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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 할 인간 Aug 19. 2023

교사가 되었지만 선생님은 아니었던 이야기

지은 씨, XX 년, 절벽으로 불렸던 비운의 신규. 그리고 몽쉘통통

   2009년 3월 2일 월요일. A중학교에 첫 출근을 했다. A중학교는 학군지에서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 떨어진 곳의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학교였다. 승진을 앞둔 고경력 교사들이 많았고, 그들이 점수를 위해 끌어오는 각종 사업이 많았고(실무는 대부분 저경력 교사 및 기간제 교사의 몫이었지만-), 차상위 계층이나 기초생활수급자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신규로 발령 난 교사는 총 네 명이었는데 그야말로 오랜만에 발령이 나서 위로 5년 차 이내의 선배는 단 두 명이었다. 이 모든 데이터는 ‘신규의 무덤’이라는 결과로 귀결된다.      




  미친 듯이 업무가 몰리는 통에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릴 정도였지만 내가 미숙하니 어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자문서로 기안하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회식 때 술잔 돌리기를 하던 체육과 출신의 마초맨 교무부장님은 ‘대학 때 이런 것도 안 배우고 뭐 했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사범대에서는 전자문서 기안하는 방법은 안 가르쳐 준다. 신규 연수에서는 잘 나가는 고경력 교사의 영웅담이나 교육청 높은 분들의 훈계를 주로 들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틀린 정보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말대꾸(?)가 용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참고로 체육과 신규 선생님은 한 학기 내내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어야 했다. 다른 체육 선생님들이 사시사철 트레이닝복인 것에 비하면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그저 선배들과 잘 지내고 싶었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개나 주고 눈치껏 필사적으로 학교의 시스템을 익혀나갔다.  


  그런 온순한 노예였던 내가 적지 않게 상처받은 부분이 있었는데,  같은 국어과였던 3학년 부장 선생님이 나를 ‘지은 씨’로 부르는 일이었다. 15년 차인 지금까지도 교사가 교사에게 ‘OO 씨’라고 부르는 건 본 적이 없다. 나 역시도 수많은 신규교사를 만났지만 그들을 부르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생략한 적은 없다. 지금은 퇴직했을, 당시 나이가 50세 전후였던 그 선배 교사는 전보 가기 직전까지 무려 3년 간 나를 ‘지은 씨’로 불렀다. 그리고  ‘OO 씨’로 불린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 간 쭉 교무실무사로 일했던 미나 씨와, 나. 둘 뿐이었다. 단순히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어서 서운했던 건 아니었다. '지은 씨'로 불릴 때마다 '너는 아직 교사 자격이 없어. 어딜 감히-'라는 일종의 경고를 받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부장님과의 악연은 안타깝게도... to be continued.




  신규 네 명 중 세 명이 담임으로 배정되었는데 나는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열정이 넘치는 애송이 담임에 호의적이셨다. 어설픈 신규를 귀엽게 보는 시선도 있었고, 힘내라고 격려도 종종 해주셨던 것 같다. 맡은 반 아이들과 나는 띠동갑이었는데 학부모님들의 연배가 나와 띠동갑 정도였으니 내가 아이들을 보는 시선과 비슷했으려나. 가끔은 ‘선생님은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시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듣기도 했지만 저경력 미혼 여교사라면 한 번쯤은 듣는 레퍼토리이므로 그러려니 했다. 내용은 ‘무시’였지만 어쨌든 구색을 갖춘 대화였으므로. (애를 낳은 지금은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출산경험 유무는 하등의 상관관계가 없다-라는 결론이다. 그러니 교사의 전문성을 폄하하고 비출산 교사들을 편견으로 싸잡는 이런 멘트는 자제되길 바란다.)

  

  문제는 민규 어머니였다. 민규는 학교에 오기 싫어 아프다고 자주 거짓말을 하는 아이였다. 학교에 있다가도 머리나 배가 아프다며 조퇴를 하곤 했다. 교우관계에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민규는 소위 날라리(?)들과 가깝게 지내며 힘을 과시하는 쪽이었다.

  그날도 민규가 일과 중에 배가 아프다며 집에 보내달라며 교무실로 내려왔다. 민규는 일단 보건실에 다녀오라는 내 말에도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민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다 통화가 연결되었고,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등학생인 민규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민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오빠 담임.”

  “아이 XX 년이 왜 또 전화하고 OO이야.”

  “아. 몰라. 어떡해.”

  “끊어 그냥!”

