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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악인 문재숙

2019년 레전드매거진 게재

[취재/글: 이준동]

[사진: 문재숙 제공]



[가야금]


가야금은 대한민국의 전통 현악기이며 순우리말로는 ‘가얏고’라고도 한다. 기본적으로 정악 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의 두 종류로 나뉜다. 정악 가야금은 궁중음악이나 풍류음악 등 정악을 연주할 때 쓰이며, 산조가야금은 민요 반주나 산조, 시나위를 연주할 때 쓴다. 현대 창작국악에는 산조가야금이 많이 쓰이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 가실왕 때 중국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전하지만, 그 이전 마한·진한·변한 시기에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라는 이름을 가진 악기가 가야금 원형으로 고대 한국에 있었다는 학설이 있다.


가실왕은 우륵(于勒)에게 명해 하가라도·상가라도·보기·달기·사물·물혜·하기물·사자기·거열·사팔혜·이사·상기물 등 12곡을 짓게 했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신라에 건너와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에게 전수했는데 제자들은 12곡에서 아정한 5곡으로 줄였다. 일부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가야금의 등장을 3세기나 기원전 1세기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중국, 가야금으로 세계 기네스북 등재]


이렇듯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의 상징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기 ‘가야금’이 최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이 기네스북 등재에는 참혹한 배경이 존재한다. 가야금을 자국의 문화재로 지정한 중국은 2013년, 854명이 출연하는 대규모 가야금 공연을 열고 가야금을 마치 중국의 악기인양 버젓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은 가야금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 등재까지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한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가야금’을 외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1004금(琴)의 어울림’이란 공연이 펼쳐졌다. 2017년 열린 이 공연은 한국이 가야금의 종주국임을 알리기 위해 4세부터 77세 어르신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168 명의 가야금 연주자가 하모니를 펼쳤다. 이 행사의 중심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이자 국악인 문재숙이 있었다.


문재숙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3년 중국 연변대에 세미나를 갔는데 가야금을 하는 조선족 제자들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거예요. 다들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가야금 기네스북에 올리는 공연 연습을 갔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이 벌써 1000명 이상이 함께 추는 장구춤 상모춤을 기네스북에 올렸는데, 가야금까지 중국의 악기로 뺏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며 당시 느꼈던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이어 그녀는 “중국은 ‘조선족의 문화는 곧 중국의 문화’라는 논리로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문화를 하나씩 빼앗아가고 있다”며 “4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악기인 가야금까지 뺏기겠다 싶어 청와대에 민원을 넣어 대책 마련을 호소했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며 당시 우리 정부의 안일한 대응의 심각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1004금(琴)의 어울림]


2017년 9월 30일, 대한민국의 가야금 연주자 1168여 명이 ‘1004금(琴)의 어울림’ 공연을 성대히 치러냈다. 기존 목표였던 1004명을 훨씬 웃도는 인원이 참가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비롯한 한민족의 염원을 담은 음악과 노래를 연주했다.


중국의 854명보다 더 많은 1200여 명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004금(琴)의 어울림’은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기네스북 등재에는 큰 비용이 따르며 이는 문재숙 개인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현재 문재숙 명인은 ‘1004금(琴)의 어울림’ 앙코르 공연을 준비 중이다. 현재 준비 중인 공연을 통해 세계 기네스북 등재는 물론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까지 도전할 계획이다. 현재는 공연을 기획하는 단계라 일정과 장소 등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기 조심스러운 상황이지만 이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그녀는 지난 2017년 공연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재숙 명인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문화를 빼앗기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라며 “문화를 빼앗기는 것은 우리 선조의 혼과 얼을 빼앗기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며 우리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사물놀이 명장이 6개월간 중국에 거주하며 사물놀이를 전수하고 오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은 장구춤, 상모 돌리기, 가야금에 이어 사물놀이에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논리에 빠져 ‘재물과의 싸움’만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펼쳐진 ‘1004금(琴)의 어울림’ 공연 역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자 국악인 문재숙을 만나 그녀가 마음속 간직하고 있는 슬픈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문재숙]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국악인 문재숙입니다. 젊은 분들께는 배우 ‘이하늬’의 엄마, 나이 드신 분들께는 국회의장 ‘문희상’ (2019년 기준) 동생이라 말씀드리면 아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웃음)


제가 평상시 항상 되내기는 구절 한 마디를 전하며 인터뷰를 시작하면 어떨까요? 저는 ‘문화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항상 뼈저리게 느끼는 구절이지만 실제로 하나하나 저에게 현실로 다가올 때마다 이 구절은 더더욱 마음에 사무치게 됩니다.


