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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 할 인간 Sep 20. 2023

교사 13년 차, 학부모를 신고하다.

교사만능시대. 그리고 다시 벼랑 끝으로

   

   2020년. 나는 그동안의 개고생(?)과 잦은 유산, ‘그럼에도 간절히 아이를 원하는 서른일곱의 난임여성’이라는 요소들이 반영되어 교직 생활 12년 만에 처음으로 비담임이 되었다. 두 사람 몫의 업무를 맡는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리고 그해 1월,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그해 내내 아이들은 학교에 거의 등교하지 못했다. 업무를 추가로 떠안으면서까지 비담임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니 무슨 저주라도 받은 느낌이었지만, 그런 걸 신세한탄 할 만큼 학교는 한가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어영부영 3,4월을 보내는 동안 교육부에서는 이렇다 할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부랴부랴 TF팀을 꾸려 온라인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했지만 플랫폼조차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높은 비중의 원격 수업을 해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자체적으로 연수를 진행하거나 블로그나 유튜브로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 등을 통해 비교적 단기간에 원격수업에 적응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자판기였다. 버튼을 누르면, 그게 뭐든 누르는 대로 뚝딱 나오는 자판기.

   그럼에도 그해 B중학교의 학부모 민원은 폭발적이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실시간 수업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음에도 수업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B학교에는 아이들 뒤에 앉아 함께 수업을 듣는 어머니가 많았는데, 원격으로 하는 출결확인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데다 시스템이 불안정해 수업진행이 매끄럽지 않으니 수업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날은 교무실 전화에 불이 났다. 확진자의 신상을 묻는 전화였다. 그럴 때면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은 더욱더 선생님들을 채찍질했다. 원격수업의 질을 더 높여야 하며, 아이들의 감염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그리고 교사의 감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야말로 교사만능시대였다.             




 


   2020년의 황금 같은 임신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2021년에 나는 다시 담임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여전히 기승이었지만 학교는 점차 정상화되었다. 교내 밀집도를 낮추기 위해 때로는 1개 학년이, 때로는 2개 학년이 등교했는데 그러다 보니 등교수업과 원격수업이 병행되어야 했다. 그로 인해 선생님들의 수업 부담 및 담임들의 출결처리 부담은 두 배로 가중되었는데, 학교 외부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 적게 나가니까 교사들이 편하겠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택도 없는 소리였다.  

   나는 그해 2학년 10반 담임이었다.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 감염병이 유행되어 제대로 중학교 생활을 해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등교 첫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학교에 오고 싶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참 귀여웠다.

   하지만 2019년의 다짐대로, 더 이상 소진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나름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학생과 학부모와 연락하는 용도의 휴대전화를 따로 마련해 학교에 있는 동안만 연락을 받았고, 상담 내용을 토씨하나 빠짐없이 더욱 꼼꼼하게 기록했으며, 늘 경계하고 긴장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적정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해 나는, 다시 한번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다.      




   


   우리 반 정원은 31명이었다. 하지만 교실에는 늘 30명의 아이만이 자리했다. 진호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학 첫날 진호의 결석을 확인하고 진호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진호가 몸이 조금 아파 당분간 학교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병명을 물었더니 병명은 따로 없다고 했다. 병원 진료 기록이 없으면 질병결석으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미인정결석(무단결석)으로 처리된다는 말에도, 진호 어머니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미인정결석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진호가 언제쯤 학교에 올 수 있냐는 내 질문에 진호 어머니는 예상 밖의 답변을 했다.

“2학기쯤이요. 대신 원격수업은 다 참여할게요.”라고.


   나는 그해야말로 ‘적당히’ 일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또 실패했다. ‘장기 결석 아동 관리 매뉴얼’ 때문이었다. 매뉴얼에 따르면 중학생이 7일 이상 미인정결석할 경우, 담임교사는 두 번 이상 가정을 방문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또 3개월 이상 미인정결석한 정원 외 관리 대상 학생과 매달 통화하고 분기별로 가정을 방문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진호는 바로 그 ‘장기 결석 아동’이었다.


   3월 2일 개학 이후, 진호는 원격 수업에만 참여하고 등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2학년 아이들이 등교하는 날에 진호는 미인정결석으로 처리되었고, 그 미인정결석은 금세 7일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진호가 미인정결석한 지 8일째 되는 날, 나는 진호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 역시, 신고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폭풍과도 같이 전개되므로 타임라인으로 정리한다. 하.         


