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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 할 인간 Sep 02. 2023

꿈의 아이들

후시딘과 마데카솔. 그리고 떠나다.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으로 2011년을 보낸 뒤, 2012년에는 방과후학교 업무에서 탈출(?)해 생활지도부 사안계로 자리를 옮겼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생활지도 업무 역시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똥보단 겨가 나았다.

   2학년 담임을 지원하면서 윤하를 한 해 더 데리고 있게 되었다. 반 배정 시 특정 아이를 지목해서 데리고 오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선생님들의 회의를 거쳐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윤하의 지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났고, 이례적으로 우리 반에 우선 배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윤하를 포함한 1998년생 아이들의 중2 담임이 되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해 아이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꿈의 아이들’로 남아 있다.


      


  


   작년에 이어 밴드부를 계속 지도하게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음악에 문외한이었지만 밴드부 활동은 윤하를 학교에 잡아둘 수 있는 좋은 핑계였으므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밴드부 특성상 열명 남짓한 인원으로 운영되다 보니 모든 부원과 친밀했는데 특히 건반을 맡고 있는 현준이는 내 옆에 붙어 미주알고주알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 현준이가 2학년이 되어 우리 반으로 배정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이던 수다는 더 잦아졌다. 하루는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고 시무룩해진 현준이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현준이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더니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한참 후에 현준이 입에서 나온 말은 “공부하고 싶은데 할 데가 없어요.”였다.

   현준이는 삼 형제 중 둘째였다. 형과 동생이 장난기 많고 털털한 성격인데 비해 현준이는 섬세한 편이었다. 얼마나 여린 아이였냐면, 형한테는 두들겨(?) 맞고 동생한테는 놀림당하며 반격도 못하고 혼자 구석에서 우는 아이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기 때문에 현준이는 어떻게든 혼자 이 서열싸움을 이겨냈어야 했는데 현준이한테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형의 심부름을 하고 동생이 놀아달라고 떼쓰는 것을 들어주다 보니 집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정형편 상 학원이나 독서실을 다닐 수도 없고 집 근처에는 늦게까지 운영하는 도서관도 없다고 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위로 몇 마디를 건넨 후 현준이를 집으로 보냈다. 하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현준이의 닭똥 같은 눈물이 떠올라 밤늦게까지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기 전, 하나의 방법을 떠올렸다. 떠올리지 말았어야 할 방법이었다.


   나는 중학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야간자율학습’을 시행하기로 결심했다. 학생이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할 곳이 없으면, 학교가 공부할 곳이 되어주면 되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공부할 곳이 필요한 다른 아이들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참여를 희망했고, 그렇게 점점 일은 커져갔다.

   먼저, 방과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가정통신문을 만들었어야 했다. 학원에 다니느라 아이들이 요일별, 시간별로 들쑥날쑥 참여했기 때문에 개인별 참여시간표를 짜 학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했고, 불시에 불참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부모님께 일일이 연락을 드려야 했다. 아이들의 소재파악은 안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행정적인 업무도 업무였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학교 내의 시선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4시 30분 이후에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있는 것에 부담을 느끼셨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동료 선생님들 역시 나를 곱게 보지는 않았다. “너만 교사냐.”라고 직접적으로 비아냥 거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다른 반 학부모들이 비교하듯 이야기하는 것을 듣거나 또는 그런 비교를 당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선배는 “초과근무 수당 받으려고 그러냐.”라는 이야기도 했는데, 나는 일 년 내내 매일 밤 8시까지 교실에서 아이들의 자습을 감독하면서 한 번도 초과근무를 신청한 적이 없다. 초과근무는 방학 내내 학교에 나와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하는 부장 선생님들이 쓰는 것이지, 저연차 교사가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지도하며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땐 그랬다.

   지금은 절대로 하지 않을 ‘야간자율학습’이지만 만약 다시 2012년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걸 알고서도 나는 또다시 야간자율학습을 운영할 것이다. 힘든 일이었지만 참 행복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교육복지우선지원학교의 특성상 형편이 넉넉하지 않거나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자기주도학습이 잘되는 아이는 정말 소수였고 공부할 곳이 필요했으나 가정에서 방치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밖이 캄캄할 때 교실에 있은 적이 없었던 아이들이라 그런지 그런 분위기를 신기해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학교에서 아이들의 쓱쓱 하는 펜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했다.  

