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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 할 인간 Sep 16. 2023

살아남은 사람들

청개구리 불효자.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도넛

   

   2019년 3월 4일 월요일 아침. 평소보다 약을 두 배로 챙겨 먹었음에도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대망(?)의 복직일이었다.


   조금 일찍 출근해 자리를 정리하고 있으니 박정선 교장 선생님이 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내가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늘 그랬듯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래, 잘 쉬었어?’라고. 나는 순간, 내가 무슨 포상휴가라도 다녀온 줄 알았다.

   불과 몇 달 전 학부모로부터 신고를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일 년 내내 수많은 학부모와 대면해야 하는 ‘학부모회 업무’였다. 그리고 작년과 동일한 교실을 쓰는 3학년 담임에 배정되었다. 나를 쳐다보는 이길배 교감선생님의 짜증 가득한 경멸의 눈빛에서 내가 형편없는 교사임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학교였음에도 눈앞에 쏟아지는 업무를 허겁지겁 처리하다 보니 금방 일에 속도가 붙었다.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녹초가 되어 퇴근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그대로 누웠다. 거실 창가의 커튼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붉었다가 아예 사라졌다. 캄캄한 거실에서 혼자 고요히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학교에서 별일 없었니?”

   초, 중, 고 12년 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학교는 몹시 위험한 곳이었다. 사위를 제외한 자식 셋. 그러니까 딸, 아들, 며느리가 모두 교사이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은 힘든 이야기를 시시콜콜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안방에서 매체를 통해 경험하는 학교는 교사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정작 엄마는 학교가 언젠가 당신의 아이를 빼앗아가진 않을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모일 때면 항상 당부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라. 혼내지도 말고. 남의 자식이다.’라고. 옛말이 틀린 게 없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 그렇지만 나는 늘 청개구리 불효자였다.      






   내가 맡은 3학년 6반은 작년 아이들과 다른 의미로 참 어려운 반이었다. 3학년 6반에는 유독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소설 「데미안」에서 피스토리우스는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나와 많이 닮아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희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아이였다. 넉넉한 형편에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귀여웠다. 그런 희수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숏커트를 하고 털털한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다년간의 경험상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면, 높은 확률로 마음이 아픈 탓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희수의 사춘기는 3학년이 되자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조회가 끝나자마자 희수가 교무실로 나를 따라내려 왔다. 무슨 일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묻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희수 역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를 때렸어요.’라고.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가라는 평범한 잔소리에서 시작된 희수와 희수 어머니의 갈등은, 희수 어머니의 ‘그럴 거면 집에서 나가.’라는 말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 말이 끝나자 희수가 어머니를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기 시작했고 희수 어머니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양팔을 잡는 순간 희수의 손이 있는 힘껏 어머니의 뺨을 내리쳤던 것이다. 희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담하게, 가끔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기도 하며 이어갔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희수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만지작 거렸는데 오른손 손가락들 아래로 시간차를 달리하는 여러 줄의 칼자국 흉터가 보였다 가려졌다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희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수가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엄마한테 미안하겠다.”

   희수의 무릎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조회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나를 찾아와 고해성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희수는 그런 아이였다.     


   그 뒤로 한동안 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은 대부분 희수와 함께였다. 많은 시간을 들여 알게 된 희수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아이였다. 늘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행동하는 희수는 그렇지 않은 오빠에 비해 키우기 수월한 착한 아이였을 것이다. 오빠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사춘기 고등학생인 오빠와 엄마의 갈등이 점점 심해졌는데 그 사이에서 희수는 엄마의 행복을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둘 사이를 중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희수는 점점 우울해졌고, 자신을 사랑해주기는 커녕 방치하기까지 한 엄마가 미웠다고 했다. 희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오빠밖에 몰라요. 오빠는 자기밖에 모르고요. 다 지겨워요.’라고.  

