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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May 09. 2024

‘골수암’ 진단이 주는 깨달음 : 딸과의 달콤한 약속


기나긴 세월 동안 흰색의 병원 벽은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나에게 부담이었다. 투명한 수액이 차곡차곡 내 정맥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갑작스레 터지는 울음소리도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병원에서 투병 중에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곧 나도 저렇게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런 나에게 골수암진단은 무서운 공포를 심어주었다. 늘 생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마지막 암 수술이 더 이상 문제없기만을 기도했다.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날만 손꼽고 있던 나에게 골수암이란 청천벽력과 같은 단어였다.

     



어린 시절 가난과 학대에서 벗어나 이제 제대로 된 가정을 꾸미며 경제적 어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되어 살만하다. 하지만 “암”이라는 사형선고가 수시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골수암은 유방암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이상의 고통을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골수암 환자가 겪는 고통까지?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여기서 내 인생은 끝나는 걸까? 골수암이면 난 약을 먹고 편한 죽음을 선택하는 게 옳지 않을까? 고통으로 인한 추한 모습으로 목숨에 연연하는 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살아야 하나?’     


그러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 생각났다.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은 돈일지 몰라도 나의 젊음을 돈 버는 데 모든 시간을 소모했다. 힘들게 번 돈이 아까워서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지금 있는 돈과 내가 들어놓은 보험금만 받아서 살아도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할 거 같았다.     


돈도 써본 사람이 쓴다고 모으기만 했지 제대로 써보지 못한 나는 지금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딸을 보면서 ‘나는 왜 딸처럼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해보지 못했을까?’라는 미련이 남는다.      




골수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딸과 나는 침대에 누워 상속세를 알아보았다. 현금은 20%, 부동산은 10억이 넘으면 30%라고 딸이 인터넷에서 찾은 금액을 말했다. 부동산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항상 현금만을 주장해 온 나에게 20%는 너무 컸다.     


아까워서 써보지도 못하고 자식에게도 주지 못하고 나라에 몇억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이번에 금값이 많이 올랐다. 곧 조정이 올 것이다. 이때 금을 좀 더 사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활패턴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장소에 가서 힐링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골고루 먹어보기로. 막상 생각을 바꾸고 나니 같이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남들까지 사줄 능력은 안 되고 그렇다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을 빨아들이듯 딸의 따뜻한 눈동자가 나의 불안감을 편안함으로 바꿔주었다. ‘골수암’ 판정받고 근심 찬 내 모습이 싫었는지 집으로 돌아간 딸은 사진을 보내왔다. 지도에 엄청난 별이 박혀있었다.   

   

“엄마! 나랑 별표 다 가야 해!”


“뭐 하는 곳이야?”     


먹는 곳! ㅋㅋ 나 지금 생리 일주일 전이라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러지 뭐. 엄마 퇴원하면 바로 가자.”라고 말하면서도 ‘이런 날이 올까?’라는 불안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깔려있었다.     


“웅. 엄마! 근데 빙수 먹으러 신라 호텔 가는 건 어떤 거 같아?”라는 질문에 몇 년 전, 워커힐 호텔에서 먹은 기억을 생각하며     


별로인데. 맛은 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 누구랑 가기로 했어?”라고 묻자,     


“엄마랑! 나 친구 없어. 친구 사귀기 힘들어. 연락하기도 귀찮고.”라고 나를 배려하며 말하는 딸이 귀엽고 고마웠다.     




앞으로 딸은 나랑 놀아 주겠다고 했다. 신라호텔 빙수도 사주겠다고 했다. 금액을 물어보니 10만 원이 넘었다. 나에게 이런 딸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 딸은 아들 빼고 나하고만 가자고 했다.     


아들 성격이 어디 가는 걸 싫어한다. 항상 내가 꼬셔서 데리고 가야 했다. 가도 왕자처럼 눈치 없이 행동할 때가 많았다. 나야 내 아들이니 웃으면서 좋게 가르칠 수 있지만, 딸은 질색했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아들을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이쁜 딸! 엄마가 퇴원하면 신라호텔에서 빙수와 거기서 파는 샌드위치 쏠게! 아들도 같이 갈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해봐! 엄마가 30만 원 한도에서 맘껏 쏠게.”     


“헐 진짜??? 짱조와!  ㅎㅎㅎㅎ”     


“아들도 데리고 가야지. 세련 돼지게. 우리끼리 다녀오면 아들은 그런 곳 언제 가보니? 우리도 이제 한두 달에 한 번씩 비싸고 좋은데 가서 먹어보자”라고 말하자, 딸은 좋다며 이모콘티를 마구 보냈다.      




‘왜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인생 뭐 있다고? 죽으면 끝인데? 아끼면 똥 된다는데. 오직 나와 내 자식들에게 남겨질 건 추억뿐인데.’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미련한 나에게 하나님이 다시 한번 알려주시는 것 같았다. 진상처럼 살지 말라고.      


더 이상 아끼며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병상에서,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의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다. 내 소중한 아들딸이 웃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자 기쁨이다.




딸이 어제는 논어 과제라며 “엄마가 바라는 효는 뭐야?”라고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소망을 말했다.     


엄마랑 자주 연락하고 같이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즐겁게 사는 거지. 엄마 늙었다고 버리지 말고. 맛난 거 같이 먹으러 좋은 곳 데리고 가고, 같이 여행하고, 이쁜 거 있으면 엄마도 사주고. 아들딸 항상 엄마의 보디가드 해주고.”라며 계속 말하자,     


“왜케 길어? ㅋㅋㅋ”라며 나의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나는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돈을 아끼고 아껴서 무엇을 했는지? 한방에 사기꾼에게 사기당하고. 진정 소중한 것들은 무엇인지? 나는 이제 돈의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살기로 했다.      


오늘 유튜브에서 우연히 최상위권의 금융자산을 보았다. 50대가 5억 8,910만 원이었다. 내가 여기에 속해 있었다. 부동산은 없어도 내 금융자산이 최상위권 일 줄은 몰랐다.      


우리 집에선 나만 최상위권이었다. 아무리 돈 가치가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마음껏 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 쓸 수 없는 내 돈을 마지막까지 의미 있게 사용하기로.      




병원에 있는 시간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모두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제는 아들딸과 빙수 먹으러 신라호텔도 가고, 호캉스도 하면서 남들 하는 거 다 하며 살아보려고 한다. 일상의 즐거움을 찾아 살 것이다.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행복으로 가득 차길 바라며,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기를 소망한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눈물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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