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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32. 매일 일어나는 새로운 해프닝 (5월 6일 토)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폰페라다 Ponferrada ~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

 

  어제 묵었던 구이아나 호스텔(Guiana hostel) 알베르게는 침대가 있는 곳과 화장실, 세면대, 샤워장, 사물함이 있는 공간 사이에 문이 있어 두 공간이 분리돼 새벽에 출발할 때 씻고 준비하기 편했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넓은 식당에서 우리가 준비한 아침을 편하게 먹었다. 미리 주문하면 아침 식사도 제공되는데 식사를 준비하던 직원은 맛보라며 우리에게 빵을 주었다. 우리가 사용한 컵도 자기가 씻을 테니 놔두라고 했다. 그 직원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성당과 광장 등 구시가지를 통과하여 시 외곽을 향해 걸었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동쪽을 보니 붉은 하늘이 구름, 해, 나무와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으로 보였다. 근처 붉은빛을 받은 성모 마리아상도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 앞에서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나는 고어텍스 바람막이를 입어 몸은 괜찮은데 바지가 홀딱 젖었다. 남편은 판초를 입었지만, 안에 매고 있던 배낭까지 젖었다.

  몇 시간 쏟아부은 후 비는 그쳤다. 비가 그치니 초록색 풀들이 더 싱그럽게 살아났다. 강을 지나 완만한 산을 오르니 동화책에 나올 듯한 예쁜 집이 많이 보였다.     

  포도밭 규모는 동쪽 지역보다 작지만, 포도나무에는 앙증맞은 포도 알갱이들이 달렸다. 순례길 초기 싹이 나는 걸 보며 걷기 시작했는데 벌써 한 달이 흘렀고 열매가 맺혔다. 장미꽃도 한창이고, 비가 갠 후 풍경은 너무 예뻐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가 내린 후 풍경은 너무 예뻐서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오늘 목적지 비야프란카 델 비에르소 공립 알베르게는 침대 수가 많아, 선착순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며 남편은 예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정문에 알베르게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남편은 배낭을 이곳으로 보냈다는데 배낭 행방이 묘연했다. 또 오늘 어디에서 자야 할지, 순간 막막함이 밀려왔다.

  남편은 배낭 택배기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우리 배낭이 있는 알베르게 위치가 표시된 사진을 받았다. 사진을 보고 찾아간 곳이, 연기자 유해진이 나왔던 ‘스페인 하숙’을 촬영했던 ‘산 니콜라스 엘 레알 호스텔’ 알베르게였다.

  체크인하고 침대를 배정받은 후 택배 보관 장소로 갔다. 배달된 많은 배낭 중에 우리 배낭은 안 보였다. 세세함이 떨어지는 남편은 택배 기사에게 받은 사진을 대충 보며 그 알베르게라고 한 거였다.

  남편은 배낭을 찾아오겠다며 나갔다.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고 문자 답도 없어 나는 애가 탔다. 남편은 돌아오는 길에 지도를 또 대충 보고, 좁고 복잡한 골목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이 동네를 헤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단다. 온종일 걷고, 우리 둘의 짐이 몽땅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온 동네를 헤매느라 고생한 남편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시간이 늦어져 배고픈 우리는 샤워와 짐 정리를 빠르게 하고 바로 앞 광장에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는 커다란 수도원 일부다. 나머지 공간은 호텔로 이용되는데 호텔과 알베르게는 같은 건물이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딴 판이다. ‘스페인 하숙’을 촬영했던 곳은 건물 뒤쪽인데 모두 잠겨있고 마당은 방치되어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하다.

  알베르게 방에서는 와이파이도 안 되고 샤워장과 화장실이 남녀 구분 없어 불편하다. 그래도 배낭을 무사히 찾았고, 일회용이 아닌 깨끗하고 하얀 면 시트가 깔린 일 층 침대가 있는 쉴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 수도원 방이지만 깨끗한 면 침대 커버와 일 층 침대라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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