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나의 부모이기 이전에 자식이었기에
자칫 내 기일이 될 뻔했던 밤을 넘긴 뒤,
중환자실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의식이 흐릿한 채 잠에 빠져 보내졌다.
잠결에라도 기도에 삽입된 관을 뽑을까 봐
내 양손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위급한 고비를 넘긴 뒤엔
가족, 친척, 친구, 지인들의 면회가 이어졌다.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로 나뉜 30분 면회만 허용되었고
면회 인원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보러 와준 분들 중 대부분은
중환자실 밖에서 대기만 하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입에 물린 관, 그리고 묶여 있는 손.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언가 꼭 말하고 싶을 땐
간호사 선생님께 손을 가리키며 풀어달라 부탁했고,
부모님이 챙겨둔 작은 수첩에
조심조심 글씨를 써서
의료진이나 부모님께 내 마음을 전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이 떠올랐다.
어릴 적 과외를 해주시던 선생님,
기타 치며 노래하던 유쾌한 성당 신부님,
어린 시절 좋아했던 소녀,
반 친구들,
그리고 늘 웃으며 인사해주시던 이웃집 아저씨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었던 건
단연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땐 몰랐다.
이 병원 생활이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
곧 퇴원해
다시 학교로,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간곡히 부탁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제가 아프다는 걸 말하지 말아 주세요.”
부모님께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던 건
그저 ‘걱정하실까 봐’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아픈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분들이 손주 걱정에
밤잠 못 이루고,
밥숟가락조차 들지 못하실까 봐.
그 상상이 더 아팠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큰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으셨다.
나와 동생을 유독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의 품이 생각난다.
참 따뜻했다.
부모님과 함께 시골 할머니 댁에 가던 날이면,
늦은 밤이건 새벽이건
두 분은 늘 거실에서
잠도 들지 않은 채 TV를 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대문은 늘 잠기지 않았고,
우리가 들어서면
할머니는 활짝 웃음을 보이며
내 뺨과 손을 잡아주셨다.
그 손은
주름이 질 대로 진,
차고 거칠고 굳은살이 박힌 손이었다.
그럼에도
세상 그 어떤 손보다
따뜻했다.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를
유독 따르던 나와 동생이
안부 전화도 없고 찾아뵙지도 않자
두 분은 혹시
부모님이 크게 싸워
이혼이라도 한 건 아닌가
속으로 걱정만 하셨다고 한다.
그 걱정에 선뜻
전화 한 통도 하지 못하셨다고.
그리고 먼 훗날,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의 형님이신 큰아버지께서 조부모께 이야기를 하신 뒤,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 병원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하셨다고 한다.
“자식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부모에게 꺼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더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담담하게, 지난 일을 떠올리며.
하지만 이제서야 나는 조금 알겠다.
그날, 그 전화기 너머에서
아버지는 분명 울고 계셨을 것이다.
그땐 몰랐다.
엄마, 아빠도
내게 부모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이었다는 걸.
아픈 자식을 둔 부모는
본인까지 무너지면 안 되기에
내 앞에서는 괜찮은 척
매일을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그저
자신의 부모에게 기대어
실컷 울고 싶었을 텐데…
그 시간을
서로 짊어지고 묵묵히 버텨낸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쩌면,
중환자실을 견디며 살아남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눈물도, 두려움도, 절망도
꾹꾹 눌러 삼키며
그 시간들을 함께 버텨낸
부모님도
같이 살아남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