3월 17일 수요일

   학군지인 B중학교에는 장기결석생이 많지 않아서인지 진호의 일을 보고받고는 유선희 교장선생님과 강재성 교감선생님 모두 적잖이 당황했다.(박정선 교장선생님은 정년퇴직을 했고 이길배 교감선생님은 해외로 파견을 가, 관리자 두 명이 모두 바뀌었다.) 문제는, 당시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가정 내 아동학대가 급증해 이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가 굉장히 높았고, 신고의무자가 아동학대 신고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에 큰 책임을 져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교직원 모두는 그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였다.

   당장 가정방문을 나가야 한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혼자서는 불가하다고 말했다.(다년간의 시련으로 그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위기청소년관리는 상담부의 업무이므로 상담부장 선생님에게 동행을 제안했지만, 정년을 앞둔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은 동행을 거부했다. 그러면 최소한 교감선생님이 함께 갔었어야 했지만 강재성 교감선생님도 거부했다.(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은 이길배 교감선생님과 막역한 사이여서 그랬는지 그 후로도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남자 한 명이 함께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기간제 교사였던 여자 상담 선생님과 함께 가정방문을 했다. 그래도 혼자인 것보단 나았다.

   

   진호의 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진호의 어머니는 몹시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맞았다. 새로 산 듯한 슬리퍼와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머니의 옷차림에서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부엌이나 거실에서 생활의 흔적이 평범하게 드러났다. 문제는 진호였다. 아이가 지나치게 말라 있었다. 어머니의 말로는 2월부터 이유 없이 식사를 거부해 15킬로그램 정도가 한 달 사이에 빠졌다고 했다. 병원에는 다니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응급실에 한 번 갔었으나 정신과 진료를 권유해서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을 조금 주면 회복하는 대로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다.


3월 18일 목요일     

   학교위기관리위원회가 열렸다. 진호의 상황을 보고하니 다들 심각해졌다. 의료적 방임에 해당하는 아동학대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상황에 대해 쉽게 판단한 것에 비해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매뉴얼에는 ‘신고한다’라는 말이 가볍게 명시되어 있었지만 학교에서 학부모를 신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들 곤란한 얼굴로 책상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였다.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이 돋보기를 벗고 의자에 기대어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무심하게 말했다. “거, 담임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방문하세요. 담임이 관리해야지 뭐 어째.”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의 얼굴 위로 이길배 교감선생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3월 24일 수요일     

   진호의 집에 방문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진호는 여전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다시 한번 진호의 집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30대 초반의 여자 보건선생님과 함께였다. 진호 어머니는 잦은 방문에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편안한 마음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다. 

    진호는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팔과 다리 등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했으나 신체적 학대의 정황은 없었으며, 옷도 계절에 맞게 입고 있었고 머리나 손톱도 청결했다. 어머니와 분리하여 진호와 따로 상담을 진행했다. 진호는 또래보다 약간 어린 느낌의 아이였다. 2월에 있었던 어떤 일을 계기로 충격을 받아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과 일치했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진호의 집을 나설 때였다. 진호의 어머니가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2학기때까지만 시간을 달라는 말이었다. 원격수업에는 착실히 참여할 것이며 학교와도 긴밀히 연락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매뉴얼’대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3월 25일 목요일     

   방과 후에 제2차 학교위기관리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회의 전에 미리 교장실에 갔다. 그리고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을 위기관리위원회에서 제외해 달라고 말했다. 사태에 대한 숙고없이,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담임에게 무한한 책임을 묻는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의 방식이 두려웠다.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그렇게 하자고 했다. 처음으로 내 의견을 받아들여준 관리자였다.

   나태선 상담부장 선생님이 회의에서 제외된 후에도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모든 선생님이 아동학대 의견을 냈기 때문이었다. 매뉴얼에 따르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고를 반대했다. 신고를 당하면 아이의 부모는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게 타당한 일이었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아이는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상처 입은 부모와 그 아이, 그리고 그들을 신고한 학교가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몹시 힘든 일일 것이었다. 그러기에 조금만 더 신중하게 고려해주십사 간청했다.

