로 뛰어 들어가 책상 밑에 숨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작고 마른 어른이었던, 정년이 고작 일 년 남은 백발이 성성한 교장선생님이 그 앞을 막아서면서 소란스러웠던 추격전이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그 남자를 멈추는 데에는 큰 목소리도, 센 완력도 필요 없었다. 그저 동료 한 명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한동안 몹시 슬프고 우울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두 번째로 담임을 맡게 된 학년은 2학년이었다. 전년도에 1학년을 맡았으니 그 아이들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간 셈이다. 잘 아는 아이들이라 편할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기피학년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들이 1학년일 때 큼직한 학폭위가 몇 차례 있었다.(그중 하나가 전편의 주희 사건이었다.) 그러나 주희의 학폭은 발끝도 못 미칠 끔찍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집단 성폭력 사건이었다. 그것도 동성 간의.
아이들이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 교실에서 남자아이 네 명이 작고 왜소한 남자아이 한 명을 붙들고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고 한다. 하필 점심시간이어서 복도와 교실에는 많은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가해 학생들이 피해 학생의 팔과 다리를 결박하고 있어 피해자는 잠시간 주요 부위를 노출당했다. 잠시였다고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억겁의 시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막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피해 학생은 전학을 갔고, 피해 학생의 부모님은 가해 학생들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갓 입학한 1학년 아이들의 충격적인 비행에 선생님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등교정지와 교내봉사 징계가 끝난 후에도 가해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내려와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지나가다가 한 마디씩 훈계하거나 했는데 특히 교감선생님은 꼭 꿀밤을 한 대씩 때렸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입구 자리가 내 자리였고, 그 바로 앞에서 교감 선생님의 꿀밤을 맞던 아이가 영진이고, 그 영진이가 2학년이 되어 내가 맡은 반으로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 반 명단에서 영진이를 발견했을 때 마음이 참 복잡했다. 그 성폭력 사건은 내가 가르치지 않는 반에서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폭력 가해자’라는 것이 내가 가진 영진이에 대한 유일한 정보였다.
영진이는 몸집은 작았지만 눈빛이 매서웠고 세 번 물으면 한 번, 그것도 대충 대답하는 아이였다. 지각과 결석이 빈번했으며 두발과 용의 복장 지도가 엄격하던 때였음에도 교복을 잘 입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찰은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외되는 편이었다. 작년의 그 사건은 아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는지 다들 영진이를 멀리했다. 두려워한 아이도 있었지만 경멸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어떤 쪽이었냐면, 궁금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가. 하지만 대화는커녕 영진이는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세 달쯤 지나고 여름방학이 다 되어갈 때였다. 그날도 영진이는 가방을 메지 않은 채 사복을 입고 등교했다. 따로 교무실로 부르면 도망가기 일쑤였으므로 주의를 주기 위해 영진이 책상 근처로 갔다. 그리고 영진이가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동물 인형 필통이었는데 필통 끝에 달린 사자 머리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영진이는 1센티미터 남짓 남은 연결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붙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기워 줄까?”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처음으로 영진이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작지만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라고.
부모님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가 많은 학교 특성상 옷이나 신발주머니가 뜯어진 아이들이 많아 서랍에 늘 반짇고리를 두고 다녔다. 안타까운 건 내 바느질 솜씨가 처참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내 엉망진창 바느질을 좋아해 주었다.(정확히는 뜯어진 곳을 꿰매어주는 관심이 좋았던 거였겠지만.) 영진이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흉물스러운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단단히 몸통에 붙어 있는 사자 머리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영진이 마음의 틈을 발견했다.
며칠이 지나자 영진이는 또 결석했다. 주기적인 결석이었다. 나는 그다음 날 학교에 조각케이크를 사갔다. 그리고 영진이는 결석 다음날엔 늘 그랬듯 가방도 없이 사복을 입고 등교했다.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청소를 시켰는데 다행히 영진이는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청소가 끝난 후, 집에 가려는 영진이를 자리에 앉히고 조각케이크를 꺼냈다. 가장 배고플 시간. 중학생에게 방과 후 간식은 무조건 통한다. 영진이는 케이크를 순식간에 다 먹었다. 그리고 내 눈치를 보며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나는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슬쩍 건넨 ‘왜 결석했냐’는 가벼운 질문에 영진이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며칠 전 꿰맨 사자머리 덕분이었는지, 막 먹은 케이크 덕분에 당 충전이 되어서였는지, 아니면 사실은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작년 그 사건 이후로 몇천만 원의 합의금을 부모님이 부담해야 했다는 것, 그 일로 부모님이 자주 싸운다는 것, 가끔 화가 난 엄마가 교복과 교과서를 찢어버린다는 것, 엄마가 가방을 버릴 때 좋아하는 사자인형 필통이 찢어져서 속상했었다는 것, 사건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등등. 교복을 입지 않은 게 아니라 교복을 입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내 눈을 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영진이를 위로할 순 없었다. 피해를 입은 아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담임으로서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가만히 영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었다.
얼마 후 영진이 어머니에게 연락해 학교에서 상담을 진행했다. 그리고 영진이가 반성하고 있고 나아질 것임을 설득했다. 어머니의 폭력이 동반된 훈육에는 물론 화풀이도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 테지만 영진이에 대한 낙인, 그로 인해 동반되는 실망, 앞으로 일어날 것만 같은 더 나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굳은 얼굴로 학교를 찾았던 영진이 어머니는 상담이 끝나자 옅은 미소를 띠며 영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영진이는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고,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조금씩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고 또래다운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상담한 이후로 늘 교복을 단정하게 입었고 새 가방에 새 교과서를 넣어서 등교했다. 모든 게 새것이었지만 목이 얼기설기 꿰매어진 사자 인형 필통만은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다.
