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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협 Jun 25. 2024

#구병모 작가

단지 소설일 뿐이네

자주 가는 도서관 입구 한 벽에는
신간 소개 게시판이 있다.

평소에는 별 기대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날은 달랐다.

작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단지 소설일 뿐이네>라는
제목에 눈길이 갔다.

작은 글씨 소개 글 중 아랫부분에 매력을 느껴
이 책을 반려로 삼았다.

'구병모의 신작 중편소설은 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일 수도 있으며, 소설 읽기에 관한 소설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읽고 나면 세계는 그대로이되,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다층, 다변의 입체적인 텍스트이다.'

구병모 작가의 글이 깊다.
단지 소설일 뿐이다,라고 하지만
오히려 15년 동안 소설가로 살아온
그녀가 피부로 직접 느낀 소설가로서의 삶과
출판업계 현실에 대한 생각이 담긴 진액 같은 글이다.

역으로 소설을 함부로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그녀의 강한 외침이 느껴졌다.

점점 Homo Skipens가 되어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소설 앞부분을 너무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소설가인듯한 화자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듯 말을 이어가고 있다. 소설, 글쓰기, 작품... 등에 대해. 여기서 뭔가를 얻어 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면서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나를 본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소설에 관한 철학 책을 보는 듯한 중후한 느낌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빼자. 조금 더 가보자. 여기서 뭘 판단하려 하지 말자. 15년 동안 거의 쉼 없이 소설만을 쓴 그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독자에게는 구명조끼 같은 것이다. 그걸 믿고 너울거리는 파도에 편하게 몸을 맡겨 보는 거다.

'이터널 브리지(p21)' - 작가가 묘사하는 이 다리의 그림을 그려본다. 트러스교라는 생소한 단어도 찾아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진다. 이 그림 안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이렇게 소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공간으로 순식간에 빠져들게 하는 신묘함이 있다. 지금 나는 그곳에 빠졌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선잠 자듯이. 솔직히 나는 한번 읽으면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읽는 타입이 못된다. 한때 그런 분들이 부럽기도 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맛있는 과자를 조금씩 아껴서 먹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광속으로 스쳐 지나가기만 하네. 면은 선으로, 선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의 목적지란 수없이 촘촘하게 분포된 기착지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마네.(p35-36)' - 작가가 제목 대신 제사로 쓴 단어 'Homo Skipens'. '겉핥기', '빠르게 지나가기'를 좋아하은 인간. 과정의 디테일은 무시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한다. 성공 가도를 광속으로 달리고 싶어 한다. 켜켜이 쌓아가는 것들이 어리석게 보인다. 부동산, 주식, 가상 자산 등으로 돈 벌었다는 소문이 계속 자극하기 때문이다.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은 하고 있지 않지만 OTT 동영상을 보다가 스킵 하며 뛰어넘기를 자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을 깊이 들여다보기보다는 짧은 요약본이나 쇼츠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소설가 S에게는 더욱 민감하게 느껴진 것 같다. 하물며 소설을 읽겠는가, 이런 반문을 하는 것 같다. 소중한 지금이 누수 되고 있다. 나는 그 누수를 책을 통해 메꾸고 있다. 과정 속의 디테일을, 점을 그리고 기착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이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광속보다 완보가 좋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한 줄로 요약되는 이야기라면 그냥 처음부터 서로의 시간과 가성비를 위해 한 줄을 쓰고 끝내지 뭐 하러 한 권씩이나 쓰고 자빠지겠나. 그건 내 두 발로 구태여 긴 다리를 걸어 건너는 수고를 감수하지 않고 이 뭍에서 저 섬으로, 날아서 바다를 건너뛰자는 격 아닌가. 한편 두 줄 이상 넘어가는 시놉시스라고 해도 언제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네. 세상 모든 소설에 기승전결이 갖춰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나. 선명한 로그 라인이나 시놉시스로 요약되지 않는 글, 이용자에게 신속 정확한 내비게이터가 되어주지 못하는 글, 심지어 목적지가 어딘지가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글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 없단 말인가? (p133)

- 구병모의 <단지 소설일 뿐이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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