   내 반대의견에 유선희 교장 선생님은 교육지원청 통합지원센터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나를 걱정했는지 학교의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교육청의 도움을 통해 어쩌면 상황을 잘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3월 29일 월요일     

   모든 일과가 끝난 오후 3시 30분. 교육지원청 통합지원센터에서 장학사, 위센터장, 변호사로 구성된 방문지원팀이 도착했다. 기대에 대한 결과는 처참했다. 그들은 방문‘지원’ 팀이 아니었다. 방문‘경고’ 팀이었다. 상황을 듣자마자 10분도 되지 않아 ‘교육방임, 의료방임’으로 아동학대 의견을 낸 후, 신고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을 덧붙였다. 상황을 제대로 보고 온 건 담임인 ‘나’였기 때문에 내 보고만으로 이 모든 상황이 이루어진 것 같아 큰 부담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교육청 위센터에서 한 번만 더 가정방문을 해 줄 수는 없냐고 부탁했다. 내가 상담전문가나 의료전문가, 법률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한 번 방문해서 아이를 살펴봐주십사 간청했다. 위험에 처한 아이는 당연히 구해야 하지만, 아이의 보호자인 부모를 이렇게 쉽게 신고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학사는 손목시계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유선희 교장선생님에게 ‘아무튼 알아서 하십시오. 모든 책임은 학교에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학교를 떠났다.

   방문지원팀이 돌아간 후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보건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만이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합리적인 사람이었지만 겁도 많았다.(애초에 겁이 없으면 관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장학사는 아동학대를 최초로 인지한 날짜가 3월 17일이므로 이미 열흘 이상의 기간 동안 학교에서 신고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이라도 가서 신고하지 않으면 학교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유선희 교장선생님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고, 그날 퇴근 후 나는 경찰서에 가야만 했다.


    나는 경찰서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담임이 아니었다면 직접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담임이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내가 직접 신고를 하게 되면 아이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 너무 큰 고통이 된다. 담임뿐만 아니라 그 담임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학부모, 아이 모두에게. 내가 부탁을 넘어서 호소하자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그러면 교감선생님이 신고하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담임이므로 참고인으로 동석하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내 진술만으로 아동학대가 성립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 나는 인근 경찰서에서 신고자로서 내 주민등록번호 열세 자리를 부르고 있었다. 막상 경찰서에 도착하니 강재성 교감선생님은 말주변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 내가 진술을 도맡아 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신고인이 자연히 내가 되어버렸다. 발언이 없는 사람을 신고인으로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회의 때마다 몇 번이고 말했던 가정방문 내용을, 녹음기처럼 다시 재생해야 했다. 모든 진술을 마치고 경찰서를 나오자 캄캄했다. 늦은 밤이었다. 진이 빠져 경찰서 주차장에서 한참을 혼자 앉아 있었다. 긴 하루였다.            


4월 13일 화요일     

   진호어머니로부터 학교에 전화가 왔다. 정확히 말하면 강재성 교감선생님에게로. 진호 어머니는 격앙된 목소리로 담임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보름 전 신고당한 일로 여러 차례 경찰서에 다녀왔고, 결국 아동학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진호어머니는 무혐의 처분이 나자마자 교감선생님에게 전화해 담임교체를 요구했다. 알고 보니 경찰서에서 신고내용을 모두 진호어머니에게 전달했는데 거기에는 내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인적사항, 그리고 내가 진술한 내용이 토씨하나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던 것이다. 

   2학기까지만 시간을 좀 달라고 부탁했음에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찰에 자신을 신고한 담임이 괘씸했을 것이다. 게다가 뉘앙스가 빠진 서면상의 진술은 더욱 뻔뻔하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진호 어머니는 ‘담임이 학교 사람들 모두에게 진호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망신당한 것에 대한 불쾌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물론 나는 ‘떠벌리고’ 다닌 적이 없으며 필수인원만 참여한 위기관리위원회에서만 가정방문에 대한 보고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는(?) 강재성 교감선생님은 진호어머니에게 쩔쩔매며 ‘담임 선생님이 다 아이가 안전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진호 어머니의 이성의 끈을 싹둑 잘라버렸다.     


4월 15일 목요일

   진호어머니는 연달아 학교로 전화해 담임교체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원하는 바였다. 진호는 원격 수업에는 꼬박꼬박 참여했는데 진호의 뒤에는 항상 진호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회, 종례 모두 원격 수업으로 진행한 탓에 국어 수업까지 있는 날이면 하루에 세 번이나 진호어머니와 마주해야만 했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과 그런 식으로 마주하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 앞에서는 밝은 모습이어야 했으므로 정신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선희 교장선생님과 강재성 교감선생님은 담임교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당시 2학년 담임은 기간제 선생님이나 저경력 선생님이 많았다. 그래서 진호와 진호 어머니를 대응하기에 위험부담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13년 차 교사인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껴안고 가길 바랐다. 내가 느끼는 모멸감과 공포는 그들의 계산에는 없는 것이었다.      


