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 할 인간 Sep 13. 2023

교사 10년 차, 신고당하다.

그리고 대환장의 타임라인

   2016년 3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A중학교로 복직했다. 나름 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갑자기 늘어난 신규선생님들로 인해 학교 분위기가 약간은 가벼워져서였는지, A중학교 아이들이 여전히 아이다웠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비해 훨씬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내 교직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1년을 마친 후, 2017년. B중학교로 전보했다.

   

   B중학교는 소위 학군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가장 선호도 높은 학교였다. 그런 좋은 학교에 어째서 나처럼 불운한 교사가 갈 수 있었냐면, 특목고와 영재학교 진학률이 높아서 학생과 학부모 선호도는 높았지만 교사 선호도는 몹시 낮아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높은 관심과 비례하는 다수의 민원에다 악명 높은 교장 선생님의 특급 잡도리(?)로 선생님들이 여럿 암에 걸려 생을 마감한 이후로는 전보 대상자들 사이에서 더욱 기피학교가 되었다.(후에 그 교장 선생님은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스스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전보했을 때는 박정선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으로 바뀐 후였다. 2017년 2월. 박정선 교장선생님과 전보 인사 차 면담을 했다. 우아하게 굴곡진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웃는 모습이 인자해 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2017년 5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연초보다 연말에 일이 많은 업무에 배정해 주십사 부탁드려 보았다. 박정선 교장선생님은 미소를 유지한 채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한 번 봅시다.”

   그리고 나는 연초와 연말을 모두 살인적으로 보내야 하는 업무에 배정되었고, 그 학교에서 가장 다루기 힘들다는 2학년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다. 박정선 교장 선생님은 내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우아한 빌런이었다.        

  

   박정선 교장선생님이 외유내강형이었다면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외강내유형이었다. 교문 앞에서 화려한 선글라스를 쓰고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하루를 신나게 시작하는 사람이었지만, 뒤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남을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한 눈썹에 늘 웃는 얼굴, 작은 키에 약간 나온 배까지 여러모로 인상 좋은 아저씨였으나 불만이 있으면 선생님을 세워 놓고 입술을 말아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나름 팔색조(?)였달까.      

  

   그런데 느닷없이 교장, 교감 선생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상세히 하냐고? 바로 이 두 사람이 바로 내 2018년 교단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2017년에 맡은 2학년 아이들은 지도하기 어려운 아이들이었다. 다행히 내가 담임으로 있었던 2학년 5반 아이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옆반이었던 2학년 6반은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의 갈등이 심했었다. 놀라웠던 건 6반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과 소위 기싸움을 하며 그들끼리 친목을 다지고, 앞에 나서는 아이가 있으면 독립군인 양 치켜세워주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교장실로 찾아가 담임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는데 그 결과 다른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젊은 기간제 선생님인 6반 담임 선생님은 그해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선생님이 떠날 때 나한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앞으로 4년이나 여기 더 있어야 할 선생님이 불쌍해요.”     

  

   2018년. 그 아이들은 3학년이 되었고 나 역시 3학년 담임으로 한 해 더 아이들을 맡게 되었다. 그 학년 아이들에게 당한(?) 선생님이 많아서인지 2학년 담임 중, 3학년 담임으로 올라간 건 나뿐이었다.

   내가 맡은 3학년 8반은 12개 반 중 가장 난이도 높은 반이었다. 1학년 때 굵직한 학폭을 저지른 승철이가 있었고, 유독 선생님에게 적대적인 지후가 있었다. 승철이는 공부도 곧잘 하는 명석한 아이였는데, 그러다 보니 친구를 괴롭히는 일에도 노련해 지도가 쉽지 않았다.

   지후의 경우에는 교사인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선생님과의 마찰이 많았다. 학기 초,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해 50대 여자 과학 선생님에게 휴대전화를 압수당하자 교탁 위에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가 프린트해 온 학생인권조례를 흔들며 ‘내가 그년 신고해 버릴 거야’라고 외쳐대던 아이였다.

   설상가상 영국에서 막 들어온 수지가 우리 반으로 배정되었는데, 아이들보다 나이는 한 살 많지만 순수하기는 초등학생과 같은 아이였다. 수지는 다소 유아적인 모습이 있어 아이들에게 이기적으로 비칠 때가 많았다. 수지 어머니가 상담 때 ‘우리 애가 좀 스페셜해요.’라고 말한 것처럼 정말 수지는 곧 우리 반의 VIP가 되었다. 수지의 독특한 말과 행동, 특히 조별 활동 등에서의 비협조적인 모습은 아이들의 빈축을 샀고 승철이와 지후를 비롯한 아이들이 그런 수지를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괴롭히기 좋아하는 승철이와 선생님들에게 적대적인 지후의 조합은 큰 시너지를 발휘했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그 무리에 합류했고, 몇몇 여자아이들까지 동조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에게 말대답을 하거나 비아냥대거나 떠들기 일쑤였고 쉬는 시간에는 수지를 괴롭혔다.