  그리고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교무실 유선 전화기를 통해 새어 나오는 숫자 섞인 비속어에(발음상) 교무실이 조용해졌고, 민규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마 그전 상담에서 내가 했던 말이 거슬렸으리라.

  민규 어머니는 한겨울에 아이의 옷을 다 벗겨 문 밖에 내쫓을 정도로 강하게 훈육하다가도 금세 미안해서 절절매며 원하는 걸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금 일관되게 훈육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다.’라는 시건방진(?) 조언을 했었다. 물론 민규 어머니는 참지 않았다. 바로 ‘너 몇 살이야?’라는 시비의 정석과도 같은 멘트를 날렸으니. 순간 몹시 불쾌했지만, 세상 잘못이 다 내 책임인 줄 알았던 자존감 제로 신규였던 나는 재빨리 옳고 그름과 자존심은 개나 주고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를 출력했다. 그랬음에도 XX 년으로 불리게 된 건 참 유감이지만.


  어쨌든 그날부로 나는 민규의 지도를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학교에서 친구들과 생기는 트러블은 관리했지만 개인적인 근태는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중학교 첫 해에 습관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담임을 XX 년으로 부르면 아이도 나를 XX 년으로 알 것이기에. 그리고 엄마를 등에 업은 민규가 XX 년이 하는 지도를 따를 리가 없기에. 그리고 민규 외에도 서른네 명의 아이들을 케어해야 했기에 도리가 없었다.

  내가 몇 살인지 궁금해하던 민규 어머니는 나보다 딱 열두 살이 많았다. 당시 서른여덟. 지금의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 만일 지금 민규 어머니를 만났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저를 존중해 주고 지지해 주세요. 민규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십 수년 째 곱씹고 있는 이 말은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만회하고 싶은 내 욕심일 뿐, 14년 전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한들 돌아오는 말은 뻔했을 것이다.

  "XX 년이 OO 하네."




  2학기 중간고사 첫날이었다. 반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1층 교무실에서 4층 교실까지 뛰어 올라가는데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두통약을 먹고 시험을 잘 마무리했지만 교무실로 돌아온 후에도 숨이 찬 느낌이 없어지지 않고 심장이 계속 빨리 뛰었다. 그리고 얼마 후 거울을 보다가 목에 아기 주먹만 한 혹이 튀어나온 걸 발견했다. 그리고 이비인후과, 내과를 거쳐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병명을 알게 되었다.

  동네 내과에서는 이렇게 높은 수치는 처음이라며 대학병원에 가기를 권유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어 진료를 받았다. 거기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이렇게 높은 수치는 처음이라고. 의사 선생님은 쓸 수 있는 최대치의 약을 써보고 안되면 방사선 치료를 하자고 하셨다. 갑상선 항진증이 심한 상태에서 수치를 내리는 약을 강하게 쓰니 체중이 3주 만에 20 킬로그램 늘었다. 약 부작용으로 아침에 출근하다가 기절한 적도 있었고 원래 좋지 않았던 위장은 더 나빠져서 밥 한 공기를 세끼로 나눠 먹었다. 의사 선생님은 휴직을 권했지만 미친 책임감으로 무장한 어리석은 신규였던 나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가면 학교가 안 돌아가는 줄 알고 미련하게 버텼다. 물론 신규가 감히(?) 휴직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다.


  내 인사기록카드를 보면 키가 168센티미터에 몸무게가 47킬로그램으로 되어있다. 발령받으면서 건강검진했던 기록이다. 빼빼 마른 체형에서 3주 만에 20킬로그램이 쪘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갑상선 항진증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병이어서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듣고 흘린 걸 어떻게 아냐고? 주변 선생님들이 툭하면 나한테 밥을 좀 줄이라는 둥 운동을 하라는 둥 말했기 때문이다. 먹고 빼는 문제가 아니라 호르몬 문제라고 아무리 입 아프게 말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눈도 붕어처럼 튀어나왔었는데. 한 남자 도덕 선생님은 나한테 ‘덩치가 남자 같다’라고 했다. 속으로 ‘저렇게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도덕을 가르치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빠 뻘인 선배 선생님에게 차마 뱉을 순 없었다.