학기 초 명렬표에서부터 존재감이 강했던 영진이에 비해 의외로 나를 힘들게 한 아이도 있었다. 바로 우리 반 반장, 희찬이었다.
영진이는 아웃사이더형에 사건이 뚜렷한 아이였다. 그래서 오히려 잘 보이는 아이였다. 하지만 희찬이는 달랐다. 반장이 될 정도로 두루 인기가 있는 아이였음에도 담임인 나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사건건 아이들을 선동해 내 지도를 방해했다.
가령, 운동회에서 우리 반이 얻은 문화상품권으로 종업식 날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면 ‘다 필요 없고 N빵 해서 현금으로 달라.’는 식이었다. 그러면 희찬이와 친한 껄렁껄렁한 남자아이들이 ‘옳소, 옳소!’하기 시작했다. 반장으로서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학급 운영을 방해하는 희찬이에게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때가 많았다.
작년부터 앓았던 갑상선 항진증이 너무 심해져 결국 한 달간 병가를 낼 수밖에 없었는데 병가 후에 담임으로 복귀하니 희찬이는 이미 교실의 왕이 되어 있었다. 희찬이의 표정과 말에 반 아이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희찬이는 교사와 별로 잘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였다. 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에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희찬이가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에게 이끌려 교무실로 왔다. 지도 과정에서 희찬이가 많이 흥분하자 화가 난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담임인 나에게 온 것이었다.(담임인 나를 희찬이와 함께 혼내기 위해서였지만.) 희찬이와 나란히 서서 어리둥절한 채 훈계를 듣다가 알게 된 갈등의 원인은, 희찬이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때만 해도 두발과 복장에 대한 지도가 엄격했었다. ‘남학생의 두발은 앞 머리는 눈썹이 보여야 하고, 옆머리는 귀가 보여야 하고, 뒷 머리는 옷깃에 닿지 않아야 한다.’가 우리 학교 규정이었다. 희찬이의 경우 앞머리와 뒷머리는 규정에 맞게 단정했지만 옆머리가 귀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단속하려 하자 희찬이가 강하게 저항했고, 화가 난 선생님이 담임인 나에게 온 것이다.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은 ‘담임이 지도를 안 하니 애가 이 모양이다.’라는 말을 몇 번씩 반복하고서야 조금 화가 풀렸는지 ‘거 좀 제대로 지도하세요!’라며 일갈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내 앞에 덩그러니 남은 희찬이는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날 선 눈으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그럴만한 게 그땐 그냥 머리카락을 잡고 잘라버리는 선생님도 일부 있었으니까.) 교복도 단정하게 입는 편이었고 특별히 멋 부리는 데에 사활을 거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헤어스타일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희찬이의 태도가 너무 필사적이어서 일단 물러섰다. 일주일의 시간을 줄 테니 주말을 이용해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라는 내 말에 희찬이는 대꾸도 않고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희찬이와는 대화가 되지 않았고, 희찬이 어머니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미 다른 학교로 전보 간, 희찬이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그리고 답을 얻었다. 희찬이가 옆머리에 집착한 이유는 귀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희찬이는 선천적 소이증을 앓고 있었다.
약속한(일방적이긴 했지만) 일주일이 지났지만 희찬이는 당연히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벌청소를 하라는 내 말에 희찬이는 군말 없이 빗자루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잘리거나 실랑이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으리라. 희찬이의 청소가 끝나길 기다리며 복도를 서성거리는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후, 텅 빈 교실에서 희찬이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 귀가 조금 작다며?”
희찬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나를 노려보는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육두문자가 발사될 것 같았다. 하지만 늘 내 말에 빠르게 반응하며 거침없이 말하던 희찬이의 입에서 그때만큼은 어떤 단어도 나오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나만 노려보는 희찬이를 향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했다.
“그게 뭐 어때서.”
분했는지 부끄러웠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희찬이 눈에 가까스로 매달려있던 눈물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입학하면서 어머니가 담임선생님께 소이증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었고, 그 일로 희찬이와 희찬이 어머니는 학교에 대해 기대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희찬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해 줄 수 있는 말도 많지 않았다. 평범한 귀를 가진 내가 하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네 귀가 크고 작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귀가 큰 다른 아이들보다 네가 훨씬 인기 많고 멋있지 않냐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일주일 간 고민한 끝에 손바닥만 한 종이를 코팅해서 한 장 주었다. 그 종이에는 대강 이런 말을 적었던 것 같다.
‘이 아이는 소이증이 있습니다. 앞머리와 뒷머리는 규정에 맞게 단정함을 유지하겠습니다. 다만 옆머리는 귀를 가릴 수 있도록 배려 부탁드립니다. 2학년 10반 담임 황지은.’
희찬이의 태도는 그해가 끝날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선생님들과 희찬이의 마찰이 줄었다는 점은 나름의 성과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수업 시간에 내가 던진 농담에 희찬이가 몇 번 피식 웃기도 했던 것 같다.
첫해와 달랐던 건 내가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게 나는 3년 차에 접어들었다.
# 모든 이름은 다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