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국제 영화제 상영작, <여행자의 필요>
여행자의 필요 (A Traveler's Needs)
감독: 홍상수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여행자의 필요>. https://t1.daumcdn.net/movie/cbededd77b94e5b8691845377ea1c31ef2cb6dec
영화 <여행자의 필요>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금 솔직해지자. 한국에는 글 쓰기 교육이 없다. 나는 중고교생일 때 단 한 번도 에세이를 과제로 써서 제출해 본 적이 없다. 글짓기 대회 같은 것은 있었다. 학생들이 받는 글 쓰기 교육이라고는 대입 논술 시험 대비 교육이 전부였다. 그렇지 않은가?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에는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고 나서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세대가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답은 똑같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고 음악 선율이 아름답다는 것. 인도 친구와 밴쿠버 국제 영화제 (VIFF)에서 <여행자의 필요>를 보고 대학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친구는 내게 물었다. "정말 한국 사람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야? 연주하는 게 좋아요. 음악이 아름다웠어요. 느끼는 감정이 정말 그게 전부라고?" 나는 말했다. "아니, 한국 사람들은 아주 풍부한 감정을 느껴. 다만,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할 뿐." 친구는 한국 공교육에 글 쓰기 교육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 글 쓰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대학에 가서 대체 어떻게 당장 에세이를 쓸 수 있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사실 대답은 간단했다. 결코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 과외 선생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그녀의 가르침은 독특하다. 순간의 행동과 경험에 닿아있는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한다. 질문을 던진다. 답을 구한다. 그리고 감정에 닿아있는 그 말들을 카드에 프랑스어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해서 읽으라고 요구한다. 이자벨 위페르는 불편한 질문들을 계속 던진다. 학생들이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들을 집요하게 자극한다. 결국 그녀는 학생들이 스스로 실토하게끔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순간에 실은 기분이 나빴다고, 더 잘 연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충분하지 못한 연주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짜증이 났다고. 그리고 결국 그들은 사실 자신의 연주를 뽐내고 (show off) 싶어 했다는 것을 자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하는 동안 무엇을 느꼈냐는 질문에 그들은 뻔하디 뻔한 논술 답안 같은 답변 밖에 할 수가 없다. 인정 욕구와 조건부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든 입증해야만 사람대접이나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효율과 실용에 파묻혀서 감정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수와 오류를 용납하지 않고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한국인의 인생의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관계에서조차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자벨 위페르와 동거하고 있는 청년은 불쑥 집으로 찾아온 엄마와 언쟁을 벌인다. 엄마는 아들을 옥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으로 들이냐고 말이다. 배경 정보가 없는 사람은 혼돈과 두려움 그 자체다. 자신에게 어떠한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관계에서조차 효율을 따진다. 과거가 있는 사람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된다. 내가 그 사람의 과거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에. 과거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디딤돌로써 역할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얻는 정보가 빈약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 예측 능력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미래라는 것이 본디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불확실성은 삶과 시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두 같은 경험을 했어도 서로가 다르게 평가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나온 시간조차 불확실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라면 미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에서 온 이자벨 위페르는 여행자이자 이방인이다. 그녀는 한국이 다소 낯설지언정 한국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 자신을 한국의 맥락에 애써 구겨 넣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녀로 존재한다. 영화 내내 그녀는 눈치 없는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맥락에서 그녀를 평가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맥락과 행동 그리고 말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여행자의 필요>는 문화적 긴장과 불편함을 유발한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다. 살면서 누구나 느껴봤을 법한 개구진 어긋남이기 때문이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는 밴쿠버의 관객들을 떠나가라 웃게 만들었다. 한국의 아파트, 한국의 공원, 한국의 막걸리와 비빔밥, 한국의 산, 한국의 사찰, 한국의 거리, 한국의 부모, 한국의 자녀, 한국의 언어. 온통 한국으로 가득한 가운데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 이자벨 위페르가 만들어내는 어긋남과 불일치 그리고 긴장은 유쾌하기만 하다. 인생은 마치 여행과도 같다는 말들을 왕왕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인생을 여행처럼 살고 있는가?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일상의 맥락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에서 힘듦과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경험하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하는 여행. 아무리 꼼꼼하게 계획해도 어긋나는 지점이 생기기 마련인 여행.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여행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딱 잘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답을 구해보시라.
hiphop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