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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May 01. 2024

근로자의 날에

얼굴을 마주 보고

  노동절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하지만 공식 명칭은 근로자의 날이다. 나는 한 때 한국노총 여성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는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기 전이었다. 민주노총이 불법단체이긴 했지만 조직은 있었고 여성국도 있었다. 나는 민주노총 여성국 직원과도 교류가 있었고, 거기에서 세미나가 있을 때 초청받기도 했다.


여성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나의 전공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사회복지학, 그중에서도 사회정책을 전공했다. 대학원 석사 논문도 여성노동조건에 관한 것이었고, 그 후에 쓴 논문도 역시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에 관해서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실습을 처음 나갔다. 그곳은 영등포에 있던 도시산업선교회였다. 우리 과가  복지관이나 병원등에 실습을 주로 했는데 왜 도시산업선교회에 배정 됐는지 참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 당시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는 조지송 목사님과 인명진 목사님이 계셨다. 2학년인 나와 3학년 언니가 배정되었는데 1주일에 하루 한 학기 동안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1972년의 일이다. 그 당시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것이 1970년 11월이니 1년이 훨씬 지났을 때인데 나아진 것이 없었다.


내가 만난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5시간까지 노동을 하고 있었고, 작업장은 35-6도가 넘게 덥고 환풍이 안되어 공기가 나빠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월급은 정말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 당시 딸들은 먹을 것만 해결하면 좋겠다는 부모들이 남의 집에 일하는 사람으로 보낸 경우도 많을 때였다. 어린 여성들의 저임금과 희생으로 기업들은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2022년, 한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농성이 있었다.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창에 자신을 가두고 농성을 했다. 동료들은 독 안에서 고공농성을 하였다. 그들은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습니까"라는 팻말을 들고 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절규는 처절하였다. 우리나라가 이제 선진국이 됐다고  하는데 마치 1970년대 노동조건을 보는 듯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조선소에 노동자가 남아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청에 의지하고 있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열악했다.


수필 <얼굴을 마주 보고>는 그 농성 장면을 보고 썼다.  이미 브런치에 올린 글이지만 노동절을 맞아 다시 한번 올린다.






     얼굴을 마주 보고


   A조선소 제1독은 넓고 깊다. 이 드라이독은 갑문을 이용해 물을 빼내고 선박을 조립. 완성한 후 다시 물을 채워 선박을 진수하는 작업장이다. 한 남자가 독 바닥에서 자신을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 구조물 속에 스스로 가둔 채 농성을 하고 있다. 바닥에서 15m쯤 되는 고공에서는 6명의 남자들이 길고 좁다란 선반 위에 서서 그를 응원하며 같이 농성 중이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다. 한 달 넘게 계속된 농성으로 작업이 중단되어 회사가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고 있다는 보도가 며칠째 나오더니 드디어 정부에서 강경한 경고 메시지를 냈다. 수천 명의 경찰이 진압을 위해 대기 중이라고 한다.


  나는 이 뉴스를 계속 챙겨 보며 가슴을 졸였는데, 경찰이 진압을 위해 대기 중이라는 보도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용산역 철거참사 때처럼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독 밖에서는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배수진을 치고 같이 농성 중이다. 경찰이 진압에 들어간다면 인명 피해가 불 보듯 뻔하다


 한 사람이 일자 사다리를 타고 독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다. 노동부장관이다. 그는 그 깊은 바닥에 내려가 농성 노동자와 마주 앉았다. TV화면에 노동자의 모습도 잡혔다.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쓴 팻말을 들고 있다. 빼빼 마른 얼굴, 눈이 퀭하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다. 얼굴이 핼쑥하고 눈이 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바로 눕기에는 너무 좁은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창 속에서 그는 한 달 넘게 불편하게 지내고 있다. 생리적 문제는 기저귀로 해결한다니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만 먹을 것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다며 그는 유서까지 써 놓고 이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 노동부장관과 하청노동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총 출신 장관이라 뭐가 다르긴 다르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왠지 큰 불상사 없이 문제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노동부장관이 된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기 전 한국노총만이 유일한 합법 노동조합 단체였을 때이니 30여 년 전이다. 여성 노동자의 근로 조건에 대한 논문을 쓴 덕에 나는 노총 여성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는 정책실 연구원이었다. 하루는 우리 국 직원이 정책실에 업무협조를 하러 갔다 오더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지 한 연구원에 대해 마구 욕을 퍼부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수십 년 해 온 역전의 용사들이 대부분이었던 노총에 대학 출신 연구자들이 몇 사람 있었다. 수십 년 노동 현장에서 고생하며 잔뼈가 굵은 사람들에게 현장 고생 없이 이론만으로 노조 간부가 된 사람들은 인성과는 상관없이 쉽게 싸가지 없는 새끼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직장에서 평생 달려온 모양이다.


