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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례자 Jul 26. 2024

24 T시의 절벽 위에 서다!(3/3)

  아들아 평안히 가거라!

  이 사건으로 나는 당장 갈 곳을 잃었다. 하지만 교사로 살면서 토가 될만한   사람을 만난 행운을 얻었다. P 교장은 교사로서의 열정과 관리자로서의 권위를 모두 갖춘 교육자로,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후배 교사의 올곧은 신념을 믿고,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온몸으로 막아 멋진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일관된 원칙이 있었다.  학교에는  늘 작고 큰일이 끊이지 않는다. P 교장은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혈기를 부리는 법이 좀처럼 없다.  일단 당사자를 교장실로 부르고 편안하고 안정된 표정과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그래 이곳 생활이 녹록지 않지요?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는 교 전문성이 없고,  학생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없다면 교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했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교장의 역할, 교사가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번 일은, 평소 입버릇처럼 했던 그의 말  한 치의 오차 없이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었다.

  

  P교장이 교장실에서,  L군의 아버지에게 한 말이 지금도 내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듯하다.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똑같이 뺨을 후려쳤을 니다. 막가는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보는 게 선생입니까? 그대로 놔두면, 아이를 망치는 일입니다. 이제 얘기는 다했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나는 그 후로 여러 관리자들을 만났지만,  부분 자기 유익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권위를 내세웠지만, 어떤 일도 책임지지 않았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교장의 직함이 필요했고, 그 직함에 맞는 그 이상도 그 이하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어느 조직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들은 문제가 생기면 교사를 탓했고, 원칙 끌어 붙여 교사에게 책임을 추궁했다. 교장실 문 항상 열려 일으니,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오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를 제기하면 권위에 도전한다고 불쾌해하고, 내가 K 선생에게 잘못한 게 있냐고  정색을 한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했다. 어떤 때는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학교일까, 학생일까, 아니면?


  그런 세상에서 P교장은 더 크게 보였다. 역지사지, 상대의 입장에서 듣고 오래 생각한 후에, 문제를 책임지고 교사의 방패 막이가 됐, 본인의 권위 활용해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교육부와 조율해서  수 있는 배려를 했다. 렇다, 권위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생색도 내지 않는다. 행정실장을 통해서 나중에야 일련의 얘기를 듣는다.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결국 나는 T시의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아내와 몇 날을 얘기했다. 아내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나왔는데 1년 만에 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다른 나라에 갈 곳을 정하고 나서 이곳을 떠나는 것은 어때?” “내가 경솔했던 것 같아. 학교에 이미 퇴직 선언을 해버렸는데...,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갈 수 있는 나라를 찾아볼게.”     


   아내를 조금 안정시키고,  초빙 공고를 살폈다. 12월 초순이 지났다. 시기적으로 대부분 학교 초빙 공고 일정 종료다. 다행히 H 학교, V학교 두 곳만, 그것도 지원서 종료 이틀을 남겼다. 서둘러 서류를 준비해서 보냈다.


   그날 밤 꿈을 꿨다. 트렁크를 챙겨 T공항에 서있는 우리 가족을 꿈에서 보고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긴 한숨을 쉬었다. 만큼 내 마음도 다급해졌.


  새벽 4가 조금 넘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탔다. 사방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 고요했고, 밤 사이에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빛났다.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떨어진 D 한인교회로 향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막다른 절벽에 서면 찾아가는 한분,  하나님을 만나러 기로 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자전거 바퀴가 눈길에 획획 돌았다. 새벽이라 도로에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새벽 예배에 도착했다. 예배당 문을 열자  찬송가 ‘참 좋으신 주님’의 가사가 들렸다.


   "참 좋으신 주님 귀하신 나의 주,  늘 가까이 계시니 두려움 없네. 내 영이 곤할 때 내 맘 낙심될 때, 내 품에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 광야 같은 세상 주만 의지하며, 주의 인도하심 날 강건케 하시며~’


  앉아서 찬송가 가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불이 꺼지고 개인 기도를 알리는  찬송가 반주음을 들으면서 기도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출렁이는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배 한 척이 바다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아 평안히 가거라”


  라는 음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왔다. 번뜩 고개를 드니 교회 기도실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도를 시작하자 곧 잠들었던 모양이다.


