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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Sep 25. 2024

사랑과 외로움 : 투병 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깨달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나는 그 진리를 곱씹으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좋아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처럼 부드럽고 진심 어린 칭찬과 관심은 누구에게나 최고의 선물이다.     




매일 혼자 병실에서 치료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딸은 지루하고 힘든 치료 시간을 즐겁게 극복하라고 넷플릭스를 병실 TV에 연결해 주었다.      


고주파나 파라핀 치료처럼 긴 시간을 요구하는 순간, 넷플릭스는 그야말로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최근 나온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며,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양한 인물의 삶을 엿보고, 젊은이들의 사랑에 감동하곤 한다.      


물론 영화 속이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나는 문득문득 생각에 잠긴다. ‘정말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나는 사랑을 위해 결혼했고, 누구 못지않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꿈꾸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깨졌을까? 나는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안 되는 걸까?    

 

드라마 속 사랑받는 여성들을 보면, 그들은 마치 천사처럼 배려심이 깊고, 재치가 넘치면서도 상대를 먼저 생각한다. 아니면 남성미가 넘치면서도 정의롭다거나. 그렇다면 나는 그녀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사람일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잘못된 가치관을 따라 살았다. 철이 들면서 나는 최대한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세운 현명함과 지혜로움이 어쩌면 나만의 잘못된 기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초년기 시절 가족들에게 있어 나는 항상 부족하고 모자란 아이였다. 이런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나의 잘남’을 내세우고, 이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건 아닐까?     




어제 마지막 회였던 “미녀와 순정남”이라는 드라마에서 재활하며 힘들어하는 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순정남을 보면서,      


‘정말 저런 남자가 있을까? 미녀의 어떤 점이 저 남자를 저렇게까지 만들었을까? 저 남자의 천성일까? 나는 왜 저런 복을 타고나지 못했을까? 평생 사랑만 갈구하다 끝나는 걸까?’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암이라는 병으로 11년간 투병하면서 항상 마음속에서 갈구하는 건 남편의 사랑이었다. 병원에서 주말만 되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주길 기다렸다. 오직 나의 기다림일 뿐, 남편은 아이들과 집에 있으면서도 오지 않았다.     


외로움에 지친 나는 병원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고, 퇴원하면 밖으로만 돌았다. 남편에게 모든 걸 포기하고 밖에서 사랑을 찾던 나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집이 좋다며 항상 집에만 있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우리 이쁘니 멋쟁이는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친구들과 주말엔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면 어때?”     


“엄마!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기가 딸려. 가끔 친한 친구와 놀고 오는 건 좋지만, 매주 만나는 건 스트레스야. 학교에서 같이 밥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라며 딸이 말하자,     


“친구들은 학교에서 매일 보는데 주말까지 만날 필요가 있을까?”라는 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나와 다른 아들딸을 보게 되었다. 남편의 내성적인 면을 닮은 거다. 집에 있는 그들은 언제나 행복해했다.    

 



딸은 나에게 혼자 노는 법을 배워보라며 책 읽기와 글쓰기를 권유했다. 처음엔 아는 분의 권유도 있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활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에게 집착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더 이상 외로움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긴 치료 시간 덕에 글 쓸 시간도 없을 정도다. 타인과의 시간이 적어지면서 스트레스도 점점 줄었다.     


글 속에서 만나는 작가님과의 대화도 즐거움이 커져만 갔다. 점점 변화하는 나를 발견하며 깨닫게 되었다. 생각보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6월에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심한 통증과 고통 속에서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정리했다. 죽음만큼 아프면서 얼마나 내가 어리석게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자, 죽음의 그림자가 나에게 밀려왔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외로움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딸은 학교에서 언니는 사업장에서 울며 전화해도 나의 아픔을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죽음은 오직 나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길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사적인 만남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의 불편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직 아들딸만 곁에서 나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도 많은 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에서도 나를 아는 분들과 목사님, 구역 식구들이 돌아가며 기도해 주신다는 연락이 왔다. 브런치 작가님들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분이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계셨다.      


평상시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인연이 있는 분들도 나를 위해 마음을 모아주었다. 뜻밖의 여러 곳에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내가 세상을 아주 잘못 살진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나에게 큰 위안과 삶의 용기를 주었다.      


삶이 나에게 주었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로움에 머물지 않고, 사랑받고 있음을 온전히 느끼며, 내 삶에 작은 기쁨과 웃음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 한다.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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