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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련 Dec 11. 2023

[석순61] 소설 | 판다의 옷장

특집: 살아남기-살아가기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石筍 61집에 총총이라는 필명으로 실은 글입니다. 석순은 캠퍼스 곳곳에 오프라인으로 배포됩니다. 


글과 방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방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울프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내게는 방이 없어 글이 없는가. 하지만 글이 없어 방이 없다. 글이 없어 방이 없어 글이 없어 방이 없어……. 글이 없는 나는 방랑한다. 

연필 한 자루와 노트를 들고 집 없이 거리를 떠돈 지도 몇 주째다. 이번에는 기필코 방을 구하리, 마음먹고 부동산을 찾았다. 

“방 좀 보러 왔는데요,” 

문을 여니 지친 기색의 아주머니가 무테안경 너머로 나를 본다. 안경은 짙은 보라색으로 틴트 되어 있다. 광변색인가. 그의 뒤쪽에 놓인 오래된 티브이에서 뉴스가 소리 없이 화면만 이따금 지직거리며 흘러나온다. 

그가 수첩과 펜을 집어든다. 

“따라와요.” 

부동산을 나와 골목길로 걷는 그를 따라 걸으며 우리가 제법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 방에는 여자가 많다. 빽빽하게 앉아 휴대전화를 쥐고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비명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번갈아 들리는 방에는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다. 

“저건 뭐예요?” 

목청을 높여 묻는다. 가구 하나 없이 여자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방 한구석에 먼지 쌓인 자물쇠로 잠긴 옷장이 하나 놓여 있다. 

“판다의 옷장이에요. 전에 여기 판다가 살았거든요.” 

여자들의 소리가 커서 잘 들리지 않는다. 

“판다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방에도 하나씩 있어요. 판다가 두고 간 옷장.” 

*

자세히 보니, 학창 시절 교실의 나무 책상에 샤프로 긁어 넣은 것과 같은 모양새로, 정말 ‘판다의 옷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옷장도 다 옵션이에요.” 

“비밀번호는요?” 

“그건 몰라요. 사람 불러서 자르든가 해요.” 

옷장이고 뭐고, 이 방에서는 못 지낼 것 같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타자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방의 한쪽 벽을 따라 줄지어 앉은 여자들이 노트북을 펼치고 타자를 친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눈짓한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전 손글씨가 취향이라서요.” 

이 방의 여자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있다.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퍼즐 조각처럼 늘어져 있다.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나와 부동산 아주머니를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여기는 다 방 뺀 지 오래예요.” 

마지막 방에는 아무도 없다. 베개가 놓인 침대, 그리고 판다의 옷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침대도 옵션이에요?” 

매트리스가 오래됐는지 앉으니 스프링이 삐걱댄다. 베개에는 얼룩이 가득하다. 만져보니 꿉꿉하고, 큼큼한 냄새가 난다. 

“이것도 판다가 두고 간 거예요?” 

“그렇죠.” 

“판다가 여기 들어가요? 엄청 크지 않나?” 

아주머니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이 웃는다. 

“판다가 그 판다가 아니고요. 하하하. 전에 여기 여자가 살았는데 별명이 판다였어요. 매일 울어서, 눈 주변이 시꺼멓게 늘어졌거든요.” 

나도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 

“그 여자가 옷장에서 뭐가 나올까 무서워서 잠가놓았대요. 나갈 때 풀어달라고 하니까 비밀번호를 분명 자기가 달았는데 바뀐 것 같다고 난리를 쳐서. 바뀌긴 뭐가 바뀌어 지가 까먹었지. 하하하.” 

“하하하. 웃긴 여자네요.” 

“그랬지. 아무튼 판다가 가고 나서부터 여자들이 여기 엄청 들어와 살았는데, 며칠 지나니까 이 방만 비었어요. 여기가 판다 방이어서 침대도 있고 좋은데. 자기 글 쓰려면 여기가 넓어서 좋을 거야.” 

베개를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방마다 묻고 다녔지만 판다의 옷장을 열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판다의 옷장을 열기 위해 번호도 이것저것 눌러보고 힘도 써봤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고 손가락만 아팠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이내 다른 방식으로 옷장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글을 쓰려다 말고 한 번 연필로 자물쇠를 쑤셔보았다. 심이 부러졌고 나는 연필깎이가 없었다.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판다의 옷장에 새겨진 글씨만 계속 읽었다. ‘판다의 옷장’. 