   얼마 후 희수 어머니와 상담을 진행했다. 희수 어머니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별 것 아닌 일로 희수가 폭발적으로 화를 내거나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방문을 닫고 몇 시간씩 우는 모습은 당황스러울만했다. 얼마 전 희수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 그 자리에서 희수와 똑 닮은 모습으로 희수 어머니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희수와 희수 어머니는 서로를 향해 계속 ‘사랑’을 송출하고 있었다. 주파수가 달라 ‘수신’이 안 됐을 뿐.      

   희수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하고 상담을 종료했다. 어머니가 돌아간 뒤, 희수가 교무실로 내려왔다. 괜히 다른 이야기를 빙빙 돌려했지만 엄마가 무슨 말을 하고 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어머니가 너 엄청 사랑하시던데? 그리고 너한테 의지하시더라. 너 없이는 못 사신대.’라는 내 말에 희수는 다 거짓말이라며 입을 삐죽거렸다.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는지 내 책상 모서리를 만지작 거리며 서 있는 희수를 향해 말했다.

   “너 그동안 참 많이 노력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몰라줘서 속상했겠다.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건 정말 큰 장점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나는 그냥 희수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그 뒤로도 희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숏커트를 유지했고 털털하게 걷고 말했으며 자주 교무실의 내 자리 옆에 붙어 앉아 내가 일하는 걸 구경하고는 했다. 다만 희수의 가는 손목을 가로지르는 여러 줄의 흉터 위로 새로운 상처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우리 반에는 손목에 희수보다 더 깊고, 더 많은 흉터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연이었다. 2학년 때부터 무단결석을 하기 시작한 나연이는 3학년이 되자 한 달에 절반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나오는 날은 대부분 조퇴를 했는데,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우울증 약 때문인지 늘 취한 듯 몽롱해 대화조차 잘 되지 않았다. 키도 크고 체형도 통통한 나연이가 물 먹은 솜처럼 교무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선생님들은 그 모습을 보며 보기만 해도 기가 빨린다며 한숨을 쉬곤 했다.  

    나연이가 교무실에 와서 나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자퇴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연이는 자퇴를 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엄밀히 말하면 중학교에는 자퇴제도가 없다. 다만, 유예한 후 검정고시를 보는 방법이 있다.) 중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나연이는 ‘이래도 학교에 보낼 거냐’라며 협박하듯 손목을 그었다.



   나연이는 일주일은 잠을 못 잔 것처럼 기절할 듯 말 듯하다가도,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어 복지관에 갔던 이야기나 상담센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참씩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삼십 분이나 길게는 한 시간씩 나연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보통 여자아이들의 경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회복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연이는 달랐다. 자기 할 말이 끝나면 바로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조퇴할래요.’라고 했다. 참 야속한 기지배였다.    

   2학기 중간고사 첫날이었다. 1교시 수학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은 긴장 가득한 모습이었다.(시험 첫날 1교시를 ‘수학’으로 정하는 건 정말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조용한 가운데 한 명씩 교탁 앞으로 나와 수거 가방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넣었다. 엎드려 있던 나연이도 자기 차례가 되자 천천히 일어나 교탁으로 걸어왔다. 비틀거리며 걷던 나연이는 한참만에 교탁에 도착해 천천히 팔을 들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나연이를 겨우 복도로 옮겼다. 곧 시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안정시킨 후, 복도에 길게 누운 나연이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보건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나연이의 호흡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119에 일단 신고한 후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고 학교로 온 나연이 어머니는 전후 사정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쉬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연이 어머니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연이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떠났다.

  

   며칠 후 나연이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연이를 아무래도 자퇴시켜야 할 것 같으니 절차를 알려달라고 했다. 일단 학교에 한 번 나와주십사 부탁했다.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자퇴 절차가 없을뿐더러 이제는 내가 나연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 년 내내 교무실에 데리고 앉아 공들인(?) 아이여서 그랬는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아까워서 그랬는지, 구급차를 타고 떠나는 나연이 어머니의 뒷모습이 내내 마음이 걸려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조금만 더 노력해보고 싶었다.

