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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솜 Feb 25. 2024

나의 슬픔을 미처 너는 모르게 살짝 감췄어.

다정한 나의 변덕에 대하여

나는 점 하나를 찍고 목표로 두며 달려가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무언가를 하다 보면 또 다른 우연한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었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면 그래도 다른 청춘들 보다는 조금 더 버티고,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 이렇게 조금 더 만족하고 발전하는 삶이 근근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영화를 전공했다. 대학생 때 나는 미국에서의 학사 졸업이 오롯한 목표였다. 조기 졸업을 이뤄냈지만, 그 당시 나는 그저 ‘영화’라는 필드에 수박 껍데기 정도 되는 깊이에서 영화를 바라보며 일하고 싶다는 생각만을 막연히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영화에 그저 적당한 온도와 열정,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론이나 에세이는 쓸 수 있다. 하지만 몇 국제 영화제 인턴, 자원봉사 활동, 그리고 작은 해외 배급사의 면접을 겪으며, 나의 이 소박한 열정으로는 영화라는 필드에 발을 내밀기 쉽지 않다고 느꼈다. 자기 객관화가 뚜렷한 편이다.


그렇다고 새우깡만 먹으면서 약간의 결핍과 가난, 워라밸의 붕괴를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그 정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한 청춘은 아니었다. 지금도 전공과는 무관한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딱히 후회가 있진 않다. 인생은 원래 헛되고, 나는 나의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인생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때론 의미가 흐릿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계속 하나의 별을 쫓는 자들과 새로운 별자리를 그려가는 자들에겐 각각 장단점이 있다. 골퍼로서 하나의 종목에 매진한 내 동생은 중학교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계속 ‘골프’라는 필드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노력하고, 능력과 한계를 시험하고, 더 깊게 공부하고 매진하고 있다. 하나의 점을 찍고, 그 삶을 쌓아가는 사람들은 참 촘촘하고 켜켜하며 때론 단단하다. 나는 졸업 후 미국의 한 치과 프런트에서 잠시 알바를 하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의 추천으로 미국의 한 교육회사에서 몇 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또 다른 근무를 하고 있다.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낸 이 기회들을 난 딱히 거부하진 않고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했을 때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 길이 새로운 길이어도 걸어가는 편이다.


누군가는 나의 여유가 부럽다거나 편해 보인다고 했다. 나도 새로운 필드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이나 한계, 스트레스는 항상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의 불행, 불운 혹은 슬픔을 다 흘리진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가장 가까운 누구에게도 나의 오롯한 슬픔을 보이고 싶진 않다. 어차피 너는 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론 나의 징징거림이 너의 하루를 피곤하게 할 것 같아서.


나의 슬픔을 다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내 불행을 자랑할 필요나 나의 힘듦을 입증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그냥 사람들은 서로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넌 인생 편하게 산다고 하면,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있는거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웬만하면 우리 각자의 슬픔은 살짝 감추고, 가볍고 편하게 지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우리의 이 다정한 우울은 또 지나가고 가끔 정말 숨 쉬고 있는 그 자체가 감사할 때도 있으니.


내가 걸어간 점이 나의 별자리가 아닐까. 하늘은 넓고 삶은 다양하니. 내가 걸어간 이 길이 나의 별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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