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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03. 2023

살구나무 아래 그 친구

  초복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푹푹 찌는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지난 주말에 며느리가 친정에서 보냈다며 살구를 한 자루나 가져왔다. 교회 마당에서 털었다고 한다. 매일 찬양을 들으면서 익었을 테니 귀한 살구다. 손자 손녀는 한 번 베어 물더니 아예 도망가 버린다. 


  아내는 살구잼을 하느라 정신없다. 남는 것들은 설탕을 뿌려 살구청을 만든다고 한다. 실한 놈을 골라 손으로 갈라 보았다. 싱싱한 과즙이 밴 뽀얀 속살이 나온다. 양쪽 끝이 뾰족한 살구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쏙 빠져나온다. 껍질 채 살구를 입에 넣으니 상큼한 신맛이 돌며 침부터 고인다. 살구 맛은 예나 지금이나 달콤 씁쓸한 아련한 추억의 맛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 살구나무가 여럿 있었다. 동네 어귀 길가며 밭둑에 누구네 것이랄 것도 없이 서 있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어른들은 올해 풍년이 들겠다며 좋아하셨다. 살구는 해걸이를 했다. 한해에 많이 열리면 다음 해는 열리는 시늉만 하는 식이다. 어떤 해에 가지가 찢어질 듯 살구가 열리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살구가 빨리 익어서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살구는 다른 열매와 달리 떨어진 것을 주워 먹어야 제맛이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모양만 근사하지 아직 시고 떫어 먹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세찬 비바람이 훑고 가면 살구가 소복하게 쏟아진다. 멀리서 봐도 나무 밑에 가득 떨어진 황금빛 살구가 탐스럽다. 양쪽 바지 주머니가 터질 듯 삐져나오게 살구를 주워 넣고도 모자라서 윗도리 앞자락에도 가득 주워 담았다.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가져온 듯 의기양양해서 집에 오면 동생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지금은 살구나무도 개량종이 나와 크기도 주먹만 하고 맛도 좋지만 그때는 달랐다. 얼굴을 찡그리며 씁쓸하고 시기 짝이 없는 살구를 발라먹던 동생들의 까만 얼굴이 생각난다. 


  몇 해 전에 주말마다 가는 텃밭에 고향에서 살구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잘 생긴 신품종 나무다. 처음 몇 해 동안 몸살을 하더니 작년부터 제법 통통한 살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금년에는 꽃도 작년보다 더 요란하게 피더니 열매가 그야말로 정신없이 매달렸다. 스스로 솎아내겠지만 욕심이 생겼다. 가지를 들추어 아래쪽에 매달린 조그만 것들을 모조리 따주었다. 


  살구나무는 텃밭 마당가 샘에서 가장 잘 보인다. 어느새 살구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더니 황금색으로 물들면서 그야말로 탐스럽게 익어갔다. 지난주에 때깔 좋은 놈을 따서 한 번 먹어보니 아직은 살이 단단하고 시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살구가 떨어진 다음에 주워 먹기로 작정하고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던 주말이다. 텃밭에 오기 무섭게 살구나무를 쳐다보니 멀리서도 환하게 보이던 그 많던 살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때 이른 장맛비에 몽땅 쏟아진 것이다. 떨어진 살구는 아이들 주먹만 했지만 온통 벌레 차지였고 전부 짓물러서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올해는 제대로 된 살구 맛을 보려나 기대했는데 결국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추억도 마찬가지다. 너무 오래 묵혀 두지는 말 일이다. 어린 시절 함께 살구를 주우며 유난히 까불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텃밭에 놀러 오라고 연락이나 한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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