   노동부장관과 마주 앉은 이 노동자는 왜 이런 극단적인 일을 벌이고 있는가?  22년 차 용접공인 그는 228시간 일을 하고 월급으로 세후 207만 원을 받았다. 또 다른 하청노동자인 23년 차 도장공은 291시간 일해 234만 원을 받았다. 295만 원을 벌었을 땐 무려 374시간 일했다. 6년 전 조선소 불황으로 30% 임금이 깎인 후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버린 지금까지도 그대로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조선업에서 20년 베테랑 노동자가 하청이라는 이유로 요즘 청년층 첫 직장 임금만도 못한 200만 원 안팎의 월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이다.


  소설가 김숨은 『제비심장』에서 조선소 작업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철상자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거대한 철상자 안에서 길을 잃는다. 안전은 무시되기 일쑤다. 쇳가루가 날리고 독한 페인트 냄새가 공기처럼 떠도는 곳, 하루살이 노동자들은 일당을 벌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바친다. 하루를 벌어야 하루를 산다.’


   김숨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현실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세계를 비현실적이라 느끼는 독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세계를 아느냐 모르느냐, 도대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고 묻고 있다. 높은 작업대에서 떨어지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체에 맞으며 하루 평균 22명이 불구가 되고, 병이 나고, 죽는다.


  왜 이렇게 사람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까? 노동자들이 조선소를 떠나버려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칠 날이 오지 않을까?


  이렇게 비현실적인 작업장 환경에서, 이렇게 오래 일하고 놀랍도록 적게 받는 임금을 보니 1970년대 여성 노동자가 생각났다. 대학 2학년 때 학교에서는 한 학기 동안 실습할 장소를 영등포에 있는 도시산업선교회로 정해 주었다. 우리 과가 실습을 중요시하는 것은 알았으나 산업선교회는 참 뜻밖의 실습지였다. 한 학기 동안 매주 하루는 어김없이 공장 노동자들을 만났다. 1972년 봄부터 여름까지. 그때 내가 만난 여성 노동자들은 주로 대기업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보다 어렸고, 너무 비참한 상태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작업장은 먼지가 자욱하고, 35~6도 넘게 무척이나 더웠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게 받았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따로 있다. 기숙사 반찬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사장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본다면 그런 음식을 줄 수 있을까요?”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여 대학생활을 즐기던 나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본다면’이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에게는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세계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사회적으로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이다.


  그 후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세계 최대 빈곤 국가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대열에 섰다. 그런데 그때와 너무나 흡사한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이다.  


  농성이 끝났다. 하청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임금 상 30%에는 턱없이 부족한 4.5% 인상에 합의하며 타협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이 진 것인가? 그런데, 협상타결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노동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은 얼굴로 환호한다. 협상타결 후 철창에서 풀려 나오고, 고공에 있던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올 때 서로 껴안고 오열하며 승리의 구호를 외쳤다. 파업으로 인해 생겼다는 8,000억 원의 손해배상을 떠안게 될 처지인데도 말이다.


  왜 기뻐하고 있을까? 목숨이 위험했던 동료가 살아 나와서 그러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일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서, 어떤 임금을 받으며 일해 왔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철상자 바닥에서 포설 공들은 거대한 전선을 깔고, 용접공들은 철판을 녹여 늘이고 붙인다. 파워공은 그라인더로 철판 표면을 깎고, 도장공은 철판에 페인트를 칠하고, 발판공은 작업자들이 움직이며 일할 발판을 만든다. 요즘 조선소에서 발판공은 무조건 하청 소속이다. 정규직은 수십 미터 고공에서 발판 만드는 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도장, 전기 업무도 거의 하청이 처리한다. 위험한 일은 하청이 한다. 조선 산업의 80%가 다단계 하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20년 차 숙련 노동자의 일당이 최저임금 수준인 것도 알았다. 이 불합리한 임금 체계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숙지한 것이다.


   작은 공을 던져 올린 난쟁이처럼 그들은 하늘을 향해 작은 별을 쏘아 올렸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호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러니 그들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제1독 바닥에서 장관과 노동자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 나는 어릴 때 부르던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힘센 존재와 약한 존재의 만남.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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