  보통 한 달 정도면 아이들을 파악하고 반 분위기를 정돈할 수 있었는데 그 해에는 한 학기 내내 애를 먹었다. 승철이를 따로 불러 ‘계속 수지를 괴롭히면 학폭에 넘겨질 수 있고 고등학교 진학에 불이익이 갈 거야. 너를 위해서 그만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어야 했고, 논리적으로 따지길 좋아하는 지후에게는 ‘네 분노의 방향이 틀렸어’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몇 시간씩 같이 논쟁해야 했다. 수지에게는 ‘함께’하는 한국식 학교생활에 대해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가르쳤어야 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1학기가 끝날 때쯤 조금씩 내 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2학기는 훨씬 좋은 분위기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학교는 양파였다. 까도 까도 맵기가 그지없었다.              








   9월 초였다. 3월에 지후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마찰이 있었던 과학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 반 수업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태도가 엉망이니 지도를 좀 부탁한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내 수업시간에는 아이들이 너무 잘 따라와 주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 수업 시간이니 선생님이 잘 지도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담임병(?)이 있어 담임은 반에 대해 뭐든 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민 끝에 교탁 위에 아이들 명렬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교과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태도가 나빠서 체크당하면, 그 수만큼 청소를 시키겠다고. 그리고 동의하지 않으면 말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동의했고, 그렇게 일주일 간 선생님들의 제보(?)를 받았다. 효과가 조금 있었는지 수업시간이 조금 조용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산일이 다가왔다. 이때부턴 폭풍과도 같은 전개가 있으므로 타임라인으로 정리한다. 흠흠.      



9월 14일 금요일

   지적받은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여러 번 지적받은 아이들은 여러 번 이름을 적었다. 이름이 적힌 횟수만큼 청소를 하기로 했으며, 가장 먼저 적힌 예원(여)이와 정수(남)가 그날 청소를 하기로 했다. 7교시를 한 날이라 청소를 간단히 시키고 집에 보냈다.  

    


9월 17일 월요일

   조회시간. 한결이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튀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한결이가 격앙된 목소리로 내가 부당하다고 따지기 시작한다. 뭐가 부당하냐고 했더니 남자와 여자를 차별한다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지난주 금요일에 여자아이들만 청소를 간단히 시키고 보냈다는 게 그 이유란다. 나는 지난주 금요일엔 예원이도 청소를 간단히 했지만 ‘남자’인 정수도 똑같이 청소했는데 어디가 남녀차별이냐고 물었다. 한결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냥 내가 평소에 남녀차별을 심하게 했단다.

   한결이의 생떼(?)에 아이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럼 청소하는 벌은 모두 없던 것으로 하자.’라고 했다. 그래야 그 떼가 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져주는’ 모양새에 한결이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날부터 한결이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었다.      

   종례시간. 한결이가 갑자기 ‘왜 저 무시하세요?’라고 했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 하니 표정과 말투가 그렇단다. 집에 가고 싶은 아이들이 한결이한테 그만 좀 하라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한결이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한결이가 작년에 2학년 6반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담임에게 적대적일수록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바로 그 반.     

  


9월 18일 화요일

   조회시간. 다들 조용히 자습하고 있는데 한결이가 교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종이 한 장을 구겨서 교탁에 집어던지고 뒤돌아 갔다. 체험학습신청서였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나를 무시해서 나도 선생님을 무시하려고요.’라고 했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교무실로 불렀다.

   교무실에서 어떤 점이 문제냐고 물어도 계속 남녀를 차별했다고 따졌다. 하지도 않은 남녀차별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어서 아니라고 말하니 인정하지 않는다며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세요.’라며 고함을 지르고 교무실을 나갔다. 교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 걸리면 위험한 아이임을 모두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한결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가 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니 ‘걔가 왜 그럴까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만 반복했다. ‘선생님이 우리 애를 미워하신다던데. 사랑으로 좀 대해주세요.’라는 말로 통화가 끝났다.      



9월 19일 수요일

    조회 시간. 한결이가 부들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제 한결이 어머니와 통화한 후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한결이를 못 본 척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한결이가 교무실로 내려왔다. 내 옆에 간이 의자를 편 후, 팔짱을 낀 채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기역자로 접어 반대쪽 무릎에 올렸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니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라고요.’를 반복했다. 난생처음 겪는 모멸감이었다. 교무실은 역시 조용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한결이를 교실로 보내고 한결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세 번만에 연결되었다. 한결이 어머니는 운동 중이라고 했다. 한결이의 행동을 이야기했더니 한결이 어머니는 ‘사춘기라 그래요. 다 지나가요.’라고 말했다.      