최근 저는 제자들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일본 오사카에는 1500여 년 된 가장 오래된 ‘가야금’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한국의 국악기 ‘가야금’을 보기 위해 일본을 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일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제 마음을 너무 무겁게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오사카에 가서 그 가야금을 보는 순간 저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우리 신라의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완벽하고 소중히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내가 못 키운 아이를 누군가 대신 키워준 듯한 고마움을 그들에게서 느꼈습니다. 분명 일본은 최소한 문화에 대한 소중함은 알고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한국, 그리고 문화]


사실 우리는 한국전쟁 후 지금까지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문화라는 것을 논할 틈이 없었죠. 문화, 정치, 사회, 경제라는 4개의 톱니바퀴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경제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잠시 미국 뉴저지에 거주한 적이 있습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한번 다녀가면 미국에 있는 H사 자동차의 매출이 대폭 상승합니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한국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실예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힘입니다.


최근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은 세계인들의 시선을 한국에 집중시키는 큰 역할을 해냅니다. 이렇게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받은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상승하게 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더욱 고급스러운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것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1004금(琴)의 어울림’ 공연을 마치고 세계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국가의 지원을 요청한 적 있습니다. 그때 행정기관에서 돌아온 답변은 ‘어찌 됐건 가야금은 우리 건데 뭘 그리 걱정하느냐’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안방에 강도가 들어와 여러분의 부인을 겁탈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지켜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래 봐야 내 마누라인데 하며 방관하시겠습니까?


가족이 당한 일이라 하면 본능적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역사와 관련된 일에는 애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인식을 못하는데서 오는 방관하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뿌리를 하나하나 뽑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문재숙]


뿌리라는 얘기를 하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저희 오라버니가 ‘배부르면 족보 찾을 날이 온다’고 한 얘기한 적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찌 됐든 우리의 것을 찾게 돼있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언니도 가야금을 한 게 아닌가 생각돼요.


저는 처음에는 취미로 가야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취미로 가야금을 배웠고 친구들 놀러 오면 들려주려 민요 한 두곡 연습하던 게 전부였죠. 그런 제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국악인이 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희는 다행히 당시의 다른 가정에 비해 조금은 여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께서 공부에 대한 압박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덜했죠. 아마 아예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입니다. 부모님은 쉬는 날 항상 저희를 데리고 송추, 일영 인근으로 나들이를 나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어요.


제가 결혼을 앞둔 시점에 부모님과 우리 가족 모두 쌀 한 가마니를 트렁크에 넣고 전국일주를 다닌 적도 있어요. 그때는 그저 가족 여행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출가하는 딸을 위해 부모님께서 주신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전 그 여행을 계기로 ‘추억도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추억을 선물한다는 것은 그 어떤 값진 보물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습니다. 저와 저희 자녀들이 함께 꾸민 ‘이랑’이란 국악 그룹 역시 제가 저희 첫째 딸 ‘슬기’의 결혼을 축하하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랑, 그리고 가족]


‘이랑’은 ‘이 씨(氏)들이랑’이라는 단순한 뜻도 있지만, 고랑과 고랑을 연결해 주는 통로, 즉 세상과 국악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자 하는 취지로 짓게 되었습니다. 또 이 ‘이랑’이라는 것은 항상 낮은 곳에 있으니 항상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는 가족 간의 약속의 상징이기도 하죠.


제가 알기로는 최초의 가족 국악 그룹으로 알고 있는데 확인은 아직 못해봤습니다 (웃음). 주변에서는 왜 자녀들에게 국악을 시키냐 자주 물어오곤 합니다. 저는 제가 일부러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태생과 함께, 아니 그전부터 뱃속에서 국악을 들어왔으니 자연스럽게 국악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답하곤 하죠.


그리고 또 하나는 자녀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저도 국악과 함께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살았으니 아이들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아마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국악을 하는 제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사람은 태어나면 이거 하나보다’ 했을 거예요 (웃음). 큰딸이 어릴 때 친구 집에 다녀와서 놀란적이 있습니다. 친구 집에 갔더니 가야금이 없다는 거예요. 집집마다 다 가야금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국악의 품속에서 자랐다는 증거죠.


국악은 아이들에게 놀이터와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리니 제가 소리를 배우러 갈 때는 항상 데리고 다녔죠. 큰애 ‘슬기’는 제 손을 잡고 따라 걸어 다녔고, 작은애 ‘하늬’는 제 뱃속에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인들 집을 뭣도 모르고 쫓아다녔죠.


