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이 Dec 06. 2023

끝없는 증명의 길

엽문 4 : 더 파이널(2019) - 주관적인 영화 리뷰

※ 본 리뷰는 '엽문 4 : 더 파이널'(2019)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왓챠피디아


엽문 시리즈 그 마지막 이야기

견자단 하면 엽문을 떠올릴 정도로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남다른 무협영화다

전편(엽문 3)에서 아내를 떠나보낸 엽문(견자단)은 홀로 아들 엽정(엽화)을 키우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와중 암 판정을 받습니다. 홀로 남을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유학을 알아보려고 엽문은 제자 이소룡(진국곤)의 초대를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입학의 과정은 쉽지 않았고 중화 총회 회장 만회장(오월)은 이소룡이 서양인들에게 하는 중국 무술 교습 행위를 중단시킬 경우 추천 입학을 해주겠다는 압박을 가합니다.

한편 이소룡의 제자인 미 해군 하트만(오건호) 하사는 중국 무술을 신병훈련 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 교관 바턴 게디스(스콧 앳킨스)는 이를 거부하고, 이민국과 합심하여 인종차별적인 모욕과 폭행을 이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아들과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교민들과의 갈등 속에서 엽문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의에 맞서기 시작합니다.


일단 앞서 말씀드리지만 작품은 실제 엽문의 생애랑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구축해 놨기 때문에 실화 여부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사실 전편들도 실화 기반이라고 하기엔 과장이 많이 들어간 편이어서 무협 영화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합니다.

아무튼 견자단과 무협 영화 시리즈를 대표하는 엽문의 마지막 작품 '엽문 4 : 더 파이널'(이하 엽문 4)은 여전히 쿵후 액션 영화 팬들에게 어느 정도 만족감을 보장해 주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전역에 펼쳐져있는 중화사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작품을 중화사상에만 묶어 비판하는 것은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엽문은 분명 본연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고, 시리즈가 이어져 오면서 깊어진 주제와 서사적인 의미 또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옅어진 중화사상

1, 2 편의 경우 수많은 중국인들 앞에서 싸워서 중국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일체감을 주었다

 작품은 전편의 요소들을 골고루 재활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국민들을 억압하는 외부세력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악한 무도인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불의에 맞서는 기본적인 무협 서사 구조의 클리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중화사상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을 지배한 외압으로부터 엽문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게 엽문 시리즈의 정체성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화사상은 3편을 기점으로 외압의 영향이 사라지고 가족과 무도 사이에서 딜레마를 다루면서 색채가 옅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의 경우 뒤편에는 여전히 미국을 제치고 최고가 되고자 하는 중화사상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구조라는 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최소한 작품은 중화사상을 앞세워 타 문화와 인종을 깎아내리는 편견 섞인 혐오성 행위를 일삼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작지만 발전이라고 여겨지는 게 본작의 빌런 게디스는 빌런을 엽문과 대비되는 인물로만 묘사하던 전작들과 달리 여전히 엽문과의 대비점을 비치면서도 인종차별과 관련된 주제를 묘사한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비록 개별적으로 캐릭터 하나씩 놓고 봤을 때 차별의 형태가 얄팍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 교포들 조차 인종차별을 행하는 인물임을 드러내고,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미국인들을 중간중간마다 지속적으로 등장시켜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부분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서사의 특성상 중화사상을 내세우면서 타인을 깎아내린다는 평가들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작품에 중화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작품이 지향하려 했던 방향은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쓰러뜨려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증명

무협이란 자신의 정의를 증명하는 것

 엽문 1에서 중요한 것은 무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는 시리즈 내내 이어지는 무협 장르로서 본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무도를 얼마나 갈고닦던 사람의 본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는 무협의 기본 말입니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 블레즈 파스칼

힘과 정의의 상관관계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잘못된 논리 아래서 무력을 통해 스스로의 정의를 증명하려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종화는 백인들은 언제나 중국인들을 핍박하는,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이소룡이 백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주장하며 엽문을 압박하고 모욕하기도 합니다.

