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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May 19. 2024

천사가 찾아올 때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어린 시절, 바다에서 우아하게 수영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린 삼 남매 입을 거 먹을 거 준비해 짐 싸고 버스에 흔들리며 오가는 먼 길이 귀찮을 법도 했는데, 엄마는 열심히 바캉스를 챙겼다. 바다에서 신나게 놀다가 허기져 돌아오면 닭튀김이나 엄마표 함박 스테이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른 저녁을 지어 먹이고 바다로 나간 엄마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배경으로 헤엄을 쳤다.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고. 그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나도 머리를 내밀고 헤엄쳐보려 애썼다. 하지만 번번이 가라앉아서 이후 바다든 수영장이든 갈 때마다 머리를 내놓고 헤엄치기를 연습했다.


 그래도 계속 가라앉기만 해서 나는 안 되나 보다, 싶었는데, 어느 날, 내가 머리를 내놓고 헤엄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별다른 조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쑤욱 떠 올랐던 것이다. 이때 느꼈던 놀라움과 신기함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뒤로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가라앉아 있던 이 느낌과 조우한다.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트레버의 아름다운 단편 <비 온 뒤>는 이 오래전 기억을 소환했다.  



 무더운 8월, 이탈리아 체사리나란 곳에 혼자 여행온 영국 여성 해리엇이 그 주인공이다. 원래는 애인과 여행을 갈 예정이었는데, 연애가 끝나 버려 “두 손에 시간이 남아도는 상태로 영국에 있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체사리나에 온 것이다. 소설은 이곳에 온 열이틀째와 다음날 이틀 동안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해리엇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놀러 오던 곳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족과의 추억은 힘이 되지 못하고 상처만 헤집을 뿐, 상실감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지난날을 하나하나 되짚어봄으로써 연애가 늘 지속되리라 믿었던 것, 부모로부터 받은 실망을 회복하기 위해 연애를 이용했던 것, 자신을 기만해왔음을 하나씩 깨달아간다. 그리하여 이틀간의 여정은 해리엇이 진실에 가 닿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했다. 트레버는 비유나 이미지 없는 사실적 문장으로 인물이 처한 상황을 암시한다.


   펜시오네 체사리나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는 사람들은 너무 협소해서 두 사람이 앉을 큰 탁자를   들이지 못하는 벽 쪽을 따라 끼어 들어가듯 자리를 잡는다. 이런 1인용 탁자들은 식당의 네 구석 가운데 세 구석, 늘 차가운 물 단지가 있는 식료품실 문 옆, 가족용 탁자 둘 사이, 닫거나 열 때 덜거덕거리는 높은 두 짝 여닫이창 양쪽 옆에 놓인다.      


 소설의 도입부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 도입부이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있어서 뒤이어 나오는 장면, 곧 해리엇이 혼자이기 때문에 늘 차지하던 탁자가 다른 손님용으로 동원되어 식료품 옆 탁자로 안내되는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때 그녀는 문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는 탁자 문제뿐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도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녀 쪽을 아무도 흘끔거리지 않았음에도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그녀의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 이어서 외모 묘사를 더해 그녀를 두르고 있는 고적감의 색채를 강화시킨다.       

 


  그녀는 허리띠의 반짝거리는 파란 버클을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이 없는 파란 드레스 차림이며 귀걸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불투명한 하얀 구슬 목걸이는 값나가는 것이 아니다. 말라서 뼈만 앙상한 그녀는 거무스름한 머리를 짧게 잘랐고 긴 얼굴은 끌로 날카롭게 깎은 듯한 모딜리아니의 얼굴과 놀랍도록 닮았으며 한 달 전에 이십 대를 빠져나왔다.      



 해리엇과 대조적으로 식당 안 다른 여행객들은 소란스럽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유쾌하게 웃고 있어, 혼자 떨어져 있는 해리엇의 고독이 오롯이 부각된다. 여러 나라의 언어가 “떠내려” 오는 중에 그녀 홀로 작은 섬에 고립된 것만 같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20년 전, 그녀가 열 살 때 부모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를 회상하며 화목해 보였던 가족이 거짓이었음을 떠올린다. 겉으로 미소 짓고 있었지만 부모는 각자 다른 짝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헤어짐은 해리엇의 삶을 너무도 쓸쓸하게 채색해 버렸고, 그래서 연애를 통해 그 실망감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애할 동안 사라진 것 같았던 상처는 연애가 끝날 때면 되살아나, 결국 아무것도 몰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시켰다.


 이러한 인식은 다음 날 시내로 나가 산타 파비올라 교회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여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확장된다. 공기는 뜨겁고 바람도 없는 날, ‘맹렬하고 답답한 더위’를 뚫고 걸어가는 길에 비는 ‘무자비한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이다. 교회 앞에 왔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빗줄기가 거세진다. 교회에서 수태고지 그림을 보고 나오자 비는 그쳤고 공기는 한결 신선해졌다.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수태고지>




 비 온 뒤의 느낌은 청량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하다.

“뭔가가 분명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어 계속 생각하다가 마침내 깨닫는다. 수태고지는 비 온 뒤에 그린 것임을.

그림 속 풍경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음을. 동정녀와 천사의 배경으로 그려진 우아한 아치들과 난간, 하늘과 산이 더위가 스친 적도 없는 듯 보드라운 까닭이 비 온 뒤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온 것은 비 온 뒤. 그 첫 서늘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의 핵심을 본다. 사랑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자 남자가 물러선 것이며 그녀가 그녀 자신의 피해자였음을 생생하게 인식한다. 이곳에서의 고독을 깊이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답은 나오지 않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임을 느끼지만,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오래전 어린 내가 고개를 내밀어도 가라앉지 않고 헤엄치게 되었을 때 그전엔 왜 가라앉았는지 이상했던 것처럼, 해리엇 역시 이렇게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을 이전엔 왜 몰랐는지 의아하다.

비 온 뒤 “잎과 돌로부터 다른 삶이 슬며시 기어나왔”듯이, 상처와 기만, 혼돈으로 뒤엉켰던 마음에 천사 또한 신비하게 찾아온다.

 번민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쑤욱 떠올라 내일을 향하게 되는 순간이다.        


*** <그린에세이> 24. 5,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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