요즘은 부러진 연필로 옷장에 글자를 새긴다. 

사실 판다는 죽었다. 

여자들은 판다의 비밀을 찾고 있다고 한다. 휴대전화가 있는 여자들은 휴대전화를 보고, 노트북이 있는 여자들은 타자를 친다. 목소리가 있는 여자들은 소리를 지른다. 아무것도 없는 여자들은 누워 있는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휴대전화를 보고, 타자를 치고, 비명을 지르고, 누웠다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판다의 비밀이 옷장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옷장을 여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번호도 이것저것 눌러보고 힘도 써봤던 것이다. 사람도 부르고 경찰도 불러봤지만 힘으로 그것을 열고 싶지는 않았고, 번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휴대전화가 있는 여자들이 바깥소식을 알아 왔다. 판다가 또 죽었다는 것이다. 판다는 이미 죽었잖아, 하고 누군가 반문했지만 여자들은 휴대전화를 내밀며 기사를 읽어보라고 했다. 판다가 틀림없다고 했다. 기사를 읽어보니 판다가 틀림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야 했으므로 여자들은 노트북을 꺼냈고, 그러다 지쳐 누웠다. 매일매일 판다가 죽었다. 

여자들은 판다의 옷장 속에 분명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물쇠를 풀 수 있다면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바빴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판다의 소식을 쫓아야 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판다의 소식을 전해야 했고, 이를 파헤쳐야 했다. 그들은 분노했고 절망했다. 죄 없는 판다가 왜 자꾸 죽는지 알아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도 노트북도 없고, 목이 약해 소리를 지를 수 없다. 내가 가진 건 텅 빈 노트와 부러진 연필뿐이다. 

나는 계속 옷장에 글자를 새긴다. 이미 글자가 있는 곳에 덧새기다 보니 옷장의 나무가 조금씩 파인다. 

여자들이 점점 내 방으로 몰려든다.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 누워있는 방에 가서 한 명만 내 방에 와달라고 했다. 판다의 옷장에 글자를 새기다 보니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서 뭔가 나오고 있었다. 판다의 비밀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무서웠다. 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까맣고 끈적했다. 아무나 나와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 여자는 내 방으로 왔고, 나는 계속해서 글자를 새겼다. 

옷장에 둥글게 새긴 문장이 점선을 이루어 꿈틀댄다. 검고 끈적한 것이 새 나오는 그 모양을 따라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다. 나는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본다. 여자들이 서 있다. 노트북을 하다 말고, 휴대전화를 보다 말고, 누워 있다 말고 온 여자들이 서 있다. 

나는 다시, 한 꺼풀의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다. 글자를 새길수록 여자들이 다가온다. 그들의 숨결이 목뒤에 닿는다. 그들의 떨림이 느껴진다. 

‘-야’ 

마지막 글자를 새기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옷장의 나무가 둥근 모양으로 떨어져 나온다. 내 머리에 묵직하게 부딪힌다. 

판다의 옷장 안에는 자물쇠가 가득했다고 한다. 검고 끈적이는 것은 잉크 같았는데 몇 개의 자물쇠에는 흔적 같은 것이 묻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옷장 아래에 고여 있었고 짠 냄새가 났다고 한다. 자물쇠는 모두 잠겨 있었고 여자들이 모두 열심히 번호를 눌러본 결과 몇 개는 풀렸고 몇 개는 풀리지 않았다. 내가 쓰러진 이후 여자들은 내 연필을 다른 방에 가져가 판다의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모두 자물쇠가 들어 있었다. 

여자들은 옷장에 있던 자물쇠를 모아 눌러보다 풀린 것을 작은 번호부터 큰 번호 순서로 나열했다. 번호들은 자주 연속되었다. 모든 숫자가 하나씩 있을 것이라고 여자들은 추측했다. 비밀번호가 0001인 자물쇠, 0002인 자물쇠, 0003인 자물쇠……. 내가 깨어났을 때 가장 큰 숫자는 0372번 자물쇠라고 했다. 

우리는 0372부터 숫자를 줄여가며 잠겨 있는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여자는 0231을 누르려다 실수로 1231을 눌렀는데 자물쇠가 풀렸다고 했다. 