9월 20일 목요일

   여전히 한결이의 폭주가 이어졌다. 이제는 아이들도 지쳐서 승철이나 지후마저도 한결이에게 ‘미친놈아 적당히 해.’라고 말하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결이는 더 분노했다. 억울해 보였다. 자기가 옳은데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아 화가 나 보였다. 그럴수록 내가 더 미웠으리라. 나는 차라리 내가 뭘 잘못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하지 않은 차별을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한결이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했다. 한결이 어머니는 ‘한결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한결이 형도 중학교 때 사춘기가 심했는데 지금 너무 잘 컸어요. 한결이도 그럴 거예요. 선생님이 사랑으로 잘 보살펴줬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삼십 분 동안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그러면 한결이 태도가 나빠도 일단 제가 참겠습니다. 서로 건드리지 않고 졸업까지 잘 버텨볼게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종례시간. 집에 가기 위해 다 함께 인사를 하려는데 한결이가 갑자기 ‘왜 선생님은 잘못하고 인정을 안 해요?’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들이 몹시 짜증이 났다. 야유가 터져 나오자 한결이는 나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본전을 못 찾는다고 생각했는지 더 격렬하게 항의했다. ‘남녀차별 했잖아요!’라고. 급기야는 승철이가 욕을 했다. ‘야. 이 새끼야. 집에 좀 가자.’

   안 되겠다 싶어 한결이를 타일렀다. ‘조금 있으면 고입이야. 나는 너네 고입이 제일 중요해.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우리 서로 조금만 참자. 나도 너 안 건드릴게. 너도 이제 그만해.’ 그리고 부들거리는 한결이를 외면하고 급히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9월 21일 금요일

   쉬는 시간. 한결이가 다시 교무실로 내려왔다. 내 옆자리에 딱 붙어 간이의자를 펴고 팔짱을 낀 채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다리를 최대한 넓게 벌린 채 ‘우리 엄마한테 빨리 전화해요.’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한결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한결이 어머니가 운동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에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다. 학부모들이 참가하는 진학설명회였다. 한결이 어머니도 학교에 왔다. 한결이 어머니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5시에 한결이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상담할 수 있냐고. 하필 그 시간에 다른 학부모와 상담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와서 상담을 하자고 했다.(한결이네는 다음 주 추석연휴를 끼고 체험학습을 내 유럽여행을 갔다.) 한결이 어머니는 알겠다고 했고 나 역시 여행에서 돌아오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게 한결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9월 27일 목요일

   3일간의 추석연휴가 끝나고 출근하니 이길배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내선전화가 왔다. 당장 오라는 짜증 섞인 말에 ‘조회는요?’라고 했더니 교감선생님은 ‘조회 같은 소리 하네.’라고 했다. 그때 알았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한결이가 지난주 금요일. 그러니까 추석연휴 직전에 나를 신고한 것이다. 한결이가 유럽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국민신문고, 교육청 신고란에 절절히 읍소한 내 죄명(?)은 이랬다.      


 1. 남녀를 차별함.

 2. 진학으로 협박함.

 3. 민원인을 무시하여 정서적으로 학대함.

 4. 학급 친구들이 민원인을 따돌리도록 조장함.      

 

   곧 뵙자며 전화를 끊고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민원을 넣은 한결이 어머니에게 배신감마저 들었지만 그런 걸 길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당장 그동안의 기록을 출력해서 1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길배 교감선생님을 찾아갔다.

   먼저 민원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해당 사실이 있었는지 무기명으로 설문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그렇게 되면 민원인이 특정지어지므로 설문은 절대 불가하다고 했다. 그리고 학급 아이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 한결이의 교권침해를 징계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건 보복성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고 했더니 한결이가 돌아오면 한결이와 그 어머니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내가 정리해 간 기록들을 집어던지며 그러면 민원에 대한 답변도 알아서 써서 직접 교육부에 제출하라고 했다. ‘그 모양이니까 신고를 당하지.’라는 짜증과 함께.



9월 28일 금요일     

   밤새 민원에 대한 답변서를 쓰며 어떻게든 결백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답변서를 들고 박정선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박정선 교장 선생님은 예의 그 우아한 모습으로 ‘저런.’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 기록들 봤는데, 학부모가 면담신청을 했는데 거절했더라구. 그건 선생님이 잘못한 거야.”

