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켜켜이 잠가 놓은 실내는 며칠은 묵은 듯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굉장히 너저분하고, 굉장히 질서 없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카리브는 눈을 떴다. 그녀의 베개로 빠진 것인지 굽이진 것인지 모를 여러 갈래의 머리카락들이 엉켜 있었다. 카리브는 자는 새에 위아래가 뒤집힌 이불을 실눈으로 보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양쪽을 두고 고민했다. 물감을 마시고 죽어 버릴까, 밖으로 나가 작업실로 걸음을 내려놓을까. 카리브가 지금과 같은 폐인으로 전락한 것은 오래전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이 아닌, 하루아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가 질락 말락 하는 늦은 오후, 타투이스트인 그녀의 일과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 막 술을 몇 모금 삼킨 사람들이 지하에서 기어 나와 어슬렁거리는 곳, 그녀의 작업실은 그 바로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카리브는 딱히 타투에 흥미를 두고 있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업 삼아 하던 것이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는 게 유일한 공통분모였다.
「물감을 푼 물과 붓, 카리브의 전문이었다. 저 세 가지만 있으면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그릴 수 있었다.」
F구역에서만 놓고 본다면, 카리브는 최고의 화가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능력에 대한 소문은 위로도 퍼져나가 있었다.
「특히나 태평스러운 가더들, 그들에게 말이다. 구역에 배치되어, 하는 것이라곤 도망자들을 색출하고, 포획하는 것뿐인 말단의 공무원들.」
카리브에게 접촉해 처음 제안을 건네온 것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네 그 솜씨로 내 등을 마구 휘저어 줬으면 하는데, 어때? 나를 위해 도안을 그려 주지 않겠나? 보수는 네 하루 벌이의 석 달 치를 쳐주도록 하지.”
“도안이요? 제가 그림을 그리긴 하지만, 그쪽과는 분야가 달라서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 말고 다른 전문인을 찾아가시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실 거예요.”
“아니. 네 그림은 뭐랄까…, 말로 못 할 생동감이 있어. 계산적인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 자릿수에 거주하는 병신들보다 백 배는 나을 거야.”
낯선 대우와 처음 듣는 칭찬. 그 말을 들은 카리브는 얼굴을 붉혔었다. 그리고 그때의 얼굴을 몹시 빼닮은 색 한 점이, 지금 침대의 창문 블라인드를 투과하여, 마치 꽃잎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마라카투라. 바닥을 본 카리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새로이 날을 맞이하는 순간이면 여지없이 찾아와 눈앞을 가로막는 형상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회상처럼 작용했다. 연회색 가지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초록색과 붉은색 열매. 마라카투라는 카리브의 손을 거쳐 간 마지막 작품이다.
카리브의 본격적인 개시 이후, 단지 숨소리에서마저도 거칢과 고지식한 면모가 드러나는 인간들이 발길을 이었다. 그들이 의뢰로 들고 온 문양들도 하나같이 호전적인 것들이 주였다. 한때, 강함의 역사였던 투사의 투구나, 날붙이, 방패, 피가 칠갑된 깃발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것을 그린다는 행위는 카리브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카리브는 나날이 굽어 갔다. 작업을 마치고 불을 끄는 때면 자신을 닮은 누군가가 힘없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도망쳐. 다시 원래의 네 붓을 들어.
그러면 카리브는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알고 있는 목소리, 알고 있는 말뜻, 참에 가까운 모든 사실이 자신을 옥죄는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에.
카리브가 눈을 뜬 그날은 다를 것 없는 평일 수요일 오후 무렵이었다. 그리고 카리브는 그날, 그녀를 처음 발견했다. 그녀는 줄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 길이를 살짝 웃도는 은색의 단발머리에 너무나도 평온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여인. 그녀는 왜소한 편에 속하는 여인이었다. 카리브는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었다. 무엇 하나 눈에 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사람, 끔찍한 수요일 오후를 토요일처럼 느끼게 해 준 그녀를 향해.
“여기에 있는 거 맞아요?”
카리브는 물었다.
“네.”
여자가 대답했다. 겨우 한 음절짜리 대답이었지만, 떨림이 있었다. 가까이서 그를 들은 카리브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정말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작은 사람이구나.
“원하는 도안이 있나요?”
“…아.”
여자는 느린 움직임으로 가슴 옆쪽에 자리한 포켓을 열어 손수건처럼 접혀 있는 종이 하나를 카리브에게 내밀었다. 작은 종이는 검은색 잉크가 번져 뒷면까지 물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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