  아이들의 관심은 더 노골적이고 무례했다. 살이 쪄서 옷을 계속 살 수밖에 없었는데 옷이 자주 바뀌니 한 여자아이가 ‘선생님, 오늘 옷도 예뻐요.’라고 말해주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넘어가려는데 늘 조금씩 삐딱했던 성우가 중얼거렸다. ‘옷 살 돈으로 얼굴이나 뜯어고치지.’라고. 중얼거리는 것 치고는 큰 목소리여서 반 아이들이 다 들어버렸는데, 몇몇 여자아이들은 성우를 흘겨봤고 성우 주변의 남자아이들은 킥킥거렸던 기억이 난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막상 혼내기도 민망해서 못 들은 척하고 수업을 이어갔다. 그때였다.

  “샘, 석진이 폰에 샘 뭐라고 저장돼 있는지 아세요? 야, 근데 그거 이제 바꿔야겠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관심이 석진이에게 몰렸다. 내막을 아는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고 석진이는 얼굴이 벌게진 채 욕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지우려고 했다. 그때도 모르는 척했었어야 했는데. 평소에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이였기 때문에 그래봤자 별 거겠냐 싶어 휴대폰을 빼앗아 확인했다. 석진이가 지우려고 했던 건 내 번호에 저장된 호칭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아니더라도 최소 ‘담탱이’ 정도일 줄 알았는데 내가 참 순진했다. 나는 ‘담임’도 ‘담탱이’도 아니었다. 나는 ‘절벽’이었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돌려주고 궁금해하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옳고 그름과 자존심은 개나 주고 성적수치심을 뒤집어쓴 채 수업을 이어갔다.




  그 해엔 정말 업무가 많았다. 신규 첫해에 고사, 학부모시험감독 업무를 맡았었는데 담임과 병행하기엔 좀 버거웠던 것 같다. 몸도 좋지 않았고, 이래저래 여러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걸 꼽으라면 담임으로서 무능함을 느꼈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수업을 하러 우리 반에 들어갔는데 미애가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어두운 남색 교복 전신에 흰 분필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미애는 약간 행동이 어눌한 과체중인 여학생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수시로 미애를 놀렸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미애는 그것도 관심이라고 좋아하고 크게 반응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남자아이들을 훈계하고, 미애에게는 단호하게 화를 내라고 말해봤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터져버린 거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니 미애를 교실 한쪽으로 몰아넣고 남자아이들이 분필 지우개를 번갈아 던졌다고 한다. 분필 지우개를 던졌던 사람은 모두 손을 들라고 했더니 남학생 열일곱 명 중 열네 명이 손을 들었다. 한 명을 향한 대다수의 폭력.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느꼈다. 담임인 내가 지금까지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미애를 괴롭히는 분위기가 당연해졌다고 생각하니 큰 죄책감이 느껴졌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미애에게 분필지우개를 던진 아이들을 교실 밖으로 내보낸 뒤, 열네 명의 아이들을 복도에 줄 세우고 한 명 당 세대 씩 손바닥을 때렸다.(그땐 체벌이 가능했고, 규격 매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 내내 그 일이 얼마나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설명했고, 다시 이런 일이 있을 땐 두 배로 손바닥을 때릴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서 나아졌냐고? 결과는 대실패였다. 미애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더 교묘해졌다. 미술책에 나온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고 미애라고 수군거리고는, 내가 혼내면 ‘미의 기준이 다른데 못생겼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대꾸했다. 무엇보다 미애가 그런 관심을 즐겼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친구들과 교류하고 싶어 했다. 지금 그 아이들을 만났다면 무턱대고 때리진 않았을 것 같다. 그 일로 배웠다. 체벌은 힘이 없다는 걸. 내가 좀 더 설득력 있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시켰다면, 아니면 학교폭력에 대한 더 나은 제도가 있었다면 좀 달라졌을까.      




  남자아이들이 미애를 괴롭히는 것이 학급차원의 문제였다면 주희는 학교차원의 문제였다. 주희는 소위 1학년 ‘통’이었다. 싸움을 제일 잘하는 것도 아닌 주희가 열 개 반을 통틀어 ‘통’이 된 이유는 영리하기 때문이었다. 입학 후 얼마되지 않아 선배들이 1학년에서 소위 인물들을 뽑아 불러 모았을 때부터 주희는 좀 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돌아가며 뺨을 맞을 때에도 주희는 맞은 적이 없대나. 게다가 주희는 조공도 남달랐다. 번화가에서 만원에 산 가방을 이만 원에 강매해서 차액을 선배들에게 바치곤 했다. 들켜도 ‘판 것’이므로 서로 입만 잘 맞추면 그럭저럭 넘어가지도록 판을 짰다. 그렇게 선배들에게 눈에 띄기 시작해 학년 말이 되자 주희는 범접할 수 없는 날라리가 되었다. 


