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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Mar 31. 2024

근원 김용준의 수필(1)

<근원수필>에 나타난 예술관과 수필의 미학


1. 근원 김용준의 삶과 <<근원수필>>      

 

근원 김용준은 1904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화가와 문필가로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동십자각> 1924)하여 화제가 되었다.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표현파를 추구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했는데, 여기서 이태준을 만난다.  


1927년 <화단개조>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 등을 발표해 논객으로 깊은 인상을 주는 한편으로, 1928-1938년까지 여러 전시회에 지속적으로 출품한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1930년 관념적 신비주의 사상과 미학을 취하여 이른바 조선향토색론을 펼치는데, 1936년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며 민족 정서를 조선향토색의 핵심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수필을 발표했다. 아울러 1939년부터 미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미술사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한다. 


해방 후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했으나 국대안 반대운동의 여파로 사퇴하고 동국대 교수로 취임했다.(1948) 1950년 9월에 월북하여 1967년 작고하기까지 평양미술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논문 발표, 개인전 개최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근원수필>>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앞표지에는 난 화분이 그려져 있고, 첫 페이지에 ‘검려사십오세상(黔驢四十五歲像)’이란 제목의 자화상이, 그다음 페이지에 “선부고독(善夫孤獨)”이란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1부에 21편, 2부에 그림과 화가에 관한 글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품격과 단아함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풍긴다. 화가이면서 뛰어난 문필가로서 근원의 글은 예와 문사철이 두루 녹아 있는 경지를 보여준다.  





 <발(跋>에서 수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내가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릿광대가 춤을 추는 격이다.” “마음속에 부글부글 괴고만 있는 울분을 어디에다 호소할 길이 없어, 가다 오다 등잔 밑에서 혹은 친구들과 떠들고 이야기하던 끝에 공연히 붓대에 맡겨 한두 장씩 끄적거리다 보니 그것이 소위 내 수필이란 것이 된 셈이다.” 

 자유가 부여되지 않아서 “언제나 철책에 갇힌 동물처럼 답답하고 역증이 나서 내 자유의 고향이 그리워 고함을 쳐보고 발버둥질을 하다 보니 그것이 이따위 글이 되고 말았다.” 


 곧 그의 수필은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경을 글로 표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는 어릿광대의 춤. ‘이따위 글’이라며 겸허하게 표현했으나, 그의 글은 당시 현실과 삶, 예술관과 시대의식을 진솔하게 묘사하여 수필의 귀감이 되고 있다.               



2. 근원의 예술관 및 수필관    


 근원의 미술론은 시대적 자각 없이 형성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이후 민족문화론으로 이어진다. 프로미술론을 비판하면서, 미술 고유의 표현언어인 색과 선의 조화에 미적 가치를 부여했고, 소재보다는 작품 자체의 순수성과 직감력 있는 감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필에서는 그림과 시를 포괄하여 예술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시(詩)와 화(畵)>는 <채근담> <수원시화> 등을 인용하여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임을 강조한 글이다. “음시(吟詩)깨나 한다고 시인이 아니”며, “동도서말(東塗西抹)하여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속이 탁 터지고 온아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무식이라도 참 시인일 것이요.” “시를 배우기 전에 시보다 앞서는 정신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한 소감>에서도 “모든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 “미는 곧 선”이며, ‘기술의 연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행위화’로 성립된다고 본다.  


 <거속(去俗)>에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과 품격이며 속된 것이 없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이를 없애기 위해 독서를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한다.      



복잡한 곳을 곧잘 묘사하였다고 격 높은 그림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실물과 꼭 같이 그려졌다거나 혹은    수법이 훌륭하다거나 색채가 비상히 조화된다거나 구상이 웅대하다거나 필력이 장하다거나 해서 화격 이 높이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서화에 있어서 가장 표면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이요,  이 밖에 아무리 단순하고 아무리 치졸하고 아무리 조잡하게 그린 그림일지라도 표면적인 모든 조건을  물리치고 어디인지 모르게 태양과 같이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작품들이 가끔 있으니, 이것이 소위 화격이란 것이다. 이 화격이란 것은 가장 정신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문외인에게는 쉽사리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이를 글에 대입해 볼 때, 세밀하고 훌륭한 묘사, 원숙한 기교, 웅대한 구상과 매끄러운 전개와 같은 것은 표면적 조건일 뿐이므로 이를 뛰어넘는 품격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곧 예술의 아름다움은 순결하면서도 고고한 정신의 현현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매화>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매화를 묘사하여 근원 수필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수묵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서두에 이어 매화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매화가 구름같이 자못 성관으로 피어 있는 그 앞에 토끼처럼 경이의 눈으로 쪼그리고 앉은 나에게 두보의 시구나 혹은 화정의 고사가 매화의 품위를 능히 좌우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곧 매화의 아름다움은 매화란 실체에 있을 뿐이며, 따라서 매화를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 독보적인 아름다움은 ‘내 기억에서 종시 사라지지 않는 꽃’으로 남아, “유령처럼 내 신변을 휩싸고 떠날 줄을 모르는구려.”하는 고백을 낳는다. 


이처럼 존재 자체로 황홀함을 느끼게 하는 매화는 ‘위대한 예술’과 같다. (“매화를 대할 때의 이 경건해지는 마음이 위대한 예술을 감상할 때의 심경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매화 앞에서 경이와 황홀함을 느끼는 모습은 심미적 예술관의 표명이다. 이런저런 지식과 꾸밈은 “신선하게” 보는 것을 오히려 방해할 뿐이라는 입장으로서, 예술 자체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 <서울문학광장> 주최 주관 <고전에게 길을 묻다 2> 에서 발표(2024.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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