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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 할 인간 Sep 10. 2023

중국 3년

날으는 젓가락과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수업. 그리고 최초의 반격

   떠나고자 마음먹었을 때 중국 모 지역의 한국국제학교에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 통보를 받았다. 겸양의 말이 아니라, 선발 기준이 대입지도 논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우대하는 조건이었으므로 교육경력이 고작 4년이었던 중학교 교사인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2013년 2월. 서른 살이 된 나는, 이민 가방 하나에 사계절 짐을 챙겨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스무 살에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 연고 없는 서울에 올라왔을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두렵고 설렜다.







   내가 일하게 된 한국국제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총 12개 학년의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나는 7학년(중1) 담임을 맡게 되었다. 9학년(중3) 수업과 12학년(고3) 수업에 지원을 나가야 해서 세 개 학년 수업을 준비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7학년 수업만은 나 혼자 온전히 운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국제학교의 임금은 현지에서 지급된다. 나는 국제학교로 ‘파견’ 간 것이 아니라 국제학교에 ‘고용’된 것이므로, 내 급여는 정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내는 수업료에서 지급되었다.(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일부 아이들이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선생님 월급 주잖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한 번도 ‘우리가 내는 학비로 선생님 월급 주잖아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중국에서 들었으면 조금 위축되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수업료가 몇 천 원이 아니라 몇 천만 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7학년(중1)에 배정된 이유는 임금과도 관련 있었다. 국제학교의 급여 책정 기준을 따르다 보니 고연차 선생님들의 경우 임금이 국내에 비해 적어졌고, 나 같은 저연차의 경우 국내에 비해 월급이 조금 많아졌다.(200만 원 조금 넘는 급여에서 20,30만 원 정도 많아졌던 기억이 난다.) 고연차 선생님들은 자녀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수입을 보충해야 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방과 후 수업이었다. 따라서 방과 후 수업이 많이 개설되는 9학년(중3)부터 12학년(고3)까지는 고연차 선생님들이 주로 맡았고 방과 후 수업이 거의 개설되지 않는 7학년(중1)이 가장 막내 연차였던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좋았다. 8교시 수업이 끝나면 오후 네 시였고, 늘 그랬듯이 고강도 업무에 배정되어서 추가로 수업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또, 가족이 많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급여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외성은 종종 비극을 동반한다. 그해가 그랬다.       

   

   국제학교의 방과 후 수강신청은 인터넷으로 이루어졌다. 대학교의 수강신청 시스템과 비슷했다. 선착순 클릭. 한 강좌당 8명의 아이가 등록하면 그 강좌는 마감되고, 5명 이하의 아이가 등록하면 그 강좌는 폐강된다. 국영수는 무조건 한 개 강좌 이상 개설을 해야 한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개 강좌를 열어두었다. 아무도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그러나 웬걸. 저녁 8시에 수강신청이 시작되자마자, 한 강의가 3초 만에 마감되었다. 관심도 없다면서 어떻게 아냐고? 애석하게도 그걸 실시간으로 체크하던 방과 후 업무 담당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3초 컷으로 마감된 그 강의는 내가 개설한 7학년(중1) 토론 수업이었다.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토론 수업을 할 수 없어 ‘개설도 안될 텐데 하고 싶은 수업으로 한 번 열어나 보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째서 인기가 있는 것인가.

   그때였다. 교무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7학년 학부모인데요, 토론 수업 추가 개설 안 되나요?”

   수화기를 들고 고개를 양 옆으로 저으며 슬픈 눈으로 부장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40대 초반의 노련한 부장 선생님은 특유의 상큼하고 발랄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개설해야지, 모.”

   그렇게 두 번째 강좌를 추가 개설했고 그 역시 마감되었다. 저녁 9시가 되자 나는 월, 화, 수, 목, 금 주 5일 방과 후 수업을 마감시킨 인기강사(?)가 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하루종일 피곤했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떤 수업을 해야 할지 구상하느라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7학년, 9학년, 12학년 세 개 학년 수업에 방과 후 수업까지 준비하려면 시간을 잘 쪼개야 했다. 요즘 말로 ‘파워 J’인, 초계획형 인간인 나에게 대충대충은 인생에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게 '수업'이라면 더욱.     

