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쿠폰 만료 기간을 연장해 주었다. 이쯤이면 추워질 법도 한데 이삼일 정도 겨울 코트를 꺼내 입을까 고민하도록 아침저녁으로 춥다가 다시 화창한 가을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내어주고 있다.
다음 주 김장을 앞두고 있어 이번 주 토요일 그동안 너무나 가고 싶었던 원주 뮤지엄산을 다녀왔다. 이제는 어디 가기 전 스케줄을 물어봐야 할 정도로 비협조적인 된 두 아들은 미련 없이 두고 가기로 했다. 이제는 초등학교 4학년, 중 1이라 아침밥만 먹여 놓으면 토요일 하루는 아침부터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엄마를 찾지 않고 잘 지낸다. 또 주변에 사시는 친정어머니께 도움도 요청해 놓았다.
남편과 10시쯤 출발하여 점심 먹고 1시 반쯤 뮤지엄산에 도착하였다. 몇 번을 가도 또 갈만하다는 지인들의 말처럼 자작나무길을 걷는 것, 카페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물멍 하는 것,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 제임스 터렐 전시장을 모르는 일행들과 섞여 홀로 관람한 것(남편은 직업 상 여러 번 관람했다), 창틀 그림자가 비치는 회랑을 걷는 것만으로도 육아나 바쁜 직장생활로 소홀했던 나와 마주칠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오늘 마음속 버킷리스트 하나는 해치운 셈이었다.
원주의 맛집까지 가면 금상첨화였는데 뮤지엄산 가기 전 점심 식사를 하러 12시 반에 갔는데도 -재료 소진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입구에 적혀 있었다. 벌써 밖에도 대기하는 사람이 30여 명은 되는 거 같았다. 이런 맛집은 오픈런을 해도 힘든데 꾸물거리다 늦게 왔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저녁에 혹시 가능하면 먹고 가야겠다 싶어 뮤지엄산을 나오자마자 남편을 재촉하여 5시 40분에 가니 다행히 앞에 대기 8팀 식사 가능선 안에 사뿐히 안착하였다. 1시간여 이후에 온 사람들은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과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까의 나와 같구나 안타까움이 들었다.
나도 사실 mbti가 p라 여행 갈 때 숙소와 유명한 관광지 정도만 알아두고 나머지는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검색해서 가거나 일정도 그날 일어나서 기분 따라가기도 하고 빼기도 하는 등 딱히 계획을 촘촘히 세우는 편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꼭 가봐야 할 맛집이나 카페 등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여동생들이 "거기 가서 그걸 안 먹었어? 또는 거길 안 갔어? 그럼 뭐 하러 갔어?" 같이 농담 섞인 핀잔을 받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덤덤했지만 이것도 마음의 숙제를 하나 쌓는 일이 되고 있었다. (지난해 싱가포르를 다녀왔는데 여차저차해서 칠리크랩을 못 먹고 왔으니 말 다한 것이다. 그때는 크게 먹고 싶지 않았는데 싱가포르에 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래서 이번에 그 맛이 어떻든 먹고 와서 마음의 짐을 덜을 생각이었다. 야채를 넣은 고기말이집인데 세 가지 맛 중 2개가 품절되어 선택권이 없이 주문하였으나 대기하다가 앉았을 때 기쁨과 안도는 다들 느껴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으나 남편이 배부르다고 하는 바람에 1인분만 나눠 먹고 1인분은 포장해 와 결국 아들에게 맛 보일 수는 있었다.
(고기구이를 포장할 생각은 못했는데 남편이 못 먹는 바람에 발상의 전환) 남편은 줄 서서 기다릴 정도의 맛은 아니라고 했으나 뮤지엄산에 맛집까지 클리어했으니 기분이 좋았고 마음속에 버킷리스틀 하나 지운 셈이다.
평소 정확하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옆 동료가 11월 초에 이사를 하였다. 집을 깨끗하게 해 놓아 세입자를 구하는 것과 더불어 이사 준비를 위해 매 주말에도 정리의 나날들이었다고 한다. 세입자를 한동안 못 구해 걱정이었다고 하나 부동산 관계자분이 와서 집을 깨끗하게 해 놓으셔서 그 점이 집 안 나가는 원인은 아니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아이가 없어 짐은 적은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삿짐 총량에도 등급이 있는데 다음 단계의 총무게로 넘어가면 70만 원을 더 내야 하므로 줄이고 또 줄였다고 한다.