만종화와 대립을 이루는 교관 게디스 또한 중국인들을 자신들(백인)의 자리와 영역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백인들과 서로 협조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중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각자가 자신만의 정의에 부합한 선을 그어 타인종들과 자신들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 민족들도 그 밖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 스스로 인종차별이 무엇 인지 알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행위를 인종차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인종차별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인종차별은 그저 나르시시즘적 행위를 기반으로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인종차별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대원제 속에서 타인이 나의 자리와 영역을 빼앗고 있다는 증오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합심하여 단체를 이룬 형태로 타인을 몰아냅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정당한 행위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특히 작중 불타는 목인장은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종차별적 행동 저변에 깔려있는 증오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잘 전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증오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임에도 이민자들은 미국에 오지 말라고 하거나, 가라데를 하면서 중국 무술은 별다른 이유 없이 혐오합니다. 그들에게 정의는 본인의 이득을 기반으로 계산되기에 인종차별은 결코 공적인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엽문의 정의

항상 옳은 길만을 걸어왔던 엽문 조차 스스로 행한 불의를 반성한다

 스스로의 불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엽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에서 엽문은 이전 시리즈 못지않게 가족에게 부족한 면모가 부각됩니다. 아들을 믿고 지원해주지 못하며 죽은 아내를 언급하자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아들에게 손찌검하는 장면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엽문의 아들 엽정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토해냅니다.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심하게 틀어진 부자 사이에는 애증이 교차하는 장벽이 느껴집니다.


엽문은 아들을 미래가 창창하길 바라며 학교를 보내기 위해 유학을 준비합니다. 그곳에서 만종화의 딸 요나(반다 마그라프)와 인연을 맺게 되고 만종화와 요나의 모습을 보며 자식을 믿고 지지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삶에 끝자락에서 아들과 화해하는 엽문의 모습은 아무리 연륜과 덕을 모두 갖춘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기 힘듦을 상기시킵니다.






이소룡을 경외하다

작품 속 이소룡은 편견 없고 경외감이 느껴지는 완성형 인물로 묘사된다

예상을 벗어나 작품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이소룡입니다. 그의 오만해 보이는 모습은 차후 위기를 몰고 올 법한 위태로움을 지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도 차별 없이 타인을 대하는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작중 그를 무시하던 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 교포들에게도 스스로를 인정받는 그의 모습은 필시 엽문 4가 그려내려 한 중국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이는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았던 실제 이소룡의 삶이 작품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엽문 시리즈는 전편들부터 꾸준히 이소룡의 존재를 부각하는 장면들을 보여왔습니다. 본작에서 이소룡의 영화를 오마주 한듯한 장면, 주인공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이 되어준 그의 모습 또한 단순한 영화배우가 아닌 의로운 무인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해 낸 이소룡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이 묻어나옵니다.


이런 존경심과 달리 이소룡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비중이 크지 않습니다. 아쉬운 부분은 이로 인해 이소룡이 일종의 서비스용 캐릭터에 가깝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초반에는 이소룡과 관련된 중국 교포들과의 갈등이 존재하지만 정작 이에 관한 이소룡의 반응은 존재하지 않고, 후반에도 도움을 주지만 결국 등장 시간 자체가 짧은 데다 극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인물은 아닙니다. 때문에 관객들은 이소룡의 삶과 작품의 주제가 연동됨에도 이소룡을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밖의 존재로 인지하고 서사에서 그를 지워버리게 됩니다.




엽문을 증명하는 것인가, 중국을 증명하는 것인가

이것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일까?

 작중 중국 교포 출신 하트만 하사는 미국인 게디스 교관에게 '우리가 문화입니다. 당신의 패권은 순전히 증오와 편견이에요'라고 대사를 합니다. 이는 작품이 가진 미국을 깎아내리는 중화사상의 노골적인 증거로 꼽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필자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작품을 편견 없이 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체 씬을 다시 감상해 봤습니다.


미국에 건너올 행운을 줬다면
우리 땅을 밟아라.
이곳의 문화를 빠짐없이 배우고
이곳에 있는 걸 더없는 영광으로 여겨라
명예롭게 여겨라!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가장 우월한 나라.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아들었나?

(네, 알겠습니다!)