   선잠을 자고 출근해 보니 교무실이 온통 전날 방과 후 수업 마감에 대한 이야기로 왁자지껄 했다. 인원이 충원되지 않은 반은 선생님들이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설득해서 충원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방과 후 수업을 꺼리는 국내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그런 분위기였으므로 수업이 초과(?) 개설된 것에 대한 슬픔을 위로받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눈치가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 10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서미란 선생님이었다. 4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으로, 지방의 한 여고에서 온 국어 선생님이었다.

   “지은 샘, 그거 7학년 방과 후 수업 하나 나한테 넘겨.”

   당황스러웠다. 내 이름과 내 커리큘럼을 보고 수강 신청한 아이들을 다른 선생님에게 넘기는(?) 것이 가능한가. 일단 전화를 끊고 부장 선생님에게 상의했더니 매사 쿨하게 넘어가는 편인 부장 선생님도 ‘그건 안될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미란 선생님에게 찾아가 부장 선생님을 핑계 삼아 어려울 것 같다고 굽신거리며(?) 거절했다. 연신 죄송해하는 나에게 서미란 선생님은 ‘이해가 안되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짜증과 신경질이 흘러넘쳤다. 서로에게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진짜 비극은 서미란 선생님과 내가 동교과인 탓에 자주 얽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한 학년을 오롯이 내가 맡으면서 드디어 동 교과 선생님의 괴롭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학교 급이 다른 동 교과 고연차 선배의 괴롭힘은 더 노골적이었다. 내가 건방지다는 험담은 기본이었고 한 번은 국어과 선생님들이 다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를 향해 젓가락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서미란 선생님이 던진 젓가락은 내 가슴팍에 명중했고, 내 흰 셔츠에는 선생님의 젓가락에 묻어 있던 주꾸미 양념이 선명히 옮겨 묻었다.(내 인생에서 나한테 뭘 집어던진 사람이 총 세 명인데 그중 두 명이 선배교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2018년에 나타날 예정인데, 내 교직인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암튼.)

   내가 뭐 예의 없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수 있겠지만, 전혀. 식사자리에 앉자마자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어려서 뭘 잘 모르나 본데’로 시작해서 시비를 걸더니 ‘무슨 업무 해봤냐’는 말에 ‘고사, 방과 후, 학폭 업무, 학교 신문과 교지 발간 업무 해봤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싸가지 없는 게!’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젓가락을 냅다 던졌다. 할 말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10개월 아기를 키우면서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인간은 말을 못 하면 소리를 지르더라.          








   이렇게 고통 속에 시작된 방과 후 수업은 어땠냐 하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너무나도 행복했다.      

   국제학교 아이들은 참 순수하고 재능이 많았다. 중국어와 영어를 잘 사용할 줄 알았고 학교 행사도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무엇보다 아직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 아이들을 마음껏 가르쳐보기로.

   나는 국어 수업의 백미는 ‘듣기‧말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문법도, 문학도, 작문도 아닌 ‘듣기‧말하기’.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읽기와 쓰기는 내 속도에 맞춰서 할 수 있다. 하지만 듣기와 말하기는 타인의 속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듣기와 말하기에서 스스로 유능감을 느끼면 논리력뿐 아니라 자신감, 사회성이 모두 향상된다. 하지만 국내에서 국어수업은 주로 읽기, 쓰기, 문학, 문법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한 학년을 두 선생님이 동시에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수업 부담이 큰 토론수업을 제안할 수 없었고, 실제로 정기고사를 준비하다 보면 30명 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수업을 진행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과 후 수업은 90분을 오롯이 쓸 수 있었고 정원이 8명으로 토론 수업을 하기에 딱 좋은 인원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방과 후 수업 첫날,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대 가득한 아이들을 마주하고는 마냥 신이 났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걱정 어린 눈으로 내 눈을 피하던 준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준서는 말을 더듬는 아이였다. 선천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9살 때 처음 중국에 온 아이였는데 처음엔 영미권 국제학교에 다니다가 최근에 한국국제학교에 등록한 아이였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준서는 외국 아이들 사이에서 적응이 좀 힘들었다고 한다. 화통하고 외향적인 성격의 준서 어머니는 그런 준서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한국국제학교로 전학시켰고, 마침 토론 수업이 개설되자 준서를 등록시켰다. 준서의 동의 없이.

