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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뾰토 Oct 08. 2023

자소서 깎던 노인

여섯 시가 되면 해가 지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시기. 가을은 자소서의 계절이다.


변변찮은 스펙에도 서류합격만은 종종 되던 이유는 장인의 경지에 이른 자소서 쓰기 실력 때문이었다. 내게 자소서를 쓰는 일은 편지를 쓰는 일과 비슷하다. 지원할 기업을 분석하고 인사담당자가 좋아할 만한 스토리로 나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 인사담당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 덕분에 자소서 쓰기는 취업 준비 기간 내가 제일 재밌어했던 과정이었다.


그날도 엉덩이가 들썩거려 영 공부하기가 싫었던 나는 인적성책을 덮고 노트를 꺼내 자소서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자소서 쓰기마저 싫증이 나자 무작정 독서실 앞 정류장에서 잡힌 아무 버스나 타고 이리저리 떠돌았다. 머리를 창가에 기대어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는 와중에, 서구청이었던가, 퇴근 시간이 되자 모나미 볼펜 같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버스로 들어왔다. 직장인이라는 것은 직장이라는 필통 속에 꽂힌 훌륭한 모나미 볼펜이 되는 것이 아닐까. 허튼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것을 보곤 충동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도로는 이미 깜깜해졌고 걸어도 걸어도 카페는커녕 정류장도 나오지 않았다. 또 나의 망할 방향감각이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발밑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불길한 마음으로 발을 들어 쳐다보니 들쥐 같은 것이 엎어져 있었다. 기함하며 몸을 뺐다. 그런데 천천히 다시 보니 공기 빠진 풍선이다. 한심해져서 혼자 짜증을 내는데 문득 내가 저 공기 빠진 풍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로 올라갈 듯하지만 점점 공기가 빠져 지상 어딘가에 처박히는 풍선이 서류 전형은 통과하지만 결국 면접에서 떨어지는 내 신세와 같지 않은가.


아니, 그래도 풍선과는 다르다. 나는 포기해버리지 않을 것이다. 힘에 부쳐 잠시 쉴 수는 있어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올라가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말 것이다. 자소서를 깎고 또 깎아서 직장인이 되고 언젠가는 성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지하도를 통과하자, 한참 전에 지나쳐온 서구청이 삐죽이 보였다. 집에 가서 공부나 하자.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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