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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Sep 02. 2024

잃어버린 자유와 작별의 외출 : 희망의 조각을 찾아..

   

병원에만 있었던 나에게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가는 외출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전, 딸과 함께 종로에 다녀왔다.      


2달 전, 대학 병원에서 “뼈 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팔다리가 불편한 나는 혼자 자유로운 외출이 불가능했다. 더 나빠지기 전에 개강을 앞둔 딸에게 종로에 있는 거래처를 인계해 주어야 했다. 한때는 그저 일상적이던 단순 외출이 이제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6월의 통증이 시작한 이후,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의 구순 잔치가 나의 마지막 외출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나 홀로 감히 외출을 꿈꾸지 못한다. 혹여 넘어지거나 타인과 부딪치기라도 하면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지금 나는 병원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오직 내 몸과 마음의 회복만을 위해 치료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병원 밖도 혼자는 나가지 않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가끔씩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번에 종로에 간 이유는 마사지 통증기기에 금도금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내 치료에 꼭 필요한 기기로 잦은 도금이 필요했다. 다행히 종로에 계신 은 공방 사장님과의 오래된 인연으로 그분은 나에게 금도금 전문점을 소개해 주셨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직접 가서 인사도 하고, 물건도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딸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오래 걸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린 딸이 어른들을 만나며 내 일을 대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사람 만나고, 새로운 거 배우기 좋아하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에 놓였다. 팔다리의 부자연스러움이 나이 삶을 속박하고, 그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어른들이 흔히 말씀하시던 ‘뒷방 늙은이’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하에 위치한 공방에 들어갈 때만 해도 천천히 혼자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난간이 없는 계단을 올라올 때는 상황이 달랐다. 딸에게 부축을 요청하며 올라오는 동안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공방 사장님이 보실까 두려웠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었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딸에게 그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금을 살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출입문을 찾으며 나를 부축하는 딸에게 고마우면서도 속으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간이 5시를 향해가자, 마음이 급해졌다. 차가 막히면 운전 시간이 길어진다. 금을 빨리 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차는 막히기 시작했다. 파주에서 집으로, 집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파주병원으로. 마지막 도착지까지의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운전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는 밀려왔고, 체력이 점점 약해져 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문득 ‘이게 마지막 외출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집에 도착하자, 딸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목살을 정성스럽게 구웠다. 목살과 묵은지로 차려진 저녁상 앞에서 딸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식사 후 아무 말 없이 식탁을 정리하는 아들의 모습에서는 또 다른 위안을 얻었다. 이처럼 나의 귀한 아들딸들은 엄마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리가 점점 불편해 오는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7시가 되자,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 발 고주파 치료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가 굳어진 다리와 팔의 근육을 풀어주어야 했다.     


혼자 운전하며 병원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1년 전 이맘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아무 걱정 없이 딸과 함께 댄스학원을 다녔으며, 마지막 여행인지도 모르고 예전 직장동료 언니들과 여수로 놀러도 갔었다. 당연한 일상이라고 여겼던 1년 전 행복했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이젠 나에게는 여행은 고사하고 가까운 시내 외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심한 현실이 찾아왔다. ‘아! 왜 자꾸 이런 생각들이 드는 걸까? 분명 나아질 수 있을 텐데?’라며 나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오는 우울함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마음이 나를 미치게 할 때가 많다. 생리 전후나 배란기 때는 더욱 심해진다. 좁은 병실에 갇혀 창밖만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씩 팔의 움직임이 좋아지는 모습에 큰 희망을 기대하는 나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변덕쟁이 김인경.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6월의 심한 통증으로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할 때,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이때도 딸은 간단하게 기록이라도 남기라며 항상 격려해 주었다.     

지금은 이렇게 매일 조금씩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나.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나 자신도 장담하지 못한다.  

   

딸은 내게 2년 정도 고생하면 다 나을 거라며, 그때가 되면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다. 부디 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한다.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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