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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Nov 29. 2023

시선으로 완성되는 인간선언

괴물(2023) - 주관적인 영화 리뷰

※ 본 리뷰는 '괴물'(2023)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왓챠피디아


태풍의 중심에 있는 소년

태풍의 중심에 이 소년들이 있다

 어느 밤, 집 근처 화재 현장을 구경하던 싱글맘 무기노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아들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에게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듣습니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이후 미나토는 평소랑은 다른 위험한 행동들을 일삼으며 통학을 거부하고, 이에 사오리는 미나토의 담임 호리 미치토시(나가야마 에이타) 선생에 의한 괴롭힘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사오리는 명확한 진상을 알고자 동분서주하지만 후시미 마키코(다나카 유코) 교장을 비롯한 학교 측은 형식적인 사과만을 반복하며 명확한 진상에 대한 언급을 회피합니다. 진상은 미궁에 빠진 채 폭행 사건의 여파는 점점 태풍처럼 커져갑니다. 한편 사오리는 어렵사리 사건의 중심에 있는, 미나토의 친구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를 만나게 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감독 초기 시절부터 소외된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주제 삼아 왔습니다. 이런 고레에다 감독의 독특한 점은 악역에 집중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온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더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은 시선의 방향에 따라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이야기이기에 더욱 특별합니다.




괴물은 누구게?

대체 누가 괴물인가

 작품이 시작하고 관객들은 1부에 해당하는 사오리의 시점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2부, 3부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의심과 확신이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어느새 괴물을 찾아내는 자신의 모습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불거진 교권 문제와 관련해 호리 선생과 학교 측이 사오리를 괴물로 여기는 장면들은 분명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단순히 교권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포스터를 비롯한 마케팅 단계부터 시작된 작품의 함정이었습니다. 괴물이란 키워드와 의심스러운 정황들을 통해 유도된 시선의 교묘한 설계는 현실 속 오해와 누명으로 엮여있는 뉴스와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중 사오리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미나토에게 자행된 과격한 체벌을 인정한 형식적인 사과를 할 뿐, 명확한 진상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호리 선생은 반성 없는 태도를 보이고, 그를 비롯해 사오리에게서 도망치기 급급한 학교 측의 모습은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괴물의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나 아빠를 잃었음에도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미나토와 싱글맘임에도 힘든 기색 없이 성실히 업무와 육아 모두 열심히 수행하는 사오리의 애틋한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들이 겪는 사건에 더욱 분노하게 만듭니다.


학교 측은 억울해합니다.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 사오리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학부모라는 사오리의 위치는 조직의 근간을 뒤흔들 파급력을 지녔고 그녀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일조차도 조직 전체가 합심하여 앞으로의 장래를 걸고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랜 경험을 근거 삼아 희생을 결정하고, 고개조차 드는 게 허락되지 않는 몬스터(괴물) 학부모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판단으로 인해 사오리의 말들은 학교 전해지지 않습니다.

학교가 진실보다 사과만을 앞세우자 사오리도 점점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수시로 학교를 오가며 법이라는 국가권력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결국 학교를 뒤흔드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프레임 섞인 시선의 폭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기에 더 가슴 아프다

 서로가 괴물로 보이는 사오리, 호리선생의 공통점은 단순히 시선뿐만이 아닙니다. 그들 각각은 '평범', '남자'라는 보편적인 프레임을 통해 미나토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최전선에 있는 두 사람은, 미나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들은 일련의 사건들의 원인을 '삐뚤어진 미나토'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미나토가 학교에서 요리를 괴롭힌다는 폭로가 나오자 사오리는 헛웃음 지으며 부정합니다.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녀는 아들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 이유를 묻는 게 두려워 죽음조차도 의심할지언정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일탈을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고 사오리의 혼란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미나토가 죽은 고양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는 말을 '미나토가 고양이를 죽였다'라고 받아들이는 호리 선생의 울분은 이미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나토에게 왜곡된 프레임을 씌었음 상기시켜 줍니다. 그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괴물이 되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미나토에게 달려가봅니다. 미나토를 구석에 몰아놓은 채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라고 묻는 호리 선생의 모습은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가슴 아픈 부분은 사오리와 호리 선생, 이들 모두 악의 따위는 없었고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분명 사랑하고 아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는 것은 미나토의 치유가 아니라 책임공방이었습니다. 프레임으로 고정된 시선 속에서 혐오의 말 한마디 없이 상처 입고 고뇌하게 되는 미나토의 모습은 점점 복잡화되어 가는 현세대의 민감한 젠더 감수성과, 둔감한 프레임의 변화, 그리고 자신을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누군가 상처입히는 사회의 아픈 부분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되돌아보는 시선