   아이들의 학습 능률도 꽤 좋아서 1학기 중간고사에서 10개 반 중 8등이었던 우리 반은 남은 세 번의 시험에서 모두 1등을 했다. 아마 함께 공부하며 아이들끼리 서로 질문하고 가르치고 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몇몇 아이들은 1등을 하면 나에게 인센티브(?)가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했는데, 그런 건 없었지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 1등 상금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피자를 사주었다. 그랬더니 애들이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애는 애였다.

   2학기 기말고사 성적표가 나간 날, 현준이가 다시 교무실로 내려왔다. 내 눈앞에서 자기 성적표를 흔들며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자랑했다. 그 성적표를 내가 만들어 준 걸 까먹은 건지, 내가 자기 성적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칭찬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와’를 연발하며 칭찬을 쏟아부어주었다. 그랬더니 현준이도 나를 칭찬해 주었다. “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에요.”

   현준이가 돌아간 뒤,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이번엔 내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 해 아이들이 정말 고마웠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교사로서 의도하는 지도방향을 너무나도 잘 따라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통합교육이었다.


  우리 반 혜성이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혜성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고 수영도 잘하는 아이였는데, 수업 시간에 반복적인 소리를 내거나 여자 아이들의 몸을 만지는 행동으로 아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혜성이의 호기심 어린 행동은 사춘기 여자아이들에게는 큰 상처였다. 짝을 없애고 아이들을 일렬로 앉히거나 일 년 내내 혜성이에게 다른 사람 몸을 만지는 것은 안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지만 문제 행동이 하루아침에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혜성이는 3학년으로 진급할 때쯤에는 다른 사람의 신체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학교를 몹시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건 다 아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혜성이의 문제 행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몇몇 아이들은 혜성이가 하루종일 특수반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반 아이들에게 ‘혜성이와 함께 지내는 건 혜성이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걸 연습하려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너희가 사회에서 혜성이와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는 걸 연습하려는 목적이기도 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감사한 일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그때 이후로 한 번도 혜성이를 ‘우리’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수련회에서도 체육대회에서도 혜성이의 참여를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고 어떻게 하면 혜성이와 함께 잘 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단합이 잘 되었고, 수련회에서도 축구대회에서도 체육대회에서도 반 전체가 함께하는 활동에서 우리 반은 항상 1등을 차지했다. 그런 성공 경험들이 모여서인지 아이들이 나중에는 혜성이와 함께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혜성이가 다른 아이들의 신체를 만지려 하면 여자아이들은 겁먹거나 도망가지 않고 혜성이의 눈을 바로 쳐다보며 ‘안돼.’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학기 초에 몇 번 시범을 보였더니 내가 없을 때는 아이들이 스스로 혜성이의 행동을 제어하게 된 것이다. 여자 아이들의 말에도 혜성이가 문제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주변의 남자아이들이 혜성이를 제지하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다. 보호와 공생이었다.


   혜성이는 먹는 것을 잘 조절하지 못했다. 우리 학교는 복도에서 배식을 하고 교실에서 밥을 먹는 교실급식을 하고 있었는데, 혜성이는 정량을 먹고도 복도로 나가 음식을 더 담아 오곤 했다. 그래서 나는 늘 혜성이가 밥을 다 먹고 식판을 반납할 때까지 지켜보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배가 아픈 아이가 있어 데리고 보건실에 가게 되었다. 보건실에 아이를 인계하고 교실로 올라와보니 아이들이 혜성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분주한 아이들 사이로 역한 냄새가 느껴졌다. 여러 차례 음식을 담아와 먹던 혜성이가 앉은자리에서 구토를 한 것이었다. 한창 밥을 먹던 아이들은 혜성이의 구토에 너나 할 것 없이 청소도구를 가져와 혜성이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고, 몇몇 남자아이들이 혜성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 옷을 갈아입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타나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다투어 말했다.

   “샘, 혜성이가 너무 많이 먹어서 토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다 치웠어요! 잘했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잘한 게 아니라 훌륭한데? 그리고 정말 고맙다.”

