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최근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낸 학교 선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호스피스 병동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암투병 중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친구는 너무 놀라 친구들과 함께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 다녀왔다. 그 선배는 모두에게 잠 잘 자고 건강 챙기라는 당부를 했다. 그러면서 "난 늘 계획을 세우느라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암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무 계획도 세울 수가 없었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선배와 인사를 나누고 온 친구는 나에게 "계획을 세우는 것도 사실 행복한 일이었네..."라며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에 읽었던 에세이가 떠올랐다. 글쓴이가 오만가지 자잘한 걱정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다 한 밤중 고민에 빠졌다. 어릴 땐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은 이렇게 걱정 인형이 된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중년에 접어든 글쓴이는 20대 시절 첫 결혼을 떠올렸다. 당시 글쓴이는 결혼 직후 배우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말았고, 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야 했는데, 그녀는 틈만 나면 병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땐 죽음이라는 큰 공포와 위기 때문에 자잘한 걱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는 점도 떠올렸다. 글쓴이는 사소한 걱정에 잠 못 드는 그날 밤이 실은 행복한 밤이라는 걸 떠올리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계획도 걱정도, 내 상황에 따라 실은 정말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도 경험으로 안다. 내게 크고 작은 위기들이 닥쳐왔을 때 나는 위기에 대처하느라 아니면 그 위기상황에 휩쓸리느라 일상의 소소한 계획도 걱정도 어느새 저 멀리로 밀어젖혀두게 된다. 하지만 위기상황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금세 그땐 간절히 바랐던 소소한 계획이나 걱정이 다시 부담으로 느껴지곤 한다. 오늘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걱정과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계획이, 훗날 내게 한 차례 파도처럼 위기가 찾아왔을 때, 실은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상될 것이라는 걸 가끔 떠올린다면, 오늘을 짓누르는 무게가 조금 가벼워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