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살아남기-살아가기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石筍 61집에 총총이라는 필명으로 실은 글입니다. 석순은 캠퍼스 곳곳에 오프라인으로 배포됩니다.
며칠 전 당신이 죽었습니다. 내가 연필을 쥔 지도 어느새 며칠이 지났으나 당신은 여전히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분명 당신은 지난달에도 죽었습니다. 작년에도 어느 날 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만 하기에는 당신의 죽음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왜요? 따져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요? 당신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요. 설명을 듣기전에는 슬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당신이 죽었습니다. 며칠 전 죽었던 당신이, 몇 달 전에 죽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또다시 묻습니다. 나는 또다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또다시 슬퍼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나는 분노합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무너지고 절망합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그리고 안도합니다. 나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하루를 누리는 기분은 죄스럽습니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고 무언가를 때리고 부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을 대신하여 그 고통을 되갚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고통이 무엇인지, 당신이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그저 슬퍼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나는 슬픔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라진 슬픔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빼앗긴 슬픔을 찾아와야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슬픔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분노의 자리를, 좌절의 자리를, 체념과 우울과 무기력의 자리를 슬픔으로 다시 채우고 싶습니다. 그 슬픔으로 당신을 온전히 애도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내일의 당신이 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의 죽음도 모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며칠 전 당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렇기에 나는 연필을 쥐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소식은 나를 아프게 했고, 분노하게 했고, 절망하게 했고, 슬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연필을 쥔 지 어느새 또 며칠이 지났으니 당신은 여전히 며칠 전에 죽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