  그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어떤 부모님도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혜성이 어머니로부터의 민원이 없었다. 혜성이가 두서없이 짤막하게 나열하는 말들에 오해가 있을 수 있었을 텐데도 혜성이 어머니는 언제나 나와 아이들을 믿어 주었다. 그리고 혜성이는 계속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혜성이는 지금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두어 달에 한 번 내게 전화를 한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직장에 다닌다고 한다. 여전히 대화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날씨 이야기를 하며 내가 잘 지내는지 묻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뜬금없이 불쑥 이야기하곤 한다. “선생님,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 참 행복했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라고.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아이가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했던, 평범한 아이가 당한 끔찍한 피해 정황에 온 사회가 공분했는데, 청와대에서는 TF팀을 꾸리고 교육부에서도 ‘117 학교폭력신고센터’를 신설하는 등 사후약방문 같은 대책이 허겁지겁 나왔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체감할 수 있었던 큰 변화는 체육수업이 갑자기 2,3 시수에서 4 시수로 확대되었다는 점이었다. 교육정책관들의 고심 끝에 나온 해결 방안이었다. 아이들의 신체 활동을 늘려 에너지를 소진시켜야 한다나. 그 결과 개학 10일 전에 체육 수업을 확대하라는 공문이 학교로 내려오는 바람에 강사확보가 되지 않았고 학창 시절 내내 체육에서 ‘미’나 ‘우’를 겨우 받았던, 100미터를 23초에 주파(?)하던 최악의 운동신경을 가진 나도 체육교사로서 체육수업에 투입되었어야 했다.(큰 사건이 터져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뭐라도 해야 하니 현장을 초토화시키는 실효성 없는 대책을 부랴부랴 내놓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일관된다.)      

   그리고 그해에는 학교 전체가 학교폭력에 대해 날이 서 있었다. 학교폭력을 묵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경계하는 공문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안계였던 나는 작은 다툼까지도 학교폭력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일이 조금 늘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폭력을 근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진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해 가을, 소위 ‘상진이 사건’이라고 불린, 2학년 전체를 휩쓴 대규모(?)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요는 이랬다.

   상진이는 우리 반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일이 많긴 했지만 성적은 중간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아이는 없었지만 여러 아이들과 두루 잘 지냈고, 밝고 재치 있는 아이였다. 특히 말투가 사근사근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소위 말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앞둔 때였다. 상진이가 갑자기 무단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째 결석이 이어지던 어느 날,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상진이의 할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상진이가 사채를 썼다는 것이었다. 상진이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일을 하시고 어머니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상진이가 어머니인 척 전화를 해 사채를 이용해 돈을 빌렸다고 했다. 돈을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이 학교 앞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상진이가 그게 무서워 학교에 못 온다고 했다. 처음엔 100만 원을 빌렸지만 이자가 너무 커져버렸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 역시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료 선생님들은 ‘뭐 그런 일이 다 있냐.’만 연발하며 놀랄 뿐이었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지만 ‘교사의 역할에서 벗어나니 신경을 끄라.’는 조언을 들었다. 머리로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상진이의 상황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 막막함을 모른 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오지랖을 억누르지 못해 인터넷을 뒤져 보니 부모 동의 없이 미성년자에게 대리입금할 경우는 이자 변제의 의무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난생처음 학교 앞 골목에서 사채업자를 대면하게 되었다. ‘한 번만 봐달라’는 사정과 ‘이거 불법 아니냐’라는 협박을 고루 섞어가며 굽신거리는 젊은 여자를 어이없어하며 웃던 사채업자는 십 분여의 긴(나한텐 너무 길었다) 대화 끝에 이틀 내에 입금할 것을 조건으로 원금만 회수할 것을 합의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상진이는 다시 등교했다.

 

   2학기가 되어 상진이는 엎드려 자는 일이 더욱 많아졌고 결석도 빈번해졌다. 상진이가 결석한 날에는 꼭 집에 전화를 했는데 전화는 늘 어머니가 받았다. 어머니는 ‘상진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지만 그 옆에서 어머니에게 ‘아프다고 말해.’라고 속삭이는 상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진이가 결석을 해서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리니 ‘학교에 가지 않았냐?’고 오히려 되물으셨다. 그리고 그 일은 일파만파 커져 ‘상진이 사건’이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상진이와 긴 면담 끝에 전날 상진이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보험사에 방문해서 약관대출을 받은 것이었다. 보험사 직원들은 사근사근한 상진이가 어머니를 도와주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어쨌든. 상진이는 어머니의 보험을 통해 1,000만 원의 대출을 받았고 그 돈은 하루 만에 500만 원으로 줄어 있었다. 사라진 500만 원으로 상진이는 노트북과 휴대폰을 새로 샀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200만 원 남짓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사고 노래방과 PC방 비용을 결제했다고 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진이가 밥을 사고 노래방, PC방 비용을 제공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소위 ‘노는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상진이가 이 ‘노는 아이들’에게 갈취를 당했다고 인지했다. 그래서 대규모 학교폭력 사건인 '상진이 사건'이 터져버렸다.

