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Haneke · <Amour>(2012) · 127min
감정은 모양이 없습니다.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기에 구조적으로 분석할 수 없지만 지나온 세월동안 우리는 감정이라는 무형의 자극을 인식하며 받아들여 왔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아무르'(Amour)는 사랑이라는 뜻 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았는 행위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엘 하네케는 이 영화를 <아무르>라고 제목을 입혔습니다. 영화에서는 단 한번도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종국에 이러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닳도록 사용하는 그 흔하디 흔한 표현이 '사랑'을 온전히 정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 입니다.
<아무르>는 '조르주'(장루이 트랭티냥)와 '안'(에마뉘엘 리바)이라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부부가 사는 고풍스러운 집과 함께 일상을 따라가보면 그들이 지성있는 음악가였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느날 '조르주'는 '안'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안'에게 뇌경색이 있어 마비증세가 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조르주'는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헌신적으로 보살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던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져 가며 '안'의 몸은 서서히 굳어져만 갔습니다. 정성스러운 치료와 간병에도 '안'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않고 부부에게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날만이 계속되게 됩니다.
관객은 시작부터 결말을 알 수 있습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크레딧의 고요함을 부수고 경찰이 들이닥치자 침대위에 평온하게 누워있는 '안'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부터 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이야기의 결말을 정해두고 시작합니다. 영화는 굉장히 관조적입니다. 플롯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유지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부부의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오프닝 시퀀스를 제외한 영화의 첫 장면은 어느 공연장의 관객석을 비춰줍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습니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자면 우리는 클래식 공연을 들으러 온 스크린 속의 관객들과 마주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아무르>를 보러 온 영화 관람객들과 영화 속 음악을 들으러 온 양쪽의 관객들이 마치 서로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나잇대도 옷차림도 성별도 제각각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관객들의 모습들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 누구에라도 치환되는 것이 가능해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쪽 동시에 앉아있는 것 입니다.
인간의 마음처럼 관객들이 들으러 온 음악이라는 것은 형태가 없습니다. 그저 멀리 퍼져나가는 음악의 파동이 얇은 고막을 흔들어 마음 깊숙히 새겨지는 감각 입니다. <아무르>를 보기 위해 극장 안으로 모인 우리는 그저 앉아서 귀기울이고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것 입니다.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안'은 옛 앨범을 넘기며 향수에 젖은 본인을 빤히 바라보는 '조르주'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관찰하지마, 그런 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냐". 우리가 영화를 하나하나 뜯어 해석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듯 말입니다.
물은 신체를 건강히 유지하여 생명이 살아 숨쉴 수 있게 만드는 필수 요소 입니다. 영화의 초입에서 ‘조르주’는 ’안‘과 식사를 하다가 그녀에게 마비증세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물이 콸콸 흐르는지도 모른채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러 옆 방으로 간 사이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안’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정신이 돌아온 ’안‘이 스스로 수도꼭지를 잠궈 새어나오는 물을 막은 것 입니다.
증상이 더 악화되어 휠체어에 타게 되자 세차게 내린 빗물이 집 안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이 혼자 창문을 닫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을 본 후 ‘조르주’는 어느 날 악몽을 꾸게 됩니다. 잠자는 새벽 문을 열고 나가보니 어디선가 흘러나온 물이 복도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조르주'는 공포심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납니다. 통제할 수 없이 끊임없이 새어나와 있는 흥건한 바닥을 보며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막을 수 없다는 비극적 예견을 마주한 것 처럼 말입니다.
육체는 '안'을 야속하게 배신합니다. 어느날 그녀는 이부자리에 실수를 하고 맙니다. 이제는 자신의 몸을 정말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입니다. '안'은 증세가 더 심해져 이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조르주'는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듯 '안'에게 물을 먹이려 하지만 그녀는 말대신 온몸으로 거부합니다. '안'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 입니다. '조르주'는 그저 주는 물을 먹지 않아 짜증이 나서 뺨을 때린 것이 아닙니다. '안'의 결심이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조르주'는 '안'의 결심에 응답한 후 물이 흘러가지 않게 받아두고 그곳에 꽃을 올려둡니다. 물을 머금는 꽃은 생기있고 아름다운 법이니까 말입니다.
비극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의 초반, 부부가 공연을 관람하고 집에 들어오자 현관문 손잡이가 뜯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도둑질을 시도했던 흔적이었습니다. '안'은 혀를 내두르며 친구 마틸다의 집도 싹 털려 고가의 그림을 모두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르주'는 도둑들이 그냥 아무 집이나 터는 것이라고 태연히 대답합니다. 도둑 즉, 끔찍하고 무서운 비극은 아무 이유없이 예고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 입니다.
영화 후반에는 여섯장의 그림 몽타주가 차례대로 나타나는 숏이 있습니다. '안'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밤, 그녀의 얼굴을 비춘 후 카메라는 어두운 집안 곳곳을 살펴보듯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들은 을씨년스럽기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의문의 그림들 입니다. 마틸다의 집에 침입했던 도둑이 훔쳐가려고 했던 고가의 그림들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는 관객들에게 아주 자세히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조르주'와 '안'의 집에는 아직 그림들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강조하듯 말입니다. 이 그림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꼭 훔쳐가야만 할 고가의 그림처럼 보이는가 질문을 던진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도둑은 부부의 집에서 무엇을 훔쳐갔을까 궁금증이 생깁니다. 마틸다의 집에서 고가의 그림들을 가져갔 듯 도둑은 가장 가치있어 보이는 것을 훔쳐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안'이 넘겨보았던 앨범처럼 유장하게 흘러왔던 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부부가 떠나간 텅빈 집. 어떤 음악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공허한 이 곳에 딸 '에바'가 찾아옵니다. 항상 맞은편에 의자에 앉아 있었던 그녀는 '조르주'와 '안'이 앉아있던 자리에 똑같이 앉아 그들이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공유하게 됩니다.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공연장의 관객들과 마주하며 함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던 우리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빈집에 앉아있는 '에바'처럼 이제는 한 개인이 되어 적막한 고요를 느끼게 됩니다.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조르주'는 '안'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남녀의 사랑영화였지만 너무 오래전에 봐서 구체적인 내용이 그는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르주'는 영화의 이야기는 기억 나지 않아도 너무 슬퍼 한참을 울고,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릴만큼 그 영화가 감정을 자극했던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긴 세월동안 목도해왔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영혼에 간직한 채 육체는 소멸되고 말 것 입니다. 언젠가 <아무르>를 본 우리가 노인이 되어 이 영화를 봤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간이 오겠죠.
'조르주'│장루이 트랭티냥(Jean-Louis Trintignant) 1930년 12월 11일 - 2022년 6월
'안' │에마뉘엘 리바(Emmanuelle Riva) 1927년 2월 24일 - 2017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