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추앙을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잔잔한 스토리지만 그 안에 인생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재미있게 봤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미정은 사랑으로는 부족하기에 '추앙'을 할 거라고 말한다. 우리가 쉽게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에도 은근히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과 이기적인 계산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간파한 대사였다. 드라마에서 ‘추앙’은 사랑보다 더 깊이 있고 숭고한 감정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응원만 해주는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넌 뭐든 된다 하면서 응원만 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것도 이 같은 무조건적으로 응원, 즉 '추앙'일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추앙'에 대해 이런 대사도 나온다. 남녀가 연애를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서로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연애하면서도 서로 재고 따지고 비교하고 나보다 잘날까 봐 두려워하고 못날까 봐 창피해한다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미정은 나는 이제 그렇게 공허한 사랑은 그만하겠다고 선언한다. 상대가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주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전적으로 응원만 해주는 그런 '추앙'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다며 고발하듯, 고백하듯 말한다.
엄마로서 마지막 멘트가 아팠다. 부모가 자식에게도 그런 전적인 응원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사실 어린아이는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준다. 남들과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눈이 없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순수한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못 생겼든, 가난하든, 지위가 낮든 일단 내 엄마니까 사랑하고 내 아빠니까 따른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한테 그런 전적인 응원을 못해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은근히 또래 아이들과 비교도 많이 하고 남보다 못날까 봐 두려워하고 남보다 뭐라도 잘나서 우뚝 서기를 기대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내 아이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대로 좋다, 괜찮다 하면서 전적인 응원을 해주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게 된 건 큰 아이 때문이다. 큰 아이는 어릴 때부터 참 맑고 순수했다. 천진난만하고 욕심이 없다 보니 학습적인 부분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늦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말도 좀 느린 편이었고 수셈도 어려워했고 스포츠나 악기 같은 것도 종류별로 시켜봤는데 다 재미없어했다. 뭐든 자기는 잘 못한다며 지레 포기하고 도전하기를 싫어하니 그런 아이를 지켜보고 기다려주기가 많이 불안하고 초조했던 것 같다.
특히, 해외에 사는데 외국어 공부를 싫어하니 걱정이 되었다. 주변에 영어는 물론이고 베트남어도 곧잘 배워 잘하는 아이들도 많으니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었다. 게다가 동생은 뭘 안 가르쳐줘도 눈치로 아는 게 많고 빨리 배우는 거 같아서 그것도 불안했다. 나중에 동생한테마저 열등감을 느낄까 봐, 그럼 그게 상처가 될까 봐 조바심이 많이 났다. 그런다고 작은 아이가 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다. 순진한 형보다 머리가 약삭빠르게 잘 돌아간다는 거지 꾸준히 앉아서 뭔가 배우고 성과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니 엄마로서 개구쟁이 두 아들을 야단치지 않으면서도 가르칠 거 가르쳐가며 문제없이 키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한테 뭐든 가르쳐주고 싶은데 아이들은 하기 싫어하고, 억지로 시키니까 관계만 서로 나빠지는 것 같아서 감정코칭을 배웠다. 감정코칭에서는 아이가 하는 행동의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감정을 더 우선시하라고 그랬다. 그러려면 엄마가 목표를 내려놓고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를 대해야 한다고 그랬다. 그런데 어른으로서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해야 하는 책임은 또 있다. 이 부분에서 서로 모순이 발생한다.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엄마의 목표를 내려 놓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해야 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니 뭘 어쩌라는 말인가. 엄마로서 목표를 내려놓고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의 감정을 수용해 주었는데 막상 아이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행동을 끝까지 하지 않을 때 정말 엄마로서 가장 막막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일단 내가 생각한 바람직한 행동은 힘들어도 뭐가 됐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거였다. 어려워 보인다고 시작도 안 하거나 하기 싫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좀 힘들어해도 어떻게든 앉혀서 수학 연산이 됐든, 영어 파닉스가 됐든 조금씩은 공부를 시켰다. 까불어대는 작은 아이까지 같이 옆에 앉혀서 뭐든 힘들어도 참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태도를 가르쳐주려니 잘 안 됐다. 매일 내 생각만큼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시켜봤다. 하기 싫다고 그래도 악기나 스포츠같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은 것은 달래 가며 시켜보고 낯선 경험이나 새로운 도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봤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청소년이 된 아이를 언제까지 일정시간 붙잡아 놓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겠다는 명목으로 책상 앞에 앉혀 놓는다는 게 이제는 어른 대접받고 싶어 하는 청소년 아들한테 맞지가 않았다. 아이로서는 너무 아이 취급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모욕적일 것 같았다. 아이는 학원은 안 다니고 싶다고 했다. 스포츠나 악기도 더 이상 하기 싫다고 그랬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침 코로나도 온 김에 어차피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게 된 아이에게 모든 권한을 다 주어 보기로 했다. 더 이상 잔소리 하지 않고 일상에 규칙 같은 것도 내려놓고 아이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 볼 수 있도록 물러나주었다.
