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굵다란 비가 내린 뒤의 모습처럼 마을은 온통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디케이가 단상에 올랐다는 소식은 곧 닥칠 대회 개최에 열광하던 사람들의 태도를 완전히 고쳐 놓는 역행의 발판이 되었다. 난리와도 같던 지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홈을 포함한 몇몇 도전자들 역시 의욕을 잃은 채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화두는
지킴이 세 사람(키, 페리, 매드.)이다.」
그들이 사는 집의 길목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당사자 없는 공세가 이어졌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이들의 표정은 모두 균일했다. 겁에 질려 있거나, 화가 나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운 쪽이 전자였다. 적어도 그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따질 줄 알았다. 침묵으로 이어져 오던 시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경작지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식량의 양, 마을의 정체성 문제. 그들은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반면, 화를 내는 이들은 호소가 우선이었다. 욕설은 기본이었고, 진실을 끄집어 올린 디케이와 사실을 함구하고 있던 사람들, 특히 마토 한 사람을 향한 적개심이 상당했다. 부족한 배움을 수치로 품고 있던 사람일수록 그런 감이 더했다. 혼돈처럼 진행되던 마을의 난장판이 진정되기 시작한 건, 피크가 모습을 보였을 때였다. 한창 다툼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단상에서 피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근 10년. 10년 만에 울린 목소리였다.
“이번 대회는 개최되지 않습니다.”
처절하리만치 가라앉고, 깊숙이 자리한 인간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소리의 크기까지 작았기에, 사람들은 더욱 숨죽여 그를 들었다. 이후로 피크는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로 사과를 건넸고,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려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표 시행 일을 알렸다. 피크의 태도에 사람들은 관대했다. 그다음 날까지 마을엔 그 이상 시끄러움이 일지 않았다. 그리고 투표를 앞둔 전날 밤,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군의 집에 모였다.
총 8명이었다. 여덟 사람이 자리에 붙어 앉았다. 가운데만 비우고서 정사각형을 정면, 그리고 사선으로 겹쳐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각형의 꼭짓점에 사람들이 자리했다.
“디케이, 이 개새끼야!!! 네놈 하나 때문에 망가진 마을 꼬락서니를 봐! 이제 통쾌해? 이게 네가 바라던 결과야?! 어?!!”
대화는 군의 고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들어올 사람 수에 맞추어 가구들을 구석에 몰아 놓은 탓에 잡을 물건들이 없었지만, 군은 무언갈 던지고 싶다는 듯이 자꾸만 눈을 두리번댔다. 그리고 그 옆의 피크가 입을 열었다.
“침착하지.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나.”
“침착? 그래, 난 반대로 물어야겠어, 피크. 너는 왜 그렇게 침착한 거야? 저 개새끼랑 미리 입이라도 맞추었어? 그런 거야?”
“조금도 그렇지 않아.”
피크가 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군의 맞은편에 앉은 마토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움직였다.
“지금껏 들키지 않은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반응을 보니 그때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던 것이더군요. 사람들이 멍청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선한 것이었습니다.”
민트가 짧게 되물었다.
“선?”
“그렇습니다. 뻔히 보이는 아이의 거짓말을 넘어가 주는 부모처럼. 지금 마을을 돌아보면 그 사실을 명명백백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행동에서 나오는 몸짓들이, 그를 이야기해 줍니다. 애초에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왜 모른 척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냐고 반발하면서요.”
“그렇게 믿고 싶은 자네만의 착각은 아니고?”
군이 서 있던 몸을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믿고 싶은 건 맞습니다만, 착각은 아닐 겁니다. 적어도 저희가 내민 거짓, 기만보다는 솔직한 반응일 테죠.”
“그게 중요한 시점은 지나갔어요. 우린 근간을 고민해야 해요.”
민트가 긴 다리를 쭉 내밀며 말했다. 그 말에 키가 보태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투표 결과는 일방적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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