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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24. 부서진 순례길 표지석 (4월 28일 금)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레디고스 Ledigos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Bercianos del real Camino      

  출발 준비를 마치고, 택배 보내는 배낭을 지정된 장소에 두려니, 문이 잠겨있어 난감했다. 순례길 초기만 해도 이처럼 예상을 벗어나거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몸이 긴장되고 화가 났었다. 그러나 오늘은 감정이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마음 편하게 남편이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출발 시간이 지체되었고, 추운 데서 잠시 떨며 기다리긴 했지만, 배낭은 다음 목적지로 잘 보내졌다.  

    

  지역에 따라, 순례길 안내표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안내표시가 많고 알아보기 쉬운 동네, 띄엄띄엄 있어서 헷갈리는 마을, 심지어 화살표 방향을 반대로 그린 곳도 있었다. 

  어제 묵었던 레디고스부터 순례길 표시가 거의 없었다. 길이 일직선이라 방향을 잃을 가능성은 없지만, 순례길 표시가 하나도 없어 이상했다. 그런데 길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고 근처에는 순례길 표시가 그려져 있는 표지석이 부서진 채 나동그라져 있다. 이렇게 부서진 돌은 사하군까지 10km 이상 계속되었다. 

  누군가 길에서 순례길 표지석을 뽑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걸 부순 사람은 누구였을까? 남편은, 농부가 트랙터를 자유롭게 몰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순례길 표지석을 뽑아 던졌을 거로 추측했다. 그럴듯한 추측 같다. 순례자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뽑히고 부서져 있는 순례길 표지석은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알베르게를 예약 없이 선착순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번 순례길에서 우리는 다음 날 갈 알베르게 대부분을 예약하고 이용했다. 순례자가 많아지며 예약은 보편화되고 순례길 문화도 바뀌는 중인 듯하다. 

  내일 가려는 지역 공립 알베르게는 운영하지 않고, 사립 알베르게는 예약이 이미 다 찼다. 우리는 내일 숙소가 정해지지 않아 마음이 심란했다. 

  내일 숙소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생각하기로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사실 걷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은 거리가 383km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300대로 떨어진 숫자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차도와 나란하게 걷는 길이지만 자동차가 많지 않아 생각보다 덜 피곤했다. 대신 감동적인 풍경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전 10시인데 해는 벌써 뜨거웠고 기온이 올라가니 걷기 점점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며 쨍쨍하던 해가 사라지고 바람이 불더니 잠시 후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비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갑자기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오늘 목적지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도 작은 동네이고 무너져 내리는 빈집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여기도 순례자들 덕분에 경제가 겨우 돌아갈 것 같았다. 

  알베르게(Santa Clara Pilgrims Hostel) 체크인하고 내일 숙소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원래 계획보다 걷는 거리를 줄여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지만, 문제는 또 있다. 우리 핸드폰 e-심이 전화 통화는 안 되고 데이터만 쓸 수 있는데 내일 머물 알베르게를 문자나 메일로 예약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알베르게 전화번호를 주며 예약을 부탁했다. 빈 침대가 있었는지 예약했다는 연락이 바로 왔다. 내일 갈 숙소가 정해지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급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아들이라는 지원군이 있어 든든하다.     

  숙소를 해결하니 허기가 몰려왔다. 어제 가게조차 없던 지역에서 머물러 먹거리를 못 사서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다. 브레이크타임이지만 순례자를 위해 영업하는 식당이 있어 얼른 달려갔다. 밥을 사 먹고 배가 부르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이렇게 순례길 또 하루가 지나간다.     

 

순례길에서 자주 보이는 십자가와 오래된 다리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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