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햇빛을 피해 서점으로 들어온 75세 할머니 이치노이 유키(미야모토 노부코)는 우연히 본 아름다운 그림체의 BL만화를 계기로 BL에 빠져들게 됩니다.
한편 친구라고는 소꿉친구인 와무라 츠무구(타카하시 쿄헤이)밖에 없는 고등학생 사야마 우라라(아시다 마나)는 서점에서 알바를 하던 중 BL 만화를 구입하는 유키를 보고 용기를 내 유키와 BL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가 됩니다.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가 생긴 것에 대한 기쁨도 잠시 유키와 츠무구의 애인 하시모토 에리(시오야 유키)가 자신과 다르게 BL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니자 우라라는 당당하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합니다. 하지만 유키는 우라라에게 BL만화 제작(동인지)을 제안하고, 유키의 말에 감명받은 우라라는 코마케에 자신이 만든 동인지를 내놓기 위해 열을 올려 작품을 창작해 나갑니다. 또 다른 한편 잘 나가는 BL만화 작가 코메다 유(후루카와 코토네)는 기나긴 창작 활동에 지친 마음을 코마케에서 치유하려고 합니다.
오래전에 후루카와 코토네가 조연으로 나온다고 해서 이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감상 이유는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보다는 새벽녘에 좋아하는 배우 얼굴 보러 가자는 팬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시점에 필자는 작품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나름 인생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BL이 싫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라라와 유키의 즐거운 BL 토크 타임
누구나 남들과 공통된 관심사를 얘기하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하물며 그게 눈앞에 존재하는 친구와 하는 이야기라면 더 즐거운일이겠죠. 영화는 겉으로는 BL이라는 호불호 갈릴 소재를 선택했지만 '좋아하는 감정의 공유'라는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감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성은 다정하고 친절한 캐릭터들의 호감 가는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부드럽게 전달됩니다.
유키는 남편을 사별하고 외롭게 살아가던 중 소위 말하는 BL 만화 덕질에 열정을 품게 된 인물입니다. 이 모습이 소녀스러운 감성이 느껴져 제법 귀엽기까지 합니다. 반면 작품의 주인공인 여고생 우라라는 자신의 취미를 드러내기는커녕 인간관계가 서툴러 친구 자체가 적습니다. 거기에 당당한 유키의 모습을 보고 재수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질타하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관객들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이 둘에게 공감대를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인물들에게 공감 가면서도 위로받는 이유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단순히 숨기고픈 취미의 공감과 우정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한 성장의 과정을 그리는 힐링 청춘물의 성격을 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 빼고 다 괜찮은 거 같을 때
선남선녀 커플이 아니라 그냥 소꿉친구다
작품은 우라라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을 서서히 조명합니다. 주변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라라와의 대비가 돋보이는 편입니다. 앞서 말한 쾌활한 할머니 유키를 포함해, 배려심 있고 남녀 가리지 않고 친근한 소꿉친구 카와무라 츠무구, 츠무구의 여자친구이자 멋지고 진취적인 인물인 하시모토 에리등 척 보기에도 우라라는 이들에 비해 작고 약한 인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인기 BL 만화 작가 코메다 유 또한 작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우라라처럼 정체된 상태로 있습니다. 그녀는 슬럼프에 빠져 작품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라라와 같은 좌절을 겪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들에게도 인간미 있는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사실 모두 그렇습니다. 모두가 아무 고민 없이 모든 것을 잘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각자의 고민, 좌절이 존재합니다. 이런 건 별로 새롭지도 않고 놀라운 얘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우리 모두 잊고 스스로를 작게 만든 경험 또한 있을 것입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캐릭터들의 의외의 모습들은 우라라, 코메다 선생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스스로에대해 불안해하지만 악착같이 고민하며, 노력하며 살고 있음을 알려주며 관객들의 위로가 됩니다.
불안도, 기대도 창작의 과정
부족하지만 계속 그려나간다
초반 이후 코미케에 판매할 만화를 그려나가는 우라라는 여전히 소심한 아이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만화를 계속 그려나갑니다. 그녀가 창피함과 애정, 괴로움과 기대감을 품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집념을 가지고 분투하여 그려낸 만화는 아름다운 글을 써 내려가는 서예와 유사점을 내비치며 올곧은 마음을 담은 작품임을 암시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 그 이상은 없다. - 프랑스와 트뤼포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사랑하는 것의 마지막 단계라고도 합니다. 우라라는 만화를 만드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지만 충실한 마음이 든다고 자조합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언제나 부족해 보이기도 하고 불안합니다. 그럼에도 불안을 안고 창작(애정)을 계속 이어나가 작품 안에 녹여내고 무언가를 만들 때 더없는 충실감이 듭니다. 결국 자신감뿐만이 아닌 열등감도 보듬고 갈 수 있어야 진짜 창작(애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품에는 창작자의 마음이 담긴다
충실한 마음으로 만들면 아무리 못난 작품도 창작자의 진심이 보인다
그렇게 열심히 만든 우라라의 만화는 아마추어가 만든 동인지임을 감안해도 수준이 높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라라가 아무리 창피해하더라도 행복한 진심이 담긴 작품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울림을 주고 코메다 작가에게는 만화를 계속 그려나갈 초심을 다잡아줍니다.
우라라는 만화를 진심으로 만들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신을 한심하다고 자조합니다. 그러나 완성된 만화가 있다는 것은 타인에게 진심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라라가 온 애정으로 만화를 그려왔기에 우라라의 만화에서는 스스로가 극복해내지는 못한 내면의 불안보다는 순수하고 따뜻한 애정이 엿보이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창작자의 주관이 뚜렷이 담긴 작품을 애정합니다. 진정 좋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싫더라도 창작자의 마음이 묻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이 우라라를 통해 보여준 따뜻한 애정은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도, 글을 쓰는 창작자로서도 더없이 공감이 갑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자
좋아하는 건 능력과 나이에 상관없이 좋아하면 된다
'메타모르포제의 툇마루'(2022)는 가벼운 작품이지만 그 안에 따뜻한 감성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때로는 상대를 응원하는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을 자아냅니다. 그래서인지 마이너 한 소재를 내세웠음에도 무언가를 애정한다는 게 나이와 능력에 상관없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잘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필자는 맨 앞단락에 작품을 인생 영화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필자에게는 정말 따뜻한 힐링이 된 작품이었는데 스스로를 당당해지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캐릭터의 모습은 필자가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게 된 계기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고 지금은 생각해 봅니다.
인생 영화라는 말은 인생을 바꾸는 영화를 말하고는 합니다. 사실 필자는 인생 영화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삶에 영향을 주는 의미는 비단 영화뿐만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사람에서도 찾을 수 있고, 땅바닥에 흩날리는 나뭇잎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정 누군가를 움직이는 작품은 명작, 대작, 수작과 같은 작품들이 아니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삶에 모든 것에서 변화할 동기와 원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