   느닷없이 토론수업에 등록되어진(?) 준서가 걱정되긴 했지만 공평하게 돌아가는 발언 기회를 준서에게만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발언 차례가 오자 준서는 불안정한 시선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메모한 종이를 쥔 준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이들은 준서의 말을 들으려 끝까지 집중했지만 준서가 준비한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준서의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점점 작아지다 종국에는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준서는 말을 잇지도, 그렇다고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숙인 목덜미가 벌게져 있었다.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오. 정말 신선한 논거잖아.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과장된 어조로 준서가 했던 말에 그럴듯하게 살을 붙여 칭찬하기 시작했다. 논거로 보기엔 부족한 짧은 생각들이었지만 그래도 첫 번째 토론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순진해서였는지 나를 믿고 따르는 마음이 커서였는지 내 칭찬의 말에 다들 준서를 부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준서도 마치 자기가 원래 했던 생각인 양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준서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1년 동안 분기별로 네 번의 방과 후 수강신청을 받았는데, 준서는 한 번도 빠짐없이 늘 1등으로 내 토론 수업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 해가 끝날 때쯤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틀린 내용조차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 더 이상 더듬지 않았다.

   내가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준서는 원래 다른 사람 앞에서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소극적으로 보였던 이유는 완벽하지 않으면 말하지 못하는, 비난과 지적에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꼭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었을 뿐이다.        

   8교시가 끝나면 4시. 방과 후 수업은 종례와 청소를 마친 후 4시 30분부터 6시까지였다. 한창 배고플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모두 함께 간식을 먹었다. 3위안 하는 전병이나 7위안짜리 밀크티, 10위안 정도의 마라탕은 여덟 명의 아이들과 다 함께 먹어도 당시 환율로 1만 원 정도면 충분했다. 노을이 드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간식을 먹으며 논제를 정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했던 그 시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한 손으로 로우지아모(肉夹馍, 중국식 버거)를 들고 먹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논거를 정리해 내려가던 준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수업이었다.







   한국국제학교에 지원할 때 내 지원서의 절반은 백지였다. 생활지도, 업무, 수업만으로도 버거워 외부대회에 참가하거나 실적을 쌓는 활동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다. 거기에다 저경력 중학교 근무자. 국제학교에 합격하기에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합격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7학년을 맡길 중학교 선생님이 의외로 적게 지원했다는 점둘째, 대외업무를 할 교사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대외업무를 맡았던 선생님이 키가 큰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아마 비슷한 이미지를 찾았던 것 같다. 대외업무라는 것은 학교홍보책자를 만드는 것, 홈페이지 관리 같은 것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관 등에서 외부 손님이 왔을 경우 교문 앞에 꽃다발을 들고나가거나 꽃목걸이(?) 같은 것을 걸어주고 학교를 안내해 주는 일이었다. 수업 중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차려입고 학교에 갈 일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교 매점에서 파는 티셔츠나 후드점퍼를 많이 입기 때문에 자주 정장을 했던 내가 오히려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전방위적 성희롱이었다.

   밖에서 밥을 한 번 먹자는 유부남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아이들 앞에서 험담을 당하기도 했고, 7학년인 자녀의 일로 상담을 요청해서 만났더니 나에게 ‘매력이 넘친다’는 둥 희롱한 선생님도 있었고, 자신과 사귀자는 총각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너는 나를 놓치면 40살 넘는 이혼남을 만나야 할 거야.’라는 악담을 듣기도 했다. 그때 내 나이 고작 서른둘이었다. 그런데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희롱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가관이다 참.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한 선생님이 불평을 토하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영어 담당 김한길 선생님이었다. 교무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생님인 데다 말을 섞는 즉시 하소연을 듣거나 일을 떠맡게 되므로 다들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한길 선생님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투덜댔는데, 요는 ‘나는 나이가 많아 타이핑이 느린데 긴 영어지문을 언제 다 쓰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생략된 말은 ‘누가 좀 대신해 줘라. 좀.’이었다. 하루종일 투덜대는 통에 다들 짜증이 날대로 난 데다, 나는 타이핑이 빠른 편이기도 해서 결국 ‘제가 도와드릴게요.’라는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김한길 선생님은 눈과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리고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지문 네 개를 타이핑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김한길 선생님은 굳이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세네 번 거절했을까. 하루는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김한길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이니 학교 앞에서 감자탕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자고 끈질기게 졸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 뻘이라 방심했던 내 불찰이다.

