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경 May 06. 2024

엄마의 구순 잔치 : 빛나는 우리 가족


한 달 전, 간만에 오빠의 전화 한 통이 나의 일상을 멈추게 했다. 2024년 4월 27일에 엄마 구순 잔치를 한다며 모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엄마가 벌써 많이 늙으셨구나!’라는 생각에 당연히 해드려야 한다고 여겼다.     




몸이 점점 무너져 가는 사이나를 향한 가족의 무관심에 마음이 아팠다. 지금 나는 골수암일 수 있다는 판정에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이런 나에게 엄마나 오빠는 내 상태가 어떤지 안부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나에 대한 배려는 있는 걸까매일 이렇게 병원 다니며 하루하루 힘들어하는 나에게는 전화 한 통 없으면서 지금 엄마 구순 잔치에 오라고? 엄마나 가족들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서운함이 가득했지만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오빠에겐 표현하지 못하고 몸이 괜찮으면 가겠다는 했다. 큰언니의 전화에 나는 속상한 마음을 내뱉듯이,     


“언니! 자식이 4번의 암 수술을 하고 이렇게 매일 병원에서 사는데 엄마는 구순 잔치를 하고 싶으시데? 아무리 늙고 힘드시다지만, 아픈 자식은 신경이 안 쓰이나 봐?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오빠도 전화해서 괜찮냐는 말은 한 번도 물어보지도 않더라고. 우리가 정말 가족이 맞는 거야? 기대도 안 하지만 너무 하네! 그때 생리하면 난 못 가! 가능하면 가겠지만, 상태 보고 움직일게안 가자니 엄마도 마지막일 거 같고.”라며 마음 한 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이번 주 검사에서 골수암일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정신이 없었다. 미칠 거 같았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큰 병원부터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골수암의 증상이 나와 맞지 않는다며 오진이었으면 하는 생각과 오진이 아니어도 엄마의 마지막 구순 잔치는 가야 한다는 마음에 본병원은 다음 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잔치 당일, 강동구의 한방병원에 입원한 나는 인천 주안역에 있는 뷔페식당까지 전철을 타고 가야 했다아들딸과 종로 3가 1호선 갈아타는 곳에서 3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남편을 일하고 시간 맞춰 오기로 했다.   

  

아픈 다리를 친인척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다리를 아껴야 했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지 않은 나는 종로 3가에서 1호선 인천행으로 갈아타는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아들이 엄마!” 하며 뒤에서 나의 팔을 잡는 순간내 마음에 밀려오는 행복감과 든든한 보디가드가 불안한 나를 웃음으로 바꿔주었다. 아들의 반가운 목소리와 손길은 나의 모든 고통을 멈춘 듯 사라지게 했다.     


아들딸과 함께 주안까지 가는 동안 내가 자식을 잘 키웠구나!’라는 만족감이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나는 오는 친지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그들에게 우리 가족을 소개했다. 행복해 보이는 우리 가족이 자랑스러웠다.     


짜증 내지 않고 모르는 분들이지만, 엄마를 따라 함께 인사해 주는 아들딸이 대견했다. 친지 어른분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딸이 일류대는 아니어도 나름 자랑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엄마가 아파도 아이들은 잘 컸네아이들이 일찍 철 들었구나네가 복이 많다.”라며 좋은 말씀도 해주셨다. 자랑스럽고 든든한 내 가족이 남들 눈에도 부러움에 대상이 된다는 게 기분 좋았다오늘은 남편 또한 늦지 않게 와서 가족들과 웃으며 자리를 빛내주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이 가난했고, 부모가 제대로 된 교육을 가르치지 않은 걸 친지들은 알고 있다. 특히 나는 막내로 뭔가 항상 모자라고 부족한 아이로 인식되었다어렸을 때부터 옷을 입혀놔도 이상하고 뭘 해도 잘하는 게 없는 천덕꾸러기 아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친척분들은 지금의 내 모습에 놀라움을 표현했다. 잘 커 준 아들딸과 젊잖은 남편아프다는 내 모습은 건강한 웬만한 중년여성보다 젊어 보였다밝게 웃는 여유로운 뜻밖의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릴 때,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은 딸과 아들 2명이 있었다. 나와 나이 차가 거의 없었다. 그들 마음속엔 항상 나를 무시함이 깔려있었다이름도 없는 대학에 갔음에도 자신들은 대학생이고 나는 실업계를 졸업하고 직장 다니는 고졸에 불과했던 거다.     


내가 대기업에 다니고 외국인 회사에 다녀도 그들은 나를 밑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우리 부모님의 잘못도 크다.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항상 잘못만 지적했고남들에게도 단점만 이야기했다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을 누군들 이쁘게 봐주겠는가?


특히 그 집 딸은 작은엄마가 공주처럼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한 살 차이 나는 언니는 나의 변화된 모습에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편하게 잘 먹고 산다며 얼버무렸다. 그 언니는 계속 물었다. 그냥저냥 먹고 산다고 해도 끈질기게 알고 싶어했다.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때당신들이 나를 무시한 거 알지만지금은 내가 훨씬 낫군요.’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모든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세상에 무서울 게 없으셨던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와 답답한 엄마가난과 불안에 시달리며 사는 우리 식구들을 무시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큰아들이라 동생들을 챙겼지만, 항상 술과 폭력적인 성격으로 모든 점수를 잃었다.      


우리 집은 아들 하나만 대학까지 보내고 딸 3명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 벌어서 대학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도 우리 집안에서는 가장 좋은 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다고 내가 잘 살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거 같았다. 거기다 암으로 투병한 지 11년째이다. 남편도 얼마 전까지 일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들은 행복해 보이는 내 가정과 멀쩡한 내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질투를 보였다.     




“언니! 나 돈 잘 벌어. 많지는 않아도 우리 식구 사는 데는 문제 없어.”


“뭐 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데? 아픈데 일은 계속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뭔 일을 하겠어?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집에 가면 아들딸이 밥해줘야 해?”


“그런데 어떻게 돈을 벌어?”라며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그만 웃었다.     


“언니! 얼마 전에도 코인 팔아서 1억 8천 수익 챙겼어. 주식에서도 몇억 벌고, 지금 주식은 다 물려있지만, 암튼 이제는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에 들어갔어. 일 년에 최소 1-2억은 벌어”     


“네가 그런데 재주가 있구나? 나는 전혀 못 하는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몸에 찬 금과 행복해 보이는 우리 가정을 부러워하는 모습에 내가 열심히 잘살았다는 자신감에 뿌듯했다아니 어렸을 때부터 눌려왔던 상실된 자존감을 모두 이긴 기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에게 비록 내 몸은 고되고 힘들어도 행복한 가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아픈 모습과 다리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나의 행복을 마음껏 자랑했다.     




잔치가 끝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내 몸과 다리는 피로로 무겁고 지쳐있었지만내 마음만큼은 행복과 만족으로 가득 찼다. 오늘은 삶의 아이러니이자, 고통 속에서도 내 인생이 잘살았다는 것을 확인한 날이었다.      


나의 삶을 뒤돌아보면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었지만가족과 함께한 이 하루가 내 삶에 큰 만족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내가 겪은 고난이 전혀 헛되지 않았음을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의 사랑이 나를 지탱해 줄 수 있음을 깨닫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20240428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의 웃음 : 금 팔지와 언니의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