  선배들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주희는 수업시간엔 안하무인이었다. 바로 앉으라거나 책을 펴라는 말에 늘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참 지독하게도 걸고넘어지긴 했다. 책을 펴지 않거나 엎드려 자는 날엔 벌청소를 시켰으니까. 하루는 너무너무 화가 나 당번 아이들을 다 보내고 주희 혼자 청소를 시킨 적이 있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청소를 끝낸 주희를 불러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주희를 안타까워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입학했을 때 반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좋았고, 내 눈엔 나쁜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는 그런 애가 아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주희라도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들이다. 주희는 역시 지겨워죽겠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며 집에나 보내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어떤 끈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차분히 ‘그래. 이제 그만 가도 좋아.’라고 했다. 주희는 이상한 걸 느꼈는지 교실 의자는 누가 다 내리냐고 물어봤다.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때였다. 갑상선 항진증 때문인지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아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래서 황급히 주희를 교실에서 내보내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학교에 들어와 힘든 적은 많았지만 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묘하게 주희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책을 펴라고 하면 책을 폈고, 어떤 날은 책을 미리 펴기도 했다. 수업도 듣기 시작했고 기말고사에서는 성적이 조금 오르기도 했다.(십 년 후에 주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교실 밖에서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걸 십 년씩 말을 안 하다니 정말 여시토깽이같은 기집애다.)


  그리고 종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주희가 학교폭력으로 신고를 당한 것이다. 일 년간의 악행이 모두 낱낱이 밝혀졌다. 담임자격으로 학교폭력위원회에 입회했을 때 알게 된 일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지속적 갈취에 폭행까지 빈번했다.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닌 다수였고, 모두 다른 반 아이들이었다. 담임으로서 주희에 대한 의견을 내라고 했을 때 처음 겪는 일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같이 머리를 숙였다. 나쁜 아이가 아니니 나쁜 행동을 반성하고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옆에서 돕겠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주제넘은 말들이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주희는 그 뒤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진 선배들과 교류를 끊었고, 밝아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종업식을 하는 날, 주희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주셨다. 6개들이 몽쉘통통 한 박스였다. 수업시간에 가끔 잡담을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과자가 몽쉘통통이라는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정식 명칭은 ‘몽쉘’이지만 왠지 ‘몽쉘통통’이 더 입에 붙는 관계로-) 그런데 주희가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나 보다. 주희 어머니는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는데 몽쉘통통을 보고 내 생각이 나서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너무 고마웠다고 하시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시는 주희 어머니 앞에서 나도 몽쉘통통을 들고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고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몽쉘통통 덕에 나는 그해에 교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다.(그 뒤에 겪을 일들을 미리 알았다면 그만두는 게 맞았을 것 같기도 하다.)               

  



  21세기에 교사가 된 건 참 외로운 일이었다. 선배 교사에겐 조련당하거나 쓰이기 바빴고 학부모들에겐 분풀이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뉴스에 교사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악플이 대부분이었고(주로 학창 시절에 선생님에게 부당하게 당했던 일을 토로한다.) 실제로 그 분노를 만만한 담임교사에게 풀기도 했다.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그 보상을 교사에게 원하기도 한다. 그 보상이 사랑과 관심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학대를 받은 아이들은 친구들이나 교사에게 부모로부터 당한 폭력을 보복할 때도 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점심도 못 먹으며 하루 여덟 시간을 채워 일한 대가로 실수령액 180만 원 남짓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월 300만 원을 웃도는 월급을 받는 은행원이나 대학병원 간호사인 친구에게 ‘철밥통이라 좋겠다.’라는 부러움을 사야 했다. 아직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기에 학교일이 힘들다는 배부른 소리를 할 수도 없었고, 내가 쉬면 담임이 교체되기에 아파도 마음 편히 휴가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교사로 사는 건 참 외롭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갓 교사가 된 후배 선생님들도 감당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감당하지 못해 일을 포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외롭게 자책하며 자기 자신을 포기한 가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첫 해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은 올해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지금 저경력 선생님들이 그 언저리쯤 되거나 조금 더 어릴 것이다. 신규 시절 미숙해서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던 죄책감과, 교직 사회에 순응하느라 부조리를 키워내 어린 선생님들을 사지로 몬 것에 대한 죄책감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마음이 참 좋지 않은 날들이다.




                               

# 모든 이름은 다 가명입니다.

# 지금은 손바닥 때리기, 벌청소, 과자 받기 모두 하면 안 됩니다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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