   내 앞에 나란히 앉은 나연이와 나연이 어머니 앞에 학업중단숙려제 신청서를 내밀었다. 정기적인 상담 및 관리를 받으면 최대 7주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고도 출석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9월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학업중단숙려제를 7주 사용할 경우 12월 한 달만 버티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번거로운 절차에도 나연이 어머니는 흔쾌히 학업중단숙려제를 신청하겠다고 했다. 당장 학교를 그만둔다는 기대에 찼던 나연이는 실망한 듯했지만, 일단 7주 간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연이는 11월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오랜만에 만난 나연이는 더욱 힘든 모습이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나연이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더 무기력해졌고 체중도 많이 늘어 있었다. 엄마와의 갈등도 심해져 나연이가 학교에 등교하는 날엔 가족들 모두가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다행히 반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나연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색해했던 나연이도 금방 아이들 사이에서 적응했다. 배려심 많은 희수가 늘 나연이 옆에 있어주어서 참 고마웠다.

   다시 학교에 나온 나연이는 늘 그랬듯 4교시가 되기 전에 교무실로 내려와 반쯤 감은 눈으로 조퇴를 시켜달라고 했다. 문제는, 최근에 나연이네가 학교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나연이가 집에 가려면 어머니가 나연이를 데리러 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날은 나연이가 강하게 조퇴를 희망했는데 어머니가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연이를 혼자 보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점심시간에 외출을 상신하고 나연이를 내 차에 태웠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있는 시간에 나연이와 함께 서울을 벗어나 크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니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학교에서 그렇게 힘들어하던 나연이도 밖에 나오니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평화로운 일탈을 즐겼다. 나연이의 집에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나연이가 갑자기 나한테 물었다.

   “샘은 내가 왜 이러는지 안 궁금해요?”

   늘 자기 이야기만 하던 나연이가 처음 한 질문이었다. 나는 안 궁금했다. 왜냐하면 나연이가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러는지 늘 물어봐요. 그런데 그 질문이 정말 짜증 나요.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서, 그냥 ‘그런 마음도 있나 보다’하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한참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길어지는 침묵에 나연이가 실망하려 할 때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주었다.

   “글쎄. 나는 그냥 네가 살아있어서 기뻐. 오늘도 나랑 있어줘서 고맙다.”  


   얼마 후, 나연이는 무사히 졸업해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중학교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 여고에 진학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보름 만에 자퇴했다. 나연이는 졸업 후에 딱 두 번 나를 찾아왔다. 자퇴한 날과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날이었다. 나연이는 힘들게 진학한 고등학교를 너무 쉽게 자퇴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지만 괜찮았다. 나한텐 그저 나연이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강훈이는 1, 2학년 때 이미 크고 작은 학폭으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아이였다. 선생님들에게도 불손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는데, 그런 명성(?)으로 인해 우리 반 명렬에서 강훈이의 이름을 발견한 선생님들은 갓 복직한 나에게 가혹한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강훈이가 그렇게 어렵지도, 밉지도 않았다.


   강훈이의 학폭은 독특했다. 보통 학폭은 센 아이들 몇 명이 약한 아이들 한둘을 괴롭히는 형태였는데 강훈이는 늘 자기보다 센 아이를, 그것도 혼자 패곤(?) 했다. 이상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중에 그 전말을 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훈이가 2학년 후배 남자아이를 때린 것이다. 그것도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하굣길 횡단보도 앞에서.

