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당시로는 상당히 늦게 결혼한 부모님의 첫 아이로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딸이라서 좀 서운해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으셨다 한다.
그래도 그런 서운함을 내비치지 않으셔서, 나는 세 살 터울과 다섯 살 터울의 두 남동생과 똑같이 귀염을 받고 자랐다.
우리 세대에 이것이 엄청난 복이라는 사실을 한참 늦게서야 알았다.
그래서인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인정욕구가 적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서울깍쟁이’란 말을 들을 때면 내 본모습을 몰라준다는 억울함이 솟아났다. 사실 나는 어리바리한 쪽에 가까운데, 말하기 싫으면 입을 다물고 있거나 싫은 거는 하지 않으려 해서 그런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그러고 보면 깍쟁이 맞는 듯하다.)
지금 돌아보면 내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속마음을 몰라주는 것만 섭섭했던 셈이다.
그런데 대학 시절, 남자친구가 “착해서 좋다.”란 말을 하더니, 친구 어머니로부터 “착하게 생겼구나.”란 말을 들었다.
“어떻게 아셨지?” 하는 놀라움과 함께 드디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구나 환호가 교차했다. 그 후론 착하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었는데, 변덕스럽게도 이번엔 내가 바보로 보이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누군가의 진심이나 본질을 알아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바라볼 때에야 가능하다. 애정과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알아봐 주는 이야기는 늘 뭉클하다.
현실이 각박할 때, 또는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나 보다, 외롭고 절망스러울 때, 그 뭉클함은 오래간다.
1990년대 상당한 반향을 몰고 온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두 아이가 있는 유부남과 젊은 여자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함께 떠나기로 약속하고 떠나기 전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하러 온 여자는 결국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까지의 과정이 ‘당신’에게 쓰는 편지글로 표현되는데, 망설이는 여자의 심경이 쉼표와 말줄임표, 도치된 문장과 종결되지 못한 문장 등을 통해 선연하게 드러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소설의 도입부인데, 잦은 쉼표와 말줄임표를 사용해서 마음속의 파문을 표현하고 있다.
‘나’의 마음속에 ‘파문’이 일어난 까닭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엄마가 떠났으므로, 오빠 표현을 빌면, “그 여자는 악마다.”
그 여자를 쫓아내야 엄마가 돌아온다는 오빠의 말이 맞다고 느끼면서도, 어린 여자아이 ‘나’는 그 여자가 싫지 않다. 뽀얗고 좋은 향기가 나고 색색이 예쁜 음식을 만들어줘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봐 줬기 때문이다.
곧 그 여자는 ‘나’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아봐 줬다.
‘위로 오빠 셋만 있는 집의 여자아이’란 “어디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마련”인데, 그 여자는 ‘나’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아봐 줬던 것이다. 그래서 밀쳐내야 하는 존재인데도 ‘나’는 여자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과의 사랑이 시작된 것도 ‘나’를 알아줬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여자들 중에서 감기를 앓고 있는 여자가 바로 저라는 걸 알아줬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을 지키고 싶지만, ‘사랑만이 우리 삶의 다라고 여길 수 없는 불편한 부분’을 ‘나’는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후의 심경을 서술하면서 끝맺는 이 소설은 가정 있는 남자와의 사랑이란 소재와는 별개로, 알아봐 주는 일이 사랑의 시작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