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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칼렛 Dec 26. 2023

성당 성탄미사

저는 냉담자입니다



12월 24일에 성탄전야미사를 드리고 12월 25일도 성당에 가서 성탄절 아침 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냉담자입니다. 냉담자는 일체의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원래 모태 신앙이었고 30대 중반까지는 열심히 성당을 다니며 많은 봉사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리교사도 10여 년 정도 했었고, 오르간 반주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쌍둥이를 낳기 전인 30대 초반까지 했으니 그 기간만 최소 25년 이상은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냉담자로 지내다가 갑자기 성당을 가게 된 이유는,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 친언니의 도움 요청으로

갑작스럽게 오르간 반주와 노래를 하러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여파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들린 성당은 모습은 그대로인데 신자수는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과 함께 했던 천주교.

사랑과 추억과 정과 관심을 이곳에서 분에 넘치게 받았습니다. 즐거웠고 가슴이 따뜻했으며 많은 관심과 배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좋아했고 많은 시간을 함께한 성당을

지금은 왜 거리를 두고 있는지는 명쾌하게 어떤 이유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해 의구심을 가질 때는 많지만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미사를 드릴 때마다 너무 많은 생각과 혼란이 저에게 덮쳐왔습니다. 종교적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이 들었고 비신자와 신자를 비교해 볼 때 종교인만의 특색과 장점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알게 되었던 종교의 역사와 체제, 사람들을 응집시키기 위해 고안되고 마련된 장치들의 쓰임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에 반해 그것들을 무마시키고 덮을 수 있는 제 신앙의 힘은 너무 약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하는 미사 시간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혼란으로 인해서 더 괴로운 시간이 되어버리자 저는 그곳과 거리를 두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선 평화와 고요의 장소.

혹 내 마음이 돌아설 수 있을까 기대를 하며 성가대 의자에 앉았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특송 시간에 오르간 반주를 할 때는 가끔씩 감동의 물결이 마음속에서 일렁거리기도 하며 선율과 가사를 따라 사랑의 손길이 전해져 오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을 하시다가 첫 본당으로 부임받아 오신 신부님은 강론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기억을 되짚어 적어보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복음 말씀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신이 인간이 되어 직접 살러 오셨다는 이 부분에서

전율을 느낍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 신은 몇 개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직접 인간이 되어 그 삶을 함께 살아가는 종교는 크리스트교가 유일합니다.

 신도 함께 하고자 했던 인간이기에 그 존재는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소중히 여기고 주변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


그런데 저는 이런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신은 아마 과거에 자기가 했었던 선택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인간을 너무나 똑똑하게 지어내신 나머지,

 그들은 끊임없이 무기를 개발해 바다와 산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들을 지구 도처에서 행하고 있다. 각종 화학물로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동식물을 멸종하게 하기도 한다. 지구를 넘어 우주를 정복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구타하며 잔인한 공격으로 비인간적인 처사를 서슴없이 행하고 있는데 신은 과연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보고자 했던 마음에 후회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 더 많은 자비와 은총을 달라고 빌고 있는 현실이 과연 맞는 것일까?

인간이 그럴 자격이 있을까?'


아직도 내 마음은 성당이라는 종교적 장소에서 평화를 찾기에는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편할지언정, 다른 많은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로 마음의 안식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성가를 부르고 오르간을 최선을 대해 연주하였습니다.

세상에 아프고 힘든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다른 한쪽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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