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떠오르는 얼굴들
부모도 나의 부모이기 이전에 자식이었기에
자칫 내 기일이 될 뻔한 밤을 보낸 뒤 중환자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의식이 불명확한 상태로 잠에 빠져 지냈지만 잠결에라도 기도에 삽입한 관을 뽑아 버릴까 내 양손은 묶여 있었다. 위급한 상태를 넘긴 뒤 가족, 친척, 친구, 지인들의 면회가 이어졌다. 중환자실이라 면회 시간도 면회객의 인원수도 정해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면회가 가능했던 사람들은 기계호흡을 하느라 입을 다물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내 모습에 진심 어린 걱정과 사랑으로 눈물을 흘려주었다. 비록 면회는 못했지만 누가 면회를 왔는지 얼마나 내 걱정을 하던지 등의 모습을 부모님께 전해 들었기에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모두 내가 중환자실에서 잘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어 줬다.
몸이 아파서일까 평소 연락을 하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보고 싶었고 사람이 그리웠다. 그중 몇 분 들은 부모님께 말씀드려 면회객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가장 보고 싶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만날 수 없었다. 나를 참 예뻐해 주던 양가 조부모는 내가 있던 병원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에 계시기도 했고 어린 손자가 아파 중환자실에 있단 소식을 접하면 걱정에 쓰러질까 싶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알리지 말아 달라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내가 처음 병원에 입원하고 6개월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계셨다.
아프기 이전에 매일은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드려 안부를 물었고 부모님은 시간이 나는 대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봬 시골을 다녀오곤 하셨다. 그랬던 우리가 전화도 통 하지 않고 시골에 내려가 얼굴도 비추지 않자 시골에 계신 이 노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싸운 건 아닌가 싶어 당신들이 전화도 못하고 근심걱정을 하고 있었던 걸 이후에야 듣게 되었다.
지금은 양가 조부모 모두 돌아가시고 볼 수 없지만 그때 숨기지 말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내가 아픈 걸 알려 보고 싶은 얼굴 한번 더 보걸, 내가 아프다 해서 그 노인들이 무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걱정하느라 시름시름 앓는 건 아닐까 했지만 그때는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다.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누구보다 힘이 되었을 텐데 나는 엄마아빠도 자식이란 걸 몰랐다. 아픈 자식을 두고 본인이 쓰러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내 앞에서는 울음을 참지만 뒤에서 매일 같이 울었을 나의 부모님도 당신들의 부모에게 기대어 울고 싶었을 텐데 그 시간을 당신들 혼자 버텼을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보고 싶은 얼굴을 보지 못하는 그리움 속에서도 나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과 애정 어린 관심을 받았고 의료진의 정성 어린 케어 덕분에 몸상태가 처음보다 많이 좋아져 의식도 꽤 또렷하게 돌아와 묶여있던 손도 풀릴 수 있었다. 여전히 기계호흡을 하였기에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중환자실 베드에 누운 채 간호사 분들께서 머리도 감겨주고 면회 온 고등학교 친구들과 농담도 주고받았다. 하루종일 누워있어 활동을 하거나 내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전공의가 내게 진료 차트를 따로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게 느껴져 나는 이제 곧 퇴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누워있던 곳이 중환자실인지도 중환자실을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난지도 몰랐지만)
중환자실에 들어온 지 열흘이 되던 날 나는 기도에 삽입한 관을 뽑고 자가로 호흡을 할 수 있었다.
열흘 만에 움직이는 턱관절은 다소 어색했고 병원에서는 첫끼로 미음을 주었는데 나의 생각을 말로 할 수 있는 편리함과 혀로 느끼는 음식의 맛은 어찌나 맛있던지.
중환자실에서의 첫 식사로 나온 미음식 한편에는 밥알 없는 식혜가 종이컵에 담아져 있었는데 나는 중환자실 들어가기 전에 식혜를 마시고 싶다 한 내 이야기에 부모님이 별도로 넣어주신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나온 음료였더라. 그 이후로 6년 동안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종종 미음식도 먹었는데 식혜가 나온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식혜맛은 아니었지만 이날 먹은 식혜의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