4월 16일 금요일     

   진호어머니는 강재성 교감선생님에게 전화해 언성을 높였다. 내가 경찰에 진술한 특정단어가 거슬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날 역시 몹시 강하게 담임교체를 요구했으나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다시 경찰서에 가서 해당 진술 부분을 삭제하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방과 후, 나는 다시 경찰서에 방문해 해당 진술내용을 삭제하고 와야 했다.                

   다시 방문한 경찰서에서 ‘원래 부모의 아동학대는 대부분 무혐의 처분이 난다.’라는 말을 들었다. 보호기관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신상과 신고 내용이 왜 공개되었냐는 질문에는 ‘아 그랬어요? 힘드시겠네요.’라는 구태의연한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결국 아동학대 신고로 남은 것은 진호 어머니의 분노와, 그 분노를 받아내는 나의 고통뿐이었다. 그리고 상처받은 어머니의 불안정한 심리가 진호에게는 오히려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극적이었던 건, 가장 큰 피해자였던 진호 어머니와 내가 이 아동학대신고를 원하지 않았던 단 두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진호 어머니는 내가 신고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몰랐지만.(수차례 말했으나 믿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여러 차례 진호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야 했다. 진호가 여전히 등교하지 않아 정기적으로 근태신고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진호 어머니는 폭언을 늘어놓았는데 주로 ‘내가 죽으면 다 너 때문이야.’, ‘우리 가족은 너 때문에 다 죽는 거야.’라는 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달라고 했지만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이미 한차례 신고당한 진호 어머니를 더 자극하면 앞으로 내가 더 힘들 수 있다며 만류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심리적 소진교원을 위한 교육청 상담프로그램에 몇 차례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박정선 교장선생님과는 조금 달라서 그런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미안해했다. 그리고 내가 심리적 소진교원으로 상담받을 수 있도록 의견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상세하고 정확했다. 이후에 나는 교육청과 연계한 심리상담센터에서 10회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열 번의 상담보다 더 위로가 되었던 건 유선희 교장선생님의 사과와, 정성 들여 써준 의견서 한 장이었다.

   고작 그 정도에 위로를 받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1세기 학교에선 관리자가 교사를 사람으로 대해주면 그것조차 감사한 일이 되어버렸다.


   2학기가 되자 진호어머니의 약속대로 진호가 학교에 등교했다. 진호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습이었다. 진호에게 물어보니 매일 삼겹살을 먹었다고 했다. 진호어머니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느껴졌다. 아동학대 신고가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도.

   2학년 10반 아이들은 처음 보는 진호에게 다정했다. 어디가 아팠냐며 묻기도 하고,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참 다행이었다. 진호도 학교에 나와서 즐겁다고 했다. 약간 어눌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건강상의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2학기가 되어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아 밀집도 유지를 위해 아이들은 2주 등교, 1주 원격 수업을 이어갔다. 유선희 교장선생님은 원격 수업 시 동료장학을 실시했다. 아이들과의 화상 수업에 시간을 정해 교장선생님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반의 국어 수업이 끝난 뒤, 유선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쪽지가 도착했다. ‘진호를 밝게 대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는 선생님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한 거였다. 그해 우리 반 아이들은 참 예뻤고, 진호에겐 아무 잘못이 없었으니까.      

                    



 


   그해 나는 자궁의 혹을 제거하고, 여러 차례 난임시술을 받으며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는 나와 남편에게 임신이 불가능할만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원인불명의 난임이 길어지자 불안했다. 결혼한 지 5년째였고, 서른여덟이었다.

   학교에서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다음 해 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휴직을 시작한 2022년 3월, 휴직하자마자 처음 시도한 난임시술에서 아이가 찾아왔다. 임신을 하면 곧바로 복직할 수 있는 휴직이었지만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아이를 잃는 경험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11월. 나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학교를 떠난 삶은 행복했다. 신생아 아이를 혼자 돌보는 일이 크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회복되었고, 아이와 함께 안정된 삶을 살아갔다.





올해 7월이 오기 전까지는.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 아동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다만,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는 신중해야 하며 아동의 안전 및 건강한 성장을 최우선 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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