이때 내가 선택했던 게 ‘추앙’이다. 아이는 이제 컸다. 내가 이리저리 끌고 다닐 나이는 지났다. 자신이 자신의 길을 선택해 나갈 것이다. 내가 기본은 잡아 줬으니 분명 바른 길을 선택하겠지. 이제부터는 네 인생이야. 넌 할 수 있어. 뭐든 될 거야. 언젠가 큰 사람이 되어서 엄마 곁을 떠나겠다고 그러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게. 만약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게. 넌 존재 그 자체로 엄마한테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다 줬으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믿어만 줄게. 이렇게 아이를 믿으며, 내 불안을 다스리며 1~2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아이에게 일체의 잔소리를 멈추고 오로지 마음을 다해 속으로 전적인 응원만을 보내 주었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목소리는 굵어지고 아기 같은 표정은 사라졌다. 스스로 공부하고 게임하는 시간도 알아서 조절한다. 친구들과 약속이 많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운동하고 같이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 성적은 그냥 보통이지만 배우는 거에 흥미를 느끼고 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서 굳이 채근하지 않는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 동안 놓치게 되는 중요한 것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편안한 마음이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이다. 아이는 일상의 편안함을 알고 친구들과 무엇을 해야 즐거운 지 알고 있다. 사소한 것의 소중함도 알고 주변 사람들을 도울 줄도 알고 작은 일로 삐지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이것으로 충분하고 넘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한동안 방 안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많이 불안했는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자기가 먼저 학원을 다녀봐야겠다고 알아보고 자기 일정을 스스로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안심이 된다. 큰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나니 작은 아이가 시작하는 것 같아서 다시 심란해지지만 처음이 아니니 나도 아이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일 한 발자국씩 아이와 멀어지는 일 같다. 출산이라는 이름으로 신체가 떨어지더니 그 후로 매일 아이와 정서적으로 이별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 노릇이 쉽지가 않다. 내 품에서 일일이 챙겨줘야 뭘 할 수 있어 보였던 아이들이 어느새 커서 어설프지만 스스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안심이 안되기도 하고 괜히 섭섭해지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이다.
그래도 내가 아이 사춘기 때 사랑이 아닌 '추앙'을 해 보기로 결심했던 건 좋은 선택이었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는 엄마의 간섭과 잔소리가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이는 저항했고 나는 고민했고, 아마도 더 유능한 방법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으로는 아이와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겠다고 느꼈다.
그때 '추앙'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전적인 응원. 아이의 자아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사춘기 때 내가 아이를 '추앙'할 용기를 내었다는 게 다행스럽다. 드라마에서 미정의 대사처럼 우리는 부모로부터도 전적인 응원을 받아보기가 쉽지 않다. 내 아이가 세상에 드문, 엄마로부터의 전적인 응원을 받아본 아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이런 게 조벽.최성애 교수님이 말씀하신 아이를 '정서적 금수저'로 키우는 게 아닐까? 아이들이 지금처럼 평범하지만 건강한 아이들도 잘 자라주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