   

   다행히(?) 내가 학교폭력 사안 담당이었으므로 사건을 직접 조사할 수 있었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 상진이가 먼저 ‘노는 아이들’이 모여있던 인근 번화가로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결제했으며, 노래방과 PC방에 따라가서 함께 놀며 결제했다고 한다. 상진이와 관련된 모든 아이들을 조사했지만 진술이 일치했다. 식당과 노래방, PC방에 찾아가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분위기를 묻고 강압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그냥 평범한 아이들 같았다고 했다. ‘가해자’로 분류된 아이들 중에는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그저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거짓말을 할 아이들은 아니었다. 다만 상진이는 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고 어울리는 방법이 잘못됐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일이 학교폭력으로 분류되자 난리가 났는데, 그 ‘노는 아이들’이 열 개 반에 모두 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그해부터 학교폭력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간자율학습 덕에 미운털이 박힌 상황에서 우리 반 아이로 인해 각 반에 억울한(?)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몇 명씩 발생하자 나와 상진이를 보는 선생님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는 상진이를 보면서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욕을 하는 선생님도 있었을 정도니까.

   더 문제는 가해자로 분류된 아이들이 상진이에 대해 진짜 ‘학교폭력’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여 있다가 상진이가 지나가면 자리를 피하거나 복도에서 상진이가 보이면 욕을 하기도 했다. 학교폭력이 아니니 사안 처리를 중단하면 안 되겠냐고 아무리 사정해도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모두가 ‘원칙 대로 처리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학교폭력 사건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고, 교육부에서 그에 따른 ‘책임’과 ‘징계’를 강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청에 전화해서 자문을 구해도 돌아오는 답은 마찬가지였다. “알아서 하세요. 다만, 책임은 선생님이 지셔야 합니다.”


   이대로는 상진이에게도, 수많은 가해(?) 아이들에게도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또,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아동상담센터와 연계된 소아정신건강의학과에 데리고 간 것이다. 아동상담센터에서 지원을 받으려면 소아정신건강의학과에서 한 검사가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행동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검사 결과 상진이는 지능이 높고 우울증이 심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에 어떤 큰 일을 겪었고, 그 일 이후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병이 된 아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1학년 때에 도벽이 있어 담임 선생님에게 혼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해결되지 못한 우울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그 우울이 게임 중독에 이어 소비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무언가를 사주는 것 외에 방법을 몰라서 밥을 사고, 게임비를 대주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상진이는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지속적으로 상진이와 면담하고 센터에 데리고 다니면서 조금씩 상진이도 안정을 찾아갔다.

   상진이의 검사 결과지가 참작이 되어 다행히 ‘상진이 사건’은 학교폭력 사건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상진이를 향한 아이들의 적대적인 태도도 누그러졌다. 그리고 상진이는 크게 나아지고 나빠지는 일 없이 그 해를 마쳤다. 그리고 몇 년 후 상진이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사귀게 되어 행복하다고, 그때 속 썩여서 죄송하다고 머쓱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상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알면 됐다. 잘 살아라.”하는 내 말에 상진이가 했던 말이 나는 참 좋다. “샘, 걱정 마세요. 저 잘 살게요.”했던 꾹꾹 누른 짧은 말이.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말없이 나를 지지해 주었던 그해 부모님들이 너무 좋아서 처음으로 교원평가 결과를 열어보았다. 모니터로 평가 내용을 한참 보다가 종이로 출력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작은 원룸에서 펑펑 울었다. 내가 4년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그날 알았다. ‘열심히 가르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길을 잃은 사람은 한 발 앞만 보며 걸어간다. 다행히 그 해에 내 앞에는 98년생 2학년 6반 아이들이 있었고, 그 옆에는 나를 지지해 주는 학부모님들이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칭찬과 인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상상이상의 힘이 있었다. 그 평가지를 몇 번씩 다시 읽으며, 나는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내 후시딘이자 마데카솔이었다.

   우울과 슬픔이 걷히자 내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교사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A학교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한국에서 교사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났다. 중국에 있는 한국국제학교로.      



   그렇게 나는 중국에서 5년 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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