   우주는 강훈이의 단짝이었다. 강훈이가 드세고 거칠고 장난기가 심한데 비해, 우주는 여리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우주는 아이들의 타깃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강훈이와 우주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2학년 남자아이 하나가 우주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평소에 우주를 알고 지내던 2학년 남자아이는 우주를 놀리며 깐족거렸고 그걸 보고 있던 강훈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2학년 남자아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학년 남자아이도 강훈이에게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이 일은 쌍방폭행이 성립되어 학폭까지 가지 않고 간단한 화해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강훈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우주는 우리 반이 아니었지만 늘 우리 반에 있었다. 조회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심지어 종례 후에도. 그래서 나는 우주를 ‘명예 6반’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면 우주는 귀여운 반달눈으로 씩 웃었다. 우주가 우리 반에 있으면 날 선 강훈이의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둘은 자주 자신들이 키우는 도마뱀이야기를 했는데,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밀웜을 사기 위해 왕복 3시간의 먼 길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동네에 파는 밀웜은 자기가 원하는 밀웜이 아니라나. 작은 동물을 소중히 키우는 강훈이의 모습은 ‘폭력적인 문제아’라는 소문과는 조금 달랐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강훈이가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마도 같은 미용실에 다녀온 듯한 우주가 서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이 급진적으로 바뀌면 긴장해야 한다. 더군다나 사고뭉치들의 삭발은 ‘비상상황’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책상을 파손하거나 수업시간에 무단 외출을 하거나 2층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등 강훈이의 일탈이 점점 잦아졌다. 이미 지난 2년 간의 업적(?)이 있었으므로 강훈이에 대한 생활안전부의 지도는 엄격했다. 생활안전부에서 혼나는 강훈이를 굽신거리며 데리고 나올 때면, 강훈이는 두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작은 목소리로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그 옆에서 쭈뼛쭈뼛 서 있던 우주도 같이 ‘죄송해요’라고 말하고는 했다.

   수업이 끝나면 우주는 우리 반으로 곧장 왔는데, 교실청소가 다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강훈이와 함께 교실에서 놀다가곤 했다. 나는 가끔 둘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사실은 강훈이와 우주 모두 가정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엄격한 도덕적 기준으로 강한 훈육을 한 강훈이 어머니, 공부에 대한 기대가 커 우주에게 심한 실망감을 표현하곤 했던 우주 어머니는 자녀의 여린면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그제야 강한 사람 앞에서 더 분노하는 강훈이와, 머리가 좋음에도 시험에서 백지를 내는 우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강훈이와 우주는 졸업할 때까지 참 열심히 사고를 쳤다. 사고를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게 치는지. 정말이지 창의적이고 성실한 일탈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아이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는데, 2학년 아이를 때린 사건 외에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그 아이들은 혼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고뭉치 아이들은 졸업을 했고, 강훈이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우주는 특성화 고등학교로 각각 진학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강훈이는 자퇴했고, 우주는 자살했다.

   

   우주가 자살했다는 연락은 강훈이로부터 왔다. 그래도 우주가 좋아했던 선생님이고, 나 역시 우주를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연락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던, 잘 웃던 우주의 얼굴이 떠올라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우주가 가여웠다. 그리고 강훈이가 걱정됐다. 나는 졸업한 아이들에게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지만 강훈이에게는 문자를 보냈다. 꼭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꼭 살아가야 한다.’ 강훈이에게서 한참만에 답장이 왔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강훈이 답지 않은 의젓한 답장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주는 강훈이를 좋아하고 따랐다. 둘 밖에 없었지만 강훈이는 둘 사이에서 대장이었다. 늘 우주를 보살피고 책임졌던 강훈이가 우주를 놓친 것에 대해 죄책감없이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훈이는 매년 스승의 날에 장문의 문자를 보낸다. 문자에는 항상 자기가 중학교 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성의 말과, 그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말이 들어있었다. 작년에 검정고시를 통과한 강훈이는 올해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올해는 도넛 기프티콘을 함께 보냈는데 도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강훈이가 보낸 도넛은 남김없이 다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도넛이었다.  







   2019년이 끝나자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하지만 그 해 만났던 아이들은 내가 외면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던 희수도,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나연이도,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강훈이도 모두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들에게 건넨 말들을 스스로 곱씹으며 아이들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해 아이들을 졸업시키면서, 나는 이제 ‘좋은 선생님’을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교사가 보듬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 교사는 죽는다. 마음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교사는 모욕당하거나 신고당하거나 억울하게 책임지거나 아니면 마음이 소진되어 죽는다. 그래서 이제는 효녀가 되어 엄마가 원하는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2년 후,


나는 학부모를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여전히 전혀 무난하지 않은 삶을 이어 가게 된다.

정말이지 학교는 까도 까도 매운 곳이었다.








# 모든 이름은 가명입니다.

# 학교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강훈이에게도 충분히 지도하였습니다.

# 우주가 고통 없이 평안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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