어젯밤
유감스럽게도 몸소 깨달았다
열등한 민족이 필연적으로
어떻게 패배하고 어떤 최후를 맞는지
결과가 어땠는지 다들 알겠지?
반론의 여지는 없다
그러니 너희들의 저급한 문화를 내 기지에 들일 생각 마라

(네, 알겠습니다!)
- 넷플릭스 자막 기준

본 대사는 게디스의 연설입니다. 연설 내용에서도 그가 백인으로서 가진 편향적인 나르시시즘과 이민자들을 향한 증오가 느껴집니다. 쉽게 말해 인종차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이것이 '다국적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군 신병들'에게 하고 있는 연설이라는 부분입니다. 특히 마지막 인종차별의 정점을 찍은 대사는 흑인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곧이어 엽문과 함께 미군 부대로 복귀한 하트만은 말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 납셨네. 주위를 보세요. 우리가 문화입니다. 당신의 패권은 순전히 증오와 편견이에요.
- 넷플릭스 자막 기준

이 대사는 게디스의 연설과 이어지는 인종차별에 대한 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당신으로 나눠놓은 대사의 맥락에서 '우리'는 게디스를 제외한 이민자들을 말하고 '당신(인종차별주의자)'이라는 특정 대상을 지정하여 일침을 가하는 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본 대사 속 우리는 '우리(중국인)'가 아니라 '우리(이민자)'가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게디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그에 대항하는 하트만과 엽문이 중국을 대표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는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미국인(이소룡과 싸운 무도가, 학교 교장, 교사, 미군 장성, 이민국 직원) 또한 적은 분량으로나마 계속 등장시켰기 때문에 게디스가 미국을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어폐가 있습니다. 때문에 필자는 작품이 미국을 깎아내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중화사상이 존재한다는 필자의 생각은 여전합니다.

하트만이라는 인물은 혈통만 중국인이지, 엄연히 미군 소속이라 처음부터 다른 국가 인물로 설정되었더라면 위 대사들이 지금만큼 중화사상의 증거로 지목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사는 미국 배경 작품인 만큼 외국인 배우를 활용할 수 있었음에도 제작진은 하트만을 굳이 중국 교포로 설정했고, 최종국면 또한 백인 미국인(바턴 게디스)과 중국인(엽문)이 미군 부대에서 대치하는 구도를 강조한 형태이기 때문에 중화사상적 의도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중화사상과 무협 장르의 특성이 섞이면서 작품의 최종 결전은 특이한 부분이 돋보입니다.

1,2편의 경우 수많은 외국인과 자국민 모두의 앞에서 엽문을 통해 중국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자국민 관객들을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3편의 경우는 관객도 아내 하나만 두어 보다 엽문, 개인으로서의 대결임 강조했습니다.


이번 4편의 경우는 1,2,3의 케이스가 섞인 대결입니다. 4편의 최종결전은 미국에 중국을 증명하고 동시에 이소룡처럼 세계에 엽문을 인정받는 중의적인 대결입니다.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군 신병들이 대결의 관객으로서 엽문에 대한 경외를 뜻하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바로 그 인정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서사와 캐릭터는 부당함을 타파하는 대결로서 양상을 이루지만, 작품이 제시한 구조는 중화사상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작품 마지막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작품이 엽문과 중화사상을 동시에 다루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1972년 12월 2일
79세에 일대종사 엽문은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70년대 이후, 미군은 정기적으로 무술 객원 강사를 초청했고
2001년, 미 해병대는 공식적으로 무술 훈련 과정을 도입했다.
- 넷플릭스 자막 기준 대사




엽문과의 작별

이러나저러나 즐겼다

 뒤늦게 말하지만 좋게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필자가 작품을 고평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엽문 4는 중화사상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더라도 단점 또한 분명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필자는 작품이 타국을 깎아내리는 형식의 중화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엽문에서 묘사되는 차별에 대한 고찰은 깊이가 얕습니다. 이 정도 차별에 대한 주제와 고찰은 이미 미국에서도 수천 번 이상 활용 되어오기도 했고 작품의 서사 구조가 2편을 재활용하여 서사와 캐릭터가 심히 단조롭습니다.


이 와중에 엽문 본인의 가정사와 만종화와의 대립, 미국 내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까지 섞이면서 어느 한쪽 주제도 강조하지 못해 전달력 없는 미묘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제들이 드러나지 못하고 가라앉으니 작품의 근간에 깔려있는 중화사상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액션의 경우도 편집이 튀는 부분이라던지 전작들보다 퇴보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적당히 박수 칠 때 떠났다는 인상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리즈를 줄곧 봐온 팬들에게 엽문이 보여준 마지막 플래시백의 감정은 각별합니다.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엽문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품이 보여준 추억은 오랜 시간 사랑받은 시리즈만이 팬들에게 할 수 있는 애정의 증명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선으로 완성되는 인간선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