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짖는다고, 내가 짖을 수는 없다>
살다 보면
모욕감을 느끼는 순간이
불쑥 찾아온다.
예기치 못한 장소,
원치 않던 시간,
누군가의 밉살스러운 말 한마디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땅이 꺼졌으면 싶어진다.
수치심이
목덜미를 죄어온다.
허무맹랑한 말,
터무니없는 모함이 나를 향하지만,
그것이 거짓이고 근거 없다는 걸 아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타인에게는
그 모든 모욕이
그럴듯하게만 보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노새가 지나가다 나를 걷어찼다고 해서,
내가 그 노새를 고소하겠는가?”
그는
인지 능력이 없는 자들을
동물에 비유했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은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개나 돼지,
염소, 소들이 멋대로 행동한다고
문자로 훈계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어리석은 것이다.
무지한 자를 일일이 상대하는 삶 —
철학자는 그 피곤함을 견뎌야 한다.
지적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헛소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인생은 짧다.
시간은 아깝다.
일일이 반응하기엔
쓸모없는 싸움이 너무 많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피곤하다.
누구의 말에
일일이 신경 쓰며 살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을 모욕한 이들을 향해
죽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소서.”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
그 말과 함께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모든 일은 다 이루어지리라.”
그는 허공에 침을 뱉는 비유로
모욕을 돌려주는 방식의
무의미함을 전했다.
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욕은 말한 자에게 돌아간다.
허공에 뱉은 침은
결국 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법이다.
신처럼 살 순 없지만,
신의 태도에서
무너지지 않는 지혜는 배울 수 있다.
현대인은
모욕을 견디기 어렵다면
법적 절차에 기대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 역시
시간과 에너지를 앗아갈 뿐.
결국 얻는 건 거의 없다.
복수는 불가능하고,
사생결단의 결투도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사람이 개를 물 수는 없다.”
정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강의 중에도
나는 이 비유를 자주 쓴다.
경멸, 분노, 억울함 —
모두 본능적 감정이다.
그러나
모욕 앞에서는
분별력 있는 사람조차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감정적 대립은
삶을 소진시킬 뿐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면,
이들과 관계를 맺은
내 어리석음을 돌아봐야 한다.
개 조심은
사람이 해야 한다.
개가 사람을 조심하진 않는다.
개가 짖으면
피해서 가는 게 상책이다.
짖는 개에게
내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
작가 소개
경국현,
부동산학 박사. 백혈병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죽을 뻔하고, 철학에 빠졌다』 화, 수, 목, 연재 중.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신과의 긴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