우리 집도 올해 초 3월 오래 숙원이었던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2026년 4월 이후 입주 예정이다. 아이들 방을 각자 주고 우리 부부의 서재도 생기는 것이다. 아직은 실감이 안 나지만 이제 이사 카운드 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성격이 옆 동료처럼 버려야 할 것과 남겨 둬야 할 것에 판단이 빠르면 좋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 사람이다.
정리 전문가들은 물건을 정리할 때는 버릴 것, 버리지 말 것, 그리고 보류 중인 것 세 박스를 준비하라는 데 나는 보류 중 박스에 담긴 물건이 제일 많을 것 같다. 라디오 사연에서도 하루종일 정리했는데 버릴 것으로 운동복 하나 넣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올해 남편에게 잔소리도 하며 나 스스로도 다짐하는 게 있다. 먹는 것,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물건은 더 들이지 말자는 것이다.
남편은 평소 알*같은 사이트를 통해 소소한 물건 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장난감이나 냉장고 고리 자석, 이어폰 등 잊을만할 때쯤 영문으로 적힌 배송이 하나 둘 도착한다. 몇 달 전에는 사달라고도 안 한 싱크대 수세미 거치대가 떡하니 걸려있어 나름 생각해 준거구나 하고 아무 말 없이 사용했다. 그런데 사용할수록 거치대가 너무 커서 설거지할 때 불편했고 물 때가 껴서 이것 또한 설거지가 추가되었다.
며칠 전 부엌 관련 물건을 내가 살 테니 관여하지 마라 그리고 더 이상 이사 전에 물건을 들이지 말자 10여분 정도 설교를 한 거 같다. 그리고 나도 이 집에서 이불 한 개라도 더 사지 않겠다. 선언했다. 이럴 때 남편이 무기로 말하는 것은 당신 옷....이다. 사실 이 옷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트렌드에 민감하게 맞춰 입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해 지나면 또 요즘 유행하는 옷,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옷이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는 게 여자들 아닌가?
그래도 옆동료처럼 깔끔하고 정리를 잘하는 사람도 고분군투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지금부터 정리에 들어가야 할 거 같다. 시어머니도 너희 집은 이사 갈 때 몇 트럭 되겠다 농담 섞인 말이나 친정엄마의 지금부터 조금씩 정리해 두라는 조심스럽지만 뼈 있는 충고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계획된 여유를 누리려면.
이사 가는 날 여유롭게 집 안을 둘러보고 그동안 고마웠다며 벽이라도 쓰다듬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면 지금부터 안 사고 버리고 정리를 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사 며칠 전에는 이 집에서의 추억 정도는 떠올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리라 다짐이리라.
아침마다 sbs 개그맨 김영철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고 가는데 정리 전문가에게 누가 아이들 일기장은 못 버리겠다고 하니 "추억도 버리세요."라고 해서 진행자와 함께 운전대를 잡고 웃은 적이 있다.
너무 극단적 아닌가 싶은데 이런 추억정리가 힘든 분들이 나를 포함 적지 않은 듯하다. 친정엄마가 아시는 분이 아이들이 모두 출가했는데도 집에 짐이 너무 많아 가보니 아이들 교과서도 추억이라고 안 버리셨단다.
정리 전문가들은 이럴 때는 사진을 찍어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한 TV집정리 프로그램을 보니 대형결혼 액자도 애물단지가 되었을 때 사진을 찍은 후 아쉽더라도 내놓도록 했다. 추억은 깊게 부피는 가볍게 간직하도록.
며칠 전 문뜩 내가 만약 내일 당장 잠에서 깨지 못한다면 직장에 나의 많은 흔적들 그리고 우리 집에 그 많은 물건들은 누가 다 정리하나라는 생각이 드니 살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호텔을 좋아하는 게 뭘까? 물론 고급스러운 내부도 한몫하지만 바로 생활감이 없이 깔끔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호텔에 가끔 묵으면 집이 이 호텔처럼 깔끔하게 치워져있었으면 한다. 휴가 때 고급호텔에 며칠 묵다 돌아오면 집만큼 편한 곳은 없으나 호박마차에서 내린 신데렐라처럼 또 치울 게 한가득인 게 집이다. 하지만 이제 호텔 같은 집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전제 하여 이런 모습을 지향해보고자 한다.
나이 들수록 삶을 정리하며 짐을 줄여나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자녀 또는 짐을 정리할 자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한 거 같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허둥지둥하지 않으려면 또는 누군가를 고생시키지 않으려면 오늘부터 목숨 걸고 정리 생각도 마음도 물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