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갑갑한 분위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저 특정한 상대를 바라보고 검도 호구(護具)를 착용하는 장면만이 존재할 뿐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캐릭터 내면의 숨 막힐 듯한 압박과 집착이 느껴져 왔기에 호감이 갔고 즉시 예매를 진행했습니다.
검도 잘하는 영화
검도 대결 장면들을 굉장히 잘 만들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검도 영화라는 부분입니다. 작품은 단순히 스포츠 영화가 아니며 검도라는 수단을 통해 생계를 이루려는 모습과 무술가로서 자세 또한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검도에 담겨있는 다양한 특성을 모두 잡음과 동시에 검도를 하는 캐릭터들의 내면을 잘 묘사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다만 작품은 검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검도를 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서사의 대부분은 주인공 재우와 재우의 시선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스포츠를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통찰해내가는 '록키'(1976)에 근접한 영화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황태수, 황태수, 황태수
갈등의 원흉이지만 악의는 없는 인물이다
작품은 초반부터 관객들에게 황태수라는 이름을 주입시킵니다. 가족을 잃었던 재우의 과거를 통해 황태수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게 되지만 정작 작품은 황태수라는 캐릭터에게 일부러 거리를 둡니다. 이는 작품이 재우가 태수에게 지향해야 할태도와도 사뭇 닮아 있습니다. 재우는 태수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되었습니다.
재우에게 '최고의 검도 선수 황태수'는 단순히 원수라는 말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검도인으로서 그의 존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넘어서야 될 목표점이며, 형의 죽음 이후 최고의 검도 선수가 된 태수의 모습은 형의 죽음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 와중에 재우의 아버지 김철원에게 물려받은 태수의 검도와 두건은 재우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자극합니다.
재우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애증만 남아 태수에게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를 꺾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며 도발과 폭행까지도 저지릅니다.
재우의 집착에는 태수가 어떤 인물인지가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태수가 선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수를 보고 있음에도 태수가 어떤 인물인지 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죽도를 겨눠야 할 상대를 잃어버리고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집착할수록 놓치게 되는 아이러니
태수에게 집착할수록 재우의 검도는 흔들린다
흔들린다는 부분은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너무 꽉 쥐어 유연함을 잃어버린 죽도는 계속 흔들립니다. 단단하게 움켜 쥔만큼 강하게 휘두를 수 있지만 오히려 자신을 잃고 상대에 대한 집착만 남아버리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집착만 남은 재우의 시선을 통해서만 황태수를 보게 됩니다. 담담하게 싸워나가던 재우는 태수에 대한 트라우마가 발동되면 시종일관 흔들립니다. 화면 가득 밀착된 재우의 모습과 손, 발의 떨림까지 재우의 집착이 선명하게 묘사되며 오직 검도에 의한 소음과 숨소리만이 작품을 가득 매웁니다.
이런 집착이 태수를 이길 기세로 이어지지만 그것도 잠시뿐 경직되어 있는 재우의 죽도는 단 한 번도 태수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재우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기만 합니다.
예고편에도 나왔던 호구(護具) 착용 과정은 태수에 대한 재우의 집착을 잘 표현한 명장면입니다. 강하게 조여맨 호구(護具)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재우 스스로가 옥죄어 쓰러지게 만듭니다. 집착에 묶여 자신과 상대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재우의 아이러니가 가장 명확하게 다가오는 장면입니다.
검도인으로 마주하다
준희는 검도인, 아버지, 형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도 불구하고 준희와 대결하던 재우는 태수가 눈에 들어오자 이성을 잃고 공세를 더하다 준희를 다치게 합니다. 결국 팔을 다친 준희는 합숙 훈련장을 퇴소하게 되고, 생애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전이었음에도 오히려 재우를 위로하며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도 조언을 건넵니다.
나중에 혹시 아버지 보게 되면 그땐 아버지도 너랑 같은 한 명의 검도인으로 볼 려고 해 봐 부모로만 보지 말고.
니들한텐 내가 형이고, 뭐 애아빠로 보이겠지만 와이프는 나보고 애가 애들을 키운다 그래. - '만분의 일초'(2023) 중
이런 준희의 태도는 작품이 지향하는 검도인으로서 완성된 정신을 보여줍니다. 검도장에서 선수로 마주한 이상 검도인으로서 상대를 바라봐야 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검도장을 나오는 순간 한 가정의 일원임을 명확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합숙 훈련장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죽도를 뒤늦게 챙길 정도로 가볍기만 합니다.
자신을 분명히 구분하여 상대를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비단 재우뿐만이 아니라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모든 가장들에게도 유의한 교훈을 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준희의 캐릭터가 태수(검도인)와 철원(아버지), 재영(형)의 요소를 골고루 섞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준희는 재우와 죽도를 맞대는 경쟁 선수이지만 누구보다 재우를 잘 챙겨주는 가족 같은 따뜻한 인물입니다. 결국 팔을 다치고 떠나는 순간에도 재우를 검도인으로 성장할 것을 다독여주며 떠나는 그의 모습은 재우의 아버지 철원과 형 재영이 미처 하지 못하고 떠난 일을 매듭 지어주는 느낌도 듭니다.
재우는 굳게 부여잡은 손에 힘을 풀고 태수와 아버지를 검도인으로 마주합니다.
태수와 마지막 대결의 끝은 새하얀 배경 속에서 현실이 아닌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마침내 집착을 벗어나 검도장을 나오는 재우의 모습은 승패에 상관없이 최고가 된 검도인의 모습입니다.
만 번을 휘두른 끝에 나온 답
몇 번이고 죽도를 휘둘러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만분의 일초'(2023)는 대중들에게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권민우'역으로 출연한 주종혁 배우의 주연작으로 유명할 것입니다. 사실 작품이 재우의 내면의 트라우마를 다루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주종혁 배우의 연기가 작품에 매력 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인물의 내면을 완성해 나가는 검도영화로서 작품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일단 감독이 검도를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런지 작중 검도 대결 장면들이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주변 소음과 여타 스포츠 영화에서 나올법한 연출들을 뒤로 한채 오직 검도에 의한 소음과 장면들을 촘촘하게 담아내는 게 인상 깊은데 덕분에 스포츠보다는 검도라는 무술과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수준 높고 몰입도 있는 장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검도의 특성을 살려 싸우기 위해 죽도를 움켜쥐는 행위를 자신을 망가뜨리는 아이러니한 집착으로 연결한 부분은 검도를 다룬 영화만의 독창성이 잘 살아있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식 무협 영화를 본 기분이 들어 더 신선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필시 다른 관객들에게도 상대와 맞서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무술의 매력을 잘 표현한 무협영화로 기억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