되돌아 보았을 때 스스로 괴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되돌아보면 자의든 타의든, 사오리와 호리 선생은 학교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혼돈으로 몰고 가는 괴물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괴물이 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요리를 부정하며 폭력으로 교정하려는 요리의 아버지, 또래보다 작고 여자 아이들과 친한 요리를 괴롭히기 바쁜 미나토의 학우들, 호리 선생을 괴물로 몰아가는 미디어와 마을 구성원들까지 모두 스스로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괴롭히는 괴물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호수가 있는 마을(이하 호수 마을) 사회의 모습은 곧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의 시선과도 일치합니다. 누군가 괴물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타인을 혐오하기 바쁜 관객의 시선은 비단 본 작품으로 한정되지 않고 현대 사회의 넘쳐나는 혐오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혐오는 강한 원동력을 지녔지만 사고를 정지합니다. 대상을 단순화시켜 더 깊은 고민의 여지를 없애고 대상을 프레임에 가두는 것입니다. 혐오의 시선을 통해 단순화된 인물의 모습은 한 캐릭터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선이 결정한 그녀의 모습

미나토 못지않게 시선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그녀는 적응한다

 마키코 교장이라는 캐릭터는 타인의 시선이 결정한 모습으로 보이는 인물입니다. 시선이 바뀔 때마다 그녀를 평가하는 관객들의 시선도 바뀝니다.

사오리는 마키코 교장을 체벌이란 미명하에 규칙을 어긴 아이들을 괴롭히는 마음이 없는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일부러 넘어뜨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호리 선생은 마키코 교장을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학교를 지키는 자기 보신형 인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죄를 남편에게 떠넘기는 인물로 보입니다.


결국 마키코 교장을 판단하기 위한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종국에 그녀만이 미나토를 이해하고 치유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마음을 숨긴 채 꿋꿋이 살아가는 부분에서 미나토와 닮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타인이 지정한 자신의 모습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어떤 형태와 모습이든 결국 자기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미나토에게 알려줍니다. 그녀는 아플지언정 행복을 놓치지 않을 만한 강한 인물입니다.


작중 마키코 교장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회는 이미 그녀를 어떻게 볼지 결정했기 때문에 진실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학교의 대표로서 오랜 경력을 지니고, 손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 속에서 그녀가 대항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마음을 죽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저항하지 않고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호수 마을 속 물의 이미지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과 물을 품은 사람들

각각 격동하는 불, 적응하는 물, 등등 불과 물에 대응하는 상황들이다

 작품에서 불과 물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첫 번째는 불입니다. 불은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자 강력한 결단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요리는 작품 초반 아버지의 음주를 막기 위해 걸스바 건물에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화재 자체는 사건의 중심이 아닙니다. 다만 잔잔한 호수 마을에 일어난 화재사건은 조용한 마을에 일어난 격동을 표현한 이미지를 상기시키고 화재를 일으킨 요리의 마음은 그에 조응합니다.


불은 단순히 화재를 일으킬 정도의 상처 입은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언제든 옳겨붙을 수 있는 격동입니다. 호수 마을에 불이 퍼지듯이 혐오와 분노, 두려움이 전파되어 호리 선생을 포함해 타인을 괴물로 만드는 일련의 사회 모습 또한 격동하는 불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물입니다. 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습니다. 환경에 맞춰 물은 컵에 담긴 물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지대가 낮은 곳에 모여 호수를 이루기도 합니다. 작품의 배경이 호수 마을인 만큼 물은 마을 전체의 잔잔하면서 평화로운 이미지와 맞아떨어집니다.


마키코 교장의 마음에는 불이 없습니다. 그저 순응하며 주변에 맞춰 적응하고 형태를 바꾸는 물(호수)입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미나토, 요리 또한 마음을 죽이고 순응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주변과 다르지만 순응하고 물속에 살아가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아이들은 보편적인 행복을 위한 적응을 포기합니다. 순응, 적응 같은 일련의 행동이란 그저 자신을 속이고 상처 입히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호수마을(사회)을 벗어나는 미나토와 요리의 모습은 통념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웅덩이를 찾아떠나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성장과 일탈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이를 뒷바쳐주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OST인 아쿠아가 너무나 감동스럽게 들립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를 결정한다면

우린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건 없어 원래대로야

 작품의 따뜻한 시선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빛을 내뿜고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게 본 마키코 교장의 무심한듯하면서 깊이 있는 얼굴은 다나카 유코의 아련한 눈빛을 통해 다양한 감정으로 표현되었고, 싱글맘 사오리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와 호리 선생을 연기한 나가야마 에이타 또한 작품의 품격에 걸맞은 흔들림과 고뇌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역을 맡은 미나토역의 쿠로카와 소야, 호시카와 요리 역의 히이라기 히나타의 애틋한 모습은 일본 영화계에 보석 같은 배우의 탄생을 예감케 합니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 눈물을 불러일으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선율마저도 객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민감한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면서도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와 다른 새로운 형식을 걸작으로 선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전히 대체불가능한 거장입니다.


포스터에서부터 시작된 괴물이란 키워드는 결국 우리 모두를 말합니다. 정확히는 우리가 규정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학교 폭력을 비롯한 학생 인권, 교권의 대립을 포함한 혐오의 시작은 결국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우린 모두 괴물이 아닌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플지언정 억지로 변화할 필요 없으며, 스스로를 똑바로 인정해야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임을 선언하고 바라보는 것부터 한 사람과 행복을 알아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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