   감자탕을 주문했을 때까진 괜찮았다. 김한길 선생님이 대뜸 소주를 추가하더니 한 잔 털어 넣고는 감자탕도 나오기 전에 돌진(?)했다. 자기와 사귀자는 것이었다. 다른 유부남 선생님들이 이리저리 돌려서 수작을 부린 것에 비해 신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명백히 거절하기에는 오히려 나았다. 나는 그 말이 끝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이 그렇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시는 저한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오니 눈물이 났다. 성희롱은 몇 번을 당해도 당할 때마다 참 기분이 더러웠다. 그리고 더 최악인 점은 내 행실(?)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규시절의 엄격한 교육(?) 덕에 선배 교사들에게 저자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교사’가 아닌 ‘여성’으로 보일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다음 날 교무실에서 만나면 나를 피하거나 머쓱해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한길 선생님은 나를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어깨로 내 어깨를 치며 지나갔고, 급식을 먹을 때면 내 뒤에 바짝 붙어서거나 했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회의를 할 때면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내 오른쪽에 붙어 앉아 내 왼쪽에 앉은 선생님에게 이야기한다는 핑계로 나를 감싸 안 듯 팔을 두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달 넘게 이어진 괴롭힘에 나도 한계를 느낄 때쯤이었다.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던 날이었다. 김한길 선생님이 갑자기 내 뒷자리로 와서 어깨를 툭툭 치며 ‘황선생,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합시다.’라고 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여기서 말씀하세요.’했다. 그랬더니 김한길 선생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허. 우리 황지은 선생님은 너무 잘나셔서 인사도 잘 안 하고 말이야. 나이 많은 내가 얘기를 하자고 해도 너는 씨부려라-하네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요한 교무실에 내 심장소리만이 쿵쾅거렸다.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대로는 사람들의 오해를 살 것 같아 부장 선생님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경쾌하고 발랄하고 노련한 부장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아이고, 그랬구나.’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한국국제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은 동료이기도 했지만 같은 교민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교민 사회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비슷한 연배의 선생님들은 국내에 비교할 수도 없는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서로의 집에 있는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장 선생님은 나에게 젓가락을 던진 서미란 선생님과도, 나에게 식사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해 나를 험담하고 다닌 유부남 선생님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생각해 보면 부장 선생님도 나한테 가혹했긴 했다. 급성 위염으로 새벽에 중국병원에 입원해 하루 결근한 날이 있었다. 링거를 꽂고 누워 있을 때 부장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걱정의 말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다섯 시에 있는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석하라는 전달이었다.(방과 후 업무에 관련한 보고가 있었는데 원래 부장 선생님들이 참석하는 것이고, 전임자가 있었을 때는 부장 선생님이 참석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링거를 뽑고 비틀거리며 학교로 가서  수시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보고를 마쳐야 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부장 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친 뒤,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생각에 공격력이 오히려 상승했다. 자리로 돌아와 메신저를 켜고 김한길 선생님의 이름을 누른 뒤, 단숨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가 저를 성희롱하는 성범죄자한테 인사까지 해야 합니까? 저도 할 말 없어서 안 하는 거 아닙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말했지만 저는 교장실에서 말할 겁니다. 적당히 하세요.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안 참습니다.’    

 

   교직생활 7년 만의, 최초의 반격이었다. 그 후로 김한길 선생님은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칭찬하고 다니는 기이한(?) 행보를 보이다 종국에는 내가 곁눈으로 힐끔 보기만 해도 눈을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일로 깨달았다. 학교는 거대한 강약약강의 생태계라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3년 간의 한국국제학교 근무 경험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첫 번째는 수업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선배 선생님들과 한 학년의 수업을 공유하며 지적과 묵살만 당하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수업을 원 없이 해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유의미한 성장을 확인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겠다는 마음을 버린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그게 뭐? 당연한 거 아냐?’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존감이 낮고 인정욕구가 큰 나한테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거절과 싫은 소리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필요하면 할 수 있게 되었다.            

  

   계약기간 3년이 만료되고 계약 연장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아이들은 3년에 한 번씩 정들었던 선생님이 한국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적응하지는 못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국 가서 만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사실은 쉽지 않다는 걸 서로 알았기 때문일까.

   한국국제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특례전형으로 한국의 대학에 입학한다. ‘특례’라는 단어에서 오는 위화감과 한국과는 다른 커리큘럼에서 오는 교육 공백, 문화 차이 등으로 인해 대학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본 한국국제학교 아이들은 한국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늘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이었다.

   이제는 20대 초중반이 된 그 아이들이 아무쪼록 한국에서 잘 적응했길, 기대했던 한국 생활이 충분히 행복했길 바란다.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 '날으는'은 '나는'의 잘못된 표기입니다.

# 본문의 배경은 당시, 해당지역학교의 분위기였으며 한국국제학교의 보편적인 특성이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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