   박정선 교장 선생님은 한결이의 잘못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많은 기록 중 한결이 어머니의 면담 신청을 다른 날로 조정한 것만 언급했다. 그것도 내가 ‘거절’했다는 말로 귀책을 더하며. 역시. 발발 떨며 나를 다그치는 이길배 교감 선생님에 비해 참 우아한 방식이었다. 영리하고 노련했다.  


   내가 신고당했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학교 전체에 퍼졌다. 교장실에 갔다가 교무실로 돌아가니 다들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우리 교무실에는 목소리가 아주 큰 임꺽정 재질(?)의 중년 남자 선생님이 한 명 있었는데, 본인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상대가 교감 선생님이든 부장 선생님이든 큰 소리로 따지는 사람이었다. 다만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다 싶으면 꼬리를 내리곤 했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임꺽정 선생님이 나에게 한 마디 했다.

   “거. 주변에 도움 받을 선배나 동기 없어요?”

   욕이 치밀어 올랐다.           




10월 1일 월요일

   학교에 출근하려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그날은 유럽여행을 떠났던 한결이가 학교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도저히 한결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길배 교감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출근이 어렵다는 내 말에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그럼 사과는 언제 합니까.’라고 했다.

   이길배 교감선생님과 통화한 후에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시 전화해 일주일만 병가를 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당장 병원에 가서 오전 중에 진단서 떼서 제출하세요. 내년까지 최대한 길게 끊어서.’라고 했다. 나를 퍼낼 생각이었다.

  그때 알았다.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사를 끊어내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그래서 박정선 교장선생님도, 이길배 교감 선생님도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내 귀책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교사가 된 지 10년 만에 학교에 의해 휴직당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더 비극적이다. 갑자기 담임이 교체되자 반 아이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장실에 들러 탄원서를 냈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학부모가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모두가 한결이 어머니를 질책하자, 한결이 어머니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한결이가 자꾸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신고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 한결이가 뭐가 되냐.’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우리 반에는 운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어머니도 있었는데 이 어머니를 필두로 몇몇 어머니가 교장실로 찾아가 담임을 복귀시켜 달라고 항의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정선 교장선생님이 ‘황지은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몸이 너무 안 좋으셔서 쉬시는 겁니다. 선생님을 푹 쉬게 두는 것이 선생님을 위하는 겁니다.’라는 말로 우아하게 어머니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내가 겪은 일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나한테 했던 말과 행동이 소문이 나 선생님들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길배 교감선생님이 메신저로 민원 내용을 사실인 듯 재구성해서 모든 선생님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잘못을 저지르고 무책임하게 도망간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내 개인사를 들먹거리며 인신공격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는데, 나를 잘 아는 선배 선생님 중 한 분은 읽는 것만으로도 분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결이는 딱 한 번,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게 임용시험에 통과하다니 그 시험도 참 수준 알만 하다.’라고.      






   몇 년 후, 박정선 교장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아름다운 정년퇴직을 했고, 이길배 교감 선생님은 해외학교에 파견을 다녀와 교장으로 승진했다. 아이들의 면학분위기를 잡아달라며 나를 닦달했던 과학 선생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교감으로 승진했고, 지금은 교장이 되었다. 내가 휴직한 뒤 한결이는 존재감 없던 아이에서 담임을 교체한 히어로(?)가 되었고, 승철이, 지후와 동등하게 어울리며 각종 일탈을 일삼아 후임 기간제 선생님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사이, 나는 조금씩 죽어갔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디에서 죽어야 억울함이 풀릴지 고민했다. 엄마와 남편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죽음을 삼키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이 밀려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는 불면에 시달리고 있으며 불안장애로 약을 먹고 있다.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를 가장 분노케 하는 사람은 한결이나 한결이 어머니가 아니다. 박정선 교장 선생님과 이길배 교감 선생님이다. 이 두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든 결백을 밝히고 바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벼랑 끝에 매달린 내 손을 지근지근 밟은 두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다. 학교는 내 목을 졸랐으며 그 옆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화를 내며,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는 무덤덤하게.           







   10월부터 시작된 병가는 휴직으로 연장되어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생님이 뭘 한 게 있다고 졸업식에 옵니까. 기간제 선생님이 다 했지.’라는 이길배 교감선생님의 말이 어이없었지만 나 역시도 졸업식에 갈 마음은 없었다. 아니,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업이라면 자신 있었고 나이도 아직 서른다섯이었으므로 웬만한 학원에서 일하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해 3월. 나는 다시 B학교로 돌아갔다. 이대로 교직생활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부끄럽지만,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먹고사는 나에게 이 일은 참을 수 없는 불명예였다. 그만두더라도 그때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내가 좋은 교사임을 증명해야 했던, 필사(必死)의 2019년이 시작된다.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