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모범생, 21세기 교사가 되다.
애비가 종이었던 누군가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고 그에게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러웠던 것이었다면(서정주, <자화상>),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인정욕구이며 나에게 세상은 가도 가도 피곤한 것이었다. 그럼 나머지 이 할은 뭐였냐고? 인정욕구로 점철된 인생에서 나머지 이 할이 명랑, 쾌활, 긍정적 사고 같은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하다못해 회복탄력성이라도) 애석하게도 나머지 이 할은 ‘예민함’이었다. 인정욕구 MAX의 인간이 예민함을 겸비할 때, 그 인생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피곤할지 나도 겪기 전엔 몰랐다.
인정욕구로 범벅된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정받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나는 탄생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환영받기는커녕 나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에, 가장 처음 만난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욕을 먹으며 태어났다. 1984년 3월 어느 날, 부산의 한 동네 산부인과에서 우리 엄마는 열두 시간 넘게 진통을 하며 초산의 고통을 치르고 있었고 그런 엄마의 다리 사이에서 내 머리통을 우악스럽게 끄집어낸 의사는 나를 간호사에게 던지듯 넘기고 씨팔거리며 후처치를 했다고 한다. 이유는 건강보험 때문이었다. 1977년에 처음 시행된 국민건강보험에 우리 엄마가 가입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가입했다는 사실을 애 낳는 날 말했기 때문에. 아주 정확히는 현금으로 돈을 챙겨서 탈세를 해야 했는데 그걸 못했기 때문에.(여담이지만 엄마는 그날 일이 너무 충격이어서 삼 년 후 내 동생을 낳을 땐 대학병원에 가서,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당당히(?) 돈을 다 지불하고 출산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인정욕구에 그렇게 매이냐고? 그렇진 않다. 그저 재수가 없어서 야만의 시대에 넘쳐났던 금수 같은 놈들 중 하나를 만났을 뿐. 그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의 수난이었지 나는 기억도 전혀 나지 않는 일이다. 다만, 그 일이 있은 후 사십 년이 지나 내가 애를 낳고 나서야 들은 이 이야기가 좀처럼 인정받지 못한 내 삶을 운명적으로 완성해 주는 ‘달마의 눈’처럼 느껴져서 짚고 넘어가 본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자 딸이란 걸 확인하고 삼 일간 가출했다. 산부인과에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엄마는 빈집에서 홀로 나에게 젖을 먹이고 또 직접 연탄을 때어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그렇지만 지나고 나서는 그때가 오히려 나았다고 한다. 삼 일간의 가출을 끝내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와, 엄마에게 안겨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나를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고추도 달리지 않은 것을 먹여 살려야 한다니 매사에 계산적인 장사꾼인 아빠에겐 여간 손해 보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아빠는 실제로 장사를 했고, 수완도 좋았다.) 그리고 한참을 더 지나고 나서는 그때가 그래도 나았던 것 같다. 그땐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기억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빠의 경멸과 무시는 내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누적되어 갔다. 좀 더 빨리 독립했다면 좋았을 걸.(가출이라도.) 하다못해 아빠에게 맞서 원망이라도 같이 퍼부었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그땐 잘못된 게 아빠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마조차도.
