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시간
마음을 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마음도 잘 모르겠는데 상대의 마음까지 살피는 건 더 어렵다. 나에게 엄마라는 직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몸만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까지 키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형제를 키우다보니 아이 한 명의 마음만 알아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끼리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큰 숙제다. 이렇게 아이로 하여금 내 마음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게 바로 마음을 키워주는 일인 것 같다.
실제로 두 아이가 투닥거리며 싸울 때 엄마가 그 사이에서 두 아이의 갈등을 중재해주는 건 정말 어렵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두 아이 모두에게 원망과 항의를 듣기 쉽다. 내버려두자니 시끄럽고, 두 아이 모두 만족하는 해결책은 쉽지 않고, 두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려다가 내 마음까지 꼬여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정코칭에서 가르쳐주는 갈등 중재의 기술은 이렇다. 먼저 두 아이 중 더 많이 흥분한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되 상대편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한 명씩 따로 대화를 나눈다.
동생이 너무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까
동생하고 먼저 이야기 좀 할게.
대신 이따가 네 얘기도 충분히 들어줄거야.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겠어?
처음에는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상황과 기분을 물어봐 주면서 공감해준다.
그래,
네가 그런 이유로 그래서 그렇게 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구나.
이렇게 아이 마음을 들어주면 아이가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도와주고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면 엄마도 아이도 방금 무엇 때문에 형제끼리 그렇게 다퉜는지 훨씬 이해가 된다.
그렇게 아이가 충분히 자기 얘기를 한 것 같으면 적당한 시점에 상대도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약간의 힌트를 준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과 지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볼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아이가 자기 마음을 보았던 그 힘으로 상대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볼 수 있다. 상대도 아주 나쁜 의도로 날 화나게 한 게 아니라 무언가 이유가 있었다는 게 납득이 되면 화는 풀리고 기분이 좀 나아진다.
'나도 내 입장이 있었고 내 마음이 있었던 것처럼 상대도 상대의 입장이 있고 상대의 마음이 있어서 그랬구나.'하고 이해가 되는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다.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이런 순간을 만들어주는 게 참 어렵고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이번에 학교 휴일이 길어서 아이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 가족과 함께 다녀왔는데 일행 중 가장 어린 친구네 막내는 이번 여행에 가장 들뜨고 신나 있었다. 모처럼 형, 누나들하고 다 같이 놀러가는 여행이 너무 좋았는지 까불고 장난치고 말썽도 많이 부렸다. 우리집에서는 자기가 막내로서 까불거나 심통부리는 걸 담당해왔던 우리집 둘째가 이번에 팔자에 없는 동생을 경험하면서 고생을 톡톡히 했다. 평소에 자기가 많이 해왔던 모습을 옆집 꼬마를 통해 보니까 그동안 형이 자기 때문에 느꼈던 피곤함과 짜증이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 모양이다.
동생하고 놀아주는 게 힘들지?
동생은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건데
막 매달리고 장난치고 까부니까
정신없고 힘들지?
아이가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생각을 좀 해보는 눈치다. 그런데 큰 아이가 눈치 없이 “거 봐. 나도 지금까지 너때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하면서 작은 아이를 자극한다. 가만히 놔두면 작은 아이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형 마음도 헤아려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큰 아이도 아직 어리다. 인내심이 부족한 것 같다.
내가 기회를 봐서 큰 아이한테 따로 조용히 언질을 주었다. 지금 동생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니까 우리가 조용히 좀 기다려주자고 타일렀다. 큰 아이는 자기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이 시달렸기 때문에 자기도 울컥해서 그러는 거라며 항변했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됐다. 엄마 같아도 정말 그럴 거라고, 그동안 동생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느냐고 큰 아이 마음을 받아주었다. 큰 아이가 지나간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작은 아이가 얼마나 장난이 심하고 자기를 얼마나 많이 화나게 했었는지 고자질하듯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근데 엄마, 엄마가 예전에 동생이 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그랬잖아. 이제 그 말은 좀 이해가 돼네" 라고 말이다. 내가 항상 큰 아이와 대화하다 마지막에 큰 아이를 달래면서 동생이 널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반복해서 말해 주었었는데 큰 아이는 항상 그 말에 크게 반발했었다. 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내 기분을 좋게 해야지, 왜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가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괜히 더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납득시키는 게 참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여행길에서 자기 동생과 옆집 꼬마 아이를 옆에서 보니 내가 그동안 알려주고 싶었던 내용을 조금 알 거 같은 기분이 드나보다. 옆집 꼬마도 누구를 일부러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상대가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너무 들뜨고 좋은 마음을 좀 미숙하게 표현하는 것 뿐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인 것 같다. 내 마음이 보이고 상대의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 나도 언젠가 한번은 저렇게 군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상대방 입장이 되면 나도 상대방처럼 똑같이 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이런 순간이 바로 아이의 마음이 한 뼘쯤 자라는 시간이 된다.
여행이 그래서 좋은 것 같다. 매일 똑 같은 환경에서 똑 같은 일상을 보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색다른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몰랐던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코칭에서도 아이와 가끔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함께 하라고 그런다. 이번 여행을 통해 큰 아이도 동생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작은 아이도 형의 입장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기회들을 만나게 되면 좋겠다. 어쩌면 깨달음의 순간은 매 순간 있지만 나에게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 마음의 눈과 여유가 없어서 못 보고 못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내가 놓치지 않기를, 그래서 아이들도 나도 모두가 함께 마음을 배우고 키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