제 스승님이셨던 박귀희 선생님께서는 “문 선생은 아기집이 이쁜가보다. 애들이 다 이쁘네”라며 아이들에 대한 칭찬과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황병기 선생님은 “슬기는 심청이, 하늬는 춘향이 같다” 종종 말씀하셨죠.


정말 황 선생님 말씀대로 슬기는 아빠를 끔찍이도 아끼는 심청이 같은 아이가 되었고, 하늬는 ‘사랑밖에 난 몰라’하는 춘향이 같은 아이가 되었어요 (웃음) 큰 딸은 엄마가 가끔 일 때문에 밖에서 밥 먹는다 하면 아빠랑 밥 같이 안 먹는다고 뭐라 할 정도였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저는 저희 어머니가 제게 베풀어진 사랑과 헌신에 대한 보답을 우리 아이들에게 하려 합니다. 언젠가 제가 대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어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건너는데 큰 트럭이 세차게 저희 쪽으로 달려왔어요. 어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저를 감싸 안으며 안전한 곳으로 밀쳐내 주시고 어머니는 트럭에 거의 몸이 빨려들어갈뻔 한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헌신적 사랑은 제 평생 포근한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어요.


반면 아버지는 상당히 무뚝뚝하고 엄하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결혼 날자를 잡고 난 어느 날, 당시 막 발명된 ‘감자 깎는 칼’을 하나 사 오셔서 저에게 주셨어요. ‘이걸로 깎으면 편하다 하네’ 하시면서. 막상 제가 결혼 날자를 정해 시집을 가게 되니 마음이 많이 섭섭하셨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저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이 감자 깎는 칼로 항상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며 가정에 충실하는 의미로도 다가왔죠. 평생 다른 사람이 해주던 밥을 먹으며 자란 제가 시집을 가면 직접 밥을 해야 하는 제가 안쓰러우셨나 봐요.


아버지는 엄하시면서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지지해 주셨어요. 마음껏 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주셨죠. 그런 아버지께서 저에게 딱 한번 화를 내셨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어릴 때 어머니의 권유로 무용학원에 다녔는데, 인근 미군부대에서 우리 무용학원 원생들에게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아버지는 그 말을 들으시고 평소에 안 내시던 화를 내셨고 전 더 이상 무용학원을 못 가게 된 적도 있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신 처음이자 마지막 일로 기억됩니다. 저의 ‘재숙’이란 이름은 저의 오라버니가 직접 지어주셨어요. 저는 그래서 오라버니가 저를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줄 알고 자랐죠. 어느 날 우연히 오라버니의 일기장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일기장에 ‘희숙(막냇동생, 현 경북대 조소과 교수)이는 재숙이 닮아서 못생겼다’라고 써놓은 거예요 (웃음)


어린 나이에는 정말 큰 상처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마저도 애틋한 사랑의 추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못생긴 제가 미스코리아 딸을 낳았으니 아이러닉 한 일이 되었죠 (웃음). 그래도 오라버니의 기타 연주에 맞춰 자매가 노래를 부르며 음악과 함께 우애 좋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생각합니다.



[문재숙, 마지막 메시지]


이런 가족 간의 아름다운 추억을 우리 아이들과도 함께 나누고자 ‘이랑’ 공연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어요. 특히 공연을 하거나 연습할 때는 제가 처음 ‘국악찬양’을 할 때가 떠오르곤 해요. 당시에는 ‘국악찬양’이라는 개념이 없던 터라 외롭게 시작을 했어요. 그만큼 앞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어가며 ‘강물에 씨 뿌리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국악찬양’이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다 떠내려 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씨앗들이 어딘가에서 착근해 하나하나 꽃을 피우고 지금은 많은 분들께서 ‘국악찬양’을 함께 하고 계시죠. 지금 당장은 강물 레 씨 뿌리는 막막하고 암담한 하루하루가 될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았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질 거라 약속드립니다.


그 내일이 그다음 날보다 더 나아지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 여러분이 지금 강물에 뿌려놓은 씨앗들은 하나하나 꽃이 되어 여러분을 빛나게 만 들것 입 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도록 저 ‘문재숙’이 항상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것을 기억하고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악은 나라의 음악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버릴 수 없듯이 우리 선조들의 혼과 얼이 담긴 숙명과도 같은 국악을 다른 이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것을 아끼고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문화와 영토는 다른 이의 손에 침식될 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의 소중한 국악기 ‘가야금’을 지켜내려 노력하고 있으니 항상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2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이준동]


You Raise Me Up - 문재숙, 이슬기, 이하늬, 이권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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