엄마는 딸을 낳은 죄로 삼 년을 소박맞을 공포에 떨다가 산 중턱에 있는 절에서 치성을 드려 겨우 고추 달린 내 동생을 낳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야기한다. 네 동생을 낳지 않았으면 너나 나나 쫓겨났다고. 그런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내 존엄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살아남으려면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도 잘 들었고, 공부도 잘했다. 반에서 일 등을 해도 공장 경리로 보낸다는 아빠의 말에 고분고분히 공장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아빠는 실제로 남들 다 유치원 다니는 일곱 살 때 나를 주산학원에 보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70년대가 아니다. 90년대 이야기다. 심지어 그땐 다 계산기 썼다.) 어쨌든 지난 사십 년 간 아빠는 내 존재를, 내 가치를 죽도록 부정했고 나는 죽도록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 잘 울지 않았고, 웃는 일은 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꼬라지를 부릴 때면 어릴 땐 순했는데 커서는 왜 이렇게 쌈닭이 됐냐고 한다. 엄마가 틀렸다. 사람 본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예민하고 눈치 빠른 나는 어릴 때도 누울 자리를 보고 꼬라지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사방팔방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누울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1991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런 나에게도 조금은 비빌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칭찬이라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이 내가 입고 있던 사슴무늬가 수 놓인 흰색 스웨터가 예쁘다고 한 말에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담임 선생님은 몰랐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런 칭찬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학교를 사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유사 부모(?)였고, 그런 선생님이 있는 학교는 나한텐 정서적 집이었다. 중학교 땐 무용 전공인 체육 선생님 시간에 체육복을 안 챙겨 왔다는 이유로 ‘걸레’ 소리를 듣기도 했고, 고등학교 땐 반 분위기를 잡는다는 거지 같은 이유로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초중고 12년 동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좋은 어른이었다. 우리 부모님만큼 나를 사랑해 주는 건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보다 나를 더 높게 평가해 주고 표현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렸고 다른 사람의 마음, 특히 어른의 마음은 너무나도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부모님의 무뚝뚝한 사랑보다 선생님들의 가벼운 칭찬이 더 소중했다.(마흔이 되고 아이도 키우는 지금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보살핌이 그 자체로 얼마나 큰 사랑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선생님이 나를 불러 받아쓰기를 잘한다거나 글짓기를 잘한다고 칭찬할 때, 학습지를 나누어 주거나 숙제를 걷어오는 일을 맡길 때, 방송반이었던 나에게 목소리가 예쁘다고 했을 때 나는 참 행복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느낌에 안도했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에 휩싸였던 2002년, 나는 고3이었다.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교복 안에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야자를 제끼고(?) 인근 체육관으로 튀곤 했다. 축구를 별로 좋아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규칙도 잘 모르는데 왜 갔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 번은 담임 선생님한테 걸려서 교무실에 불려 갔는데, ‘너는 제발 공부 좀 하라’고 하셨다. ‘제발’이 들어가서 그런지 혼난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호소에 가까웠다. 3학년 담임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는데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하셨다. “저거 공부 좀 안 해도 돼. 국어로 먹고살면 돼.”
나는 다른 과목에 비해 국어‘만’ 특별히 잘하는 애였다. 1학년 담임 선생님도 3학년 담임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었고 두 분이 친했기 때문에 내 진로는 그 두 선생님에 의해 ‘국어교사’로 정해지고 말았다. 물론 1997년에 터진 IMF 덕에 공무원붐이 일기도 했고, 나를 공장에 보낸다고 한 아빠도 교사라면 뒷바라지해 주겠다 한 이유도 있다. 게다가 나는 그다지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그나마 국어라면 자신 있었고 누가 시키면 거절도 못하는 애였어서(그게 내 평생을 좌우할 진로일지라도.) 여차저차 그리됐다. 그렇게 2003년, 캐리어 가방 하나에 한 달 치 월세 겸 생활비 백만 원을 들고 혼자 상경해 서울의 모 대학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평범했다. 크게 재미있지도, 그렇다고 아무 일이 없지도 않았다. 교생실습을 나가기 전까진 큰 목적 없이, 영혼 없이 학점 채우면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2006년 4월, 교생실습이 시작됐다. 실습 첫날 교단 앞에서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며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학교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간의 짧은 실습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매 순간이 나에게 치유였다. 아이들이 마치 어린 시절의 나처럼 보였고, 그 아이들을 돌보면 그 시절의 나도 함께 돌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호의 가득한 꾸밈없는 애정이 좋았다. 순간적인 관심이 대부분일지라도, 긴 인생 속 찰나의 인연이라도 인간 대 인간이 서로 다정한 마음으로 마주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교사가 되기로.
하지만 그해 말에 친 첫 임용시험에서 서울시교육청은 중등 국어과로 응시한 567명의 예비교사 중 14명 만을 교사로 선발했다.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만 사범대 입결이 높았던 시기라 어정쩡한 나 같은 애는 당연히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아빠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다. 짐을 싸서 본가로 내려간 날 아빠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너는 인생에 실패한 패배자다. 낙오자다. 앞으로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치 없는 인간이다.’라는 저주를 들어야 했다. 어떤 날은 불을 끄고 방에 누워 깜깜한 천장을 보며 다 포기할까 싶다가도 다시 한번 교단에 서고 싶다는 생각에 하루, 이틀 버티다 보니 어느새 2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행히 세 번째 응시한 임용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9년, 캐리어 가방 하나에 보증금 천만 원을 들고 다시 상경해 교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