  교회를 떠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아 평안히 가거라”라는 그 크고 깊은 울림의 목소리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두지 않기로 했다. 애써 뭔가 가능성을 연결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순간 자전거의 앞 핸들이 빙글하고 돌아 옆으로 획하고 모질게  미끄러졌다. 자전거와 함께 그대로   도로에 철퍼덕하고  넘어졌다. 도로 표면이 움푹 파인 곳에 눈이 쌓여서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차가 없었고 별로 다치지 않았다. 을 툭툭 털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해가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며칠 뒤 두 학교에서 모두 서류 전형이 통과 됐다는 연락이 왔다. 면접 일정이 12월 10일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제는 T시 학교의 2학기 학사 일정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3학년 입시 논술과 면접을 하고 있었다. 내게 최대한 배려를 해준 교장과 학교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교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H국의 교장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K 교장 선생님, 이곳 T시의 학사 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제가 지금 고3 논술과 면접을 지도하고 있어서 한국 면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H 국에서 논술을 지도하고 싶습니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수신 확인을 하고, 답장을 기다렸다. 다음 날 저녁 늦은 시간 연락이 왔다. 숨죽이며 열어 보았다.      


  “ K 선생님, 내가 12월 10일과 11일에 한국에서 면접을 끝내고,  P한국 학교에서 해외학교 교장단 회의에 참여할 겁니다. 그러니 12월 15일경에 내가 T시로 가서 면접을 할 테니,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세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교장이 직접 방문해서 면접을 하겠다니! 내가 기대했던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답신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고, 그제야 며칠 전 새벽예배에서의  “아들아 평안히 가거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두 달 면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풀 죽어있던 아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여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 같아요. 잘해봐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P 교장에게 전달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를 세 차례나 붙잡고 배려해 준 그에게 다른 지역의 한국학교 교장이 찾아와서,  자기 교장실에서 면접을 보고 내 수업을 참관하겠다는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H국의 교장이 오겠다는 날이 다가오자 속이 바짝바짝 탔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P교장에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혼자 애끓고 있었겠구먼. 이렇게 합시다. K 선생님은 면접과 수업시연에 최선을 다해 준비해. 합격해야지.  K 교장 선생님 영접과 숙소는 학교에서 준비할 테니, 대신 떨어지면 모든 비용은 K 선생님이 내야 해.”     

  

   P 교장은 교감을 시켜서  H국의 K교장이 방문하는  모든 일정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H국의 K 교장이 도착했다. 그는 약간  작은 키에 반짝이는 눈을 가졌고 목소리가 크고 명쾌했으며 성질이 급해 보였다.

   타학교로 떠나려는 사람에게 교장실에서 면접을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준 P교장의 너그러운 마음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P교장은 자신을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자주 얘기했고 불경의 일부를 인용해서 말하곤 했다. 첫 회식 때 내게 술잔을 따라 주고 건배를 권할 때,   내가  예수쟁이임을 히고 정중히 사양하자, 물을 대신 따라 주며 건배 흉내만이라도 내라고 했다.


   면접은 1시간가량 지속됐고, 논술지도 경험과 계획을 집중적으로 물었고, 1년 만에 이 학교를 떠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등학교 2학년 논술 수업 참관을 요청하고,  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이따금 일어나 학생들의 토론 모습을 돌아봤다.


  “나는 내일 아침 H국으로 돌아갑니다. 학사 일정을 보낼 테니, 선생님이 맡아야 할 수업과 논술 강좌를 미리 준비해서 오세요. H국에서 만납시다.”    

  

 K 교장은 학교를 나서며 빠른 말로 명쾌하게 말했다. 순간 지난 한 달간에 암울했던 내 일상에 환한 빛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P 교장에게 결정된 상황을 전하고 정중히 감사를 드렸다. 교장실을 나오자마자 아내에게 전화했다.


  “ 여보! 드디어 H국에 가게 됐어. 최종 합격했어!

  

   다른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내게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다. T시의 P교장의 적극적 배려나, H국의 K교장이 보여준 면접의 과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초점이 나에게 맞춰질 수 없었다. 나는 내세울 것 없는 그저 평범한 교사일 뿐이었다.  막다른 절벽에 선 내게, 그분들을 통해 준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아들아 평안히 가거라”라는 음성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다시 울려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빈 교실을 찾아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을 떠나 T시에 온 지 1년이 못돼서 H국 한국국제 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방랑과 정착의 삶, 그 첫 번째 글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다음 편, 해외교사로 십 년을 살아보니 2에서는, H국에서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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