우리는 판다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고 대신 판다를 묻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묻을 판다가 없었기에 그에게 소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물쇠들을 묻었다. 그즈음에는 이미 많은 자물쇠가 풀려 있었기에 0001번 자물쇠부터 1296번 자물쇠까지 최대한 깔고 빈자리를 풀지 못한 자물쇠로 채웠다. 그 위에 흙을 덮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휴대전화가 있는 여자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소식을 전했고 노트북이 있는 여자들은 노트북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워 있던 여자들은 눕거나 혹은 서 있는 상태로 우리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직도 비어 있는 노트를 한 장씩 찢어 우는 여자들에게 나눠줬다. 종이에 눈물이 닿자 까맣고 끈적하게 변했다. 

비석으로는 판다의 방에 있던 판다의 옷장에서 떨어져 나온 둥근 나무 조각을 세웠다. 가운데에는 판다가 긁어 넣은 ‘판다의 옷장’이 있고 둘레를 따라 점선처럼 우리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나는 판다를 위한 추도문을 읽기로 했다. 읽기 위해서는 써야 했지만 연필이 부러져 있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고, 그사이 판다를 묻기로 한 날이 다가와 결국 읽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판다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제는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판다의 옷장에 판다가 전에 쓰던 베개와 나의 노트와 부러진 연필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판다를 묻고 나서 부동산 아주머니를 찾아가 펜을 빌렸다. 아주머니는 일주일 뒤에 누가 방을 보러 오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는 꼭 돌려달라고 했다.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나는 추도문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글을 쓴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아주머니와의 약속과 내가 만들어 낸 판다와의 약속을 모두 지킬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판다의 비석처럼 추도문도 판다의 옷장에다가 새길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었고 이미 심이 부러진 연필이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는 터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여자들이 판다의 방으로 모였다. 우리는 요즘 판다의 방에서 자주 모여 지냈으며 여전히 다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판다의 옷장이 열린 이후로 서로의 방을 드나드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의 추도문은 짧았다. 일주일 만에 긴 추도문을 쓰기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모여준 여자들과 판다를 위해 목을 가다듬고 발음을 또박또박하게 하기 위해 애쓰면서 추도문을 읽었다. 

“판다야 어디 갔니. 판다야 왜 죽었니. 우리가 네 비밀을 밝혀낼 거야. 우리는 판다에게 두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약속을 했고 판다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판다는 우리에게 방과 옷장을 남겼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판다의 옷장에 담긴 비밀을 밝혀낼 의무가 있다고 보아 이 일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생전의 판다를 몰랐기에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으며, 판다의 죽음은 여러 번 뉴스에서 다뤄지기는 했지만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판다가 저 판다인지 저 판다가 그 판다인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일차적으로 판다의 옷장을 열었다는 점만은 틀림없습니다. 이차적으로 우리는 판다의 방에서 발견한 것들—가령 자물쇠, 옷장, 잉크—로 판다의 비밀을 최대한 풀어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판다를 보내주려 합니다. 판다의 자물쇠들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판다를 기억할 것입니다. 판다의 자물쇠들은 판다를 대신해 오늘 이곳에 묻히지만, 동시에 우리 가슴에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 판다를 위하여.” 

“위하여.” 

여자들이 나를 따라 낮게 말했다. 

“더불어 저는 글을 쓰기 위해 방을 찾던 중 판다의 방을 발견했으며 판다의 방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판다에게 고마운 것이 많은데도 판다의 추도문을 제때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판다에게 거듭 사과드립니다. 판다야 미안해.” 

“미안해.” 

여자들이 미안하다는 말까지 모두 나를 따라 말해서 나는 조금 놀랐지만 우리가 판다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의 잘못이었으므로 이 김에 판다에게 사과를 한 번 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나의 추도문은 끝났다. 다른 방에서 지내던 여자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문을 열자 부동산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서 있었다. 펜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우리는 판다가 자물쇠를 매일 갈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숫자를 하나씩 키워가며 비밀번호를 새로 설정한 자물쇠를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다가 판다가 될 때까지 눈가가 시커메지도록 울면서 자물쇠를 갈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판다가 울면서 자물쇠를 갈 때마다 자물쇠에 무언가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옷장의 잉크와 짠 냄새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판다가 정말 썼는지, 썼다면 무얼 썼는지, 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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