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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May 01. 2024

모멸감에 단단해진 마음의 근육

옛말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아서 그 일을 이루는 동안 많은 풍파를 겪는다고 한다. 

세상살이에 순풍에 돛 달고 역경 없이 순조로운 항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평화롭고 순조로운 삶을 살다가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어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러한 역경의 범주에서 빗겨있지 않았다. 

어려운 재무환경에 놓여 있던 직장을 10년에 이르는 각고의 노력으로 건강하고 우량한 재무구조를 갖춘 직장으로 만들었는데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 신협은 같은 동네에서 사는 주민이나 각종 단체의 구성원 또는 직장의 임직원이 서로 협력하여 자금을 모으고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기 위해 스스로 만든 비영리 금융협동조합이다. 정부 부처인 금융위원회의 승인으로 설립 인가를 받고 일반은행과 같이 금융감독기구의 감독을 받는 금융기관이기도 하다. 


은행의 주인은 투자자인 주주이지만 신협의 주인은 지역의 주민, 단체의 구성원, 직장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조합원이다.      

조합원은 신협의 주인이고 이용자인 동시에 경영자로서 매년 조합원 정기총회를 열어서 재무현황을 보고하거나 사업계획을 승인을 받고 임기를 정해 신협을 경영할 이사장과 임원을 선출한다. 

나는 신협의 실무책임자인 전무로 근무할 때까지 매년 조합원 정기총회를 통해 과거에 어려웠던 재무상황이 우량한 재무구조로 변화된 것을 보고하고 지역사회 공헌 활동으로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 당시 임원의 임기가 만료되어 임원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새로운 이사장이 선출되었다.


새로 선출된 이사장은 내가 어려운 환경에서 우수한 재무구조를 갖춘 신협으로 변화시킨 점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나와는 신협의 경영방식과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다.

그때부터 거친 파도를 넘어 잔잔한 바닷길로 들어서려는 나에게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변화된 상황을 살피며 한동안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지점의 지점장으로 좌천된 인사이동 발령을 받았다. 실무책임자로 본점과 지점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나에게서 전무 직책은 당장 뗄 수 없었는지 지점장으로 좌천시켰다.      


보통의 직장에서 있을 수 없는 상식을 뛰어넘은 상황이 벌어졌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짐을 챙겨 좌천된 지점장 자리로 옮겨가서 지점장의 업무를 경험해 본다는 신선한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단순화시켰다. 

옛말에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조직의 업무를 총괄하다 보니 지점의 세세한 업무를 알 수 없었는데 이것도 기회라는 애달픈 희망을 마음에 담았다.    

  

지점장이 되어 먼저 지점의 입지적인 여건과 조합원들의 금융거래 특성, 지점의 인적자원을 기초로 지점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서 기회와 위협을 찾아내는 스와트(SWOT) 분석을 통해 성장전략을 세웠다. 

도출된 성장전략을 실행하면서 조합원들과의 진솔한 관계 형성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엇비슷한 연령대의 어르신들을 초대해서 점심 식사도 함께하면서 어르신들끼리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내가 다리를 놓아 만나게 된 어르신들은 서로 마음을 맞추어 함께 여행도 하면서 지점의 우수조합원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대가로 지점의 자산은 전년 대비 30% 이상 성장했다.      


지점업무에 조금씩 적응해 갈 무렵에 정기예금 특판이 시작되었다.

신협에서 취급하는 정기예금 상품을 일정 기간 금리를 올려서 특별 판매를 할 때는 아침에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예금하려는 조합원들로 영업장이 가득 찼다. 

한꺼번에 많은 조합원이 창구에 몰려드니 여는 때와 달리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로 인한 불만과 짜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더니 마침내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불만을 분출하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럴 때면 창구 뒤에 지점장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서 쟁반에 커피나 녹차를 들고 영업장에서 오랜 기다림에 불만에 찬 조합원에게 다가가 차 한잔 권하며 이해를 구했다. 


옛말에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백번 낫다 는 말이 있듯이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린 조합원들은 번호표 들고 오랜 시간 순서를 기다려도 창구 직원들에게 불편함을 쏟아내지 않았다.      

한편 바쁜 일과 중에 점심시간이 되면 창구 뒤편 상담실에서 배달시킨 음식을 두 명씩 교대로 먹곤 했다. 

나와 교대 직원이 먼저 식사를 하고 창구가 번잡하여 직원들의 식사시간이 늦어지면 나는 날씨가 차가워진 날에는 휴대용 가스버너 레인지에 찌개를 데우며 국물이 졸지 않게 상담실을 들락거리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창구업무로 바쁜 직원들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작은 배려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지점장 생활이 익숙해져 갈 무렵 불현듯 찾아온 교통사고와 함께 나의 직장생활은 어두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가톨릭 신자로 성당에서 성가대와 구역 단체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전 신자 성지순례를 경북 문경의 가톨릭 성지로 떠나게 되었다. 

나와 아내는 신자들을 인솔하는 일을 맡아서 버스 맨 앞 좌석에서 성지순례 일정을 진행했다.      

성지순례 마지막까지 순탄하게 진행되던 일정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왔다.


그날 성지순례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길이 많이 막혀서 밤늦은 시간에 서울에 닿을 수 있었다. 

출발했던 성당에 도착을 앞두고 버스 선반에 올려놨던 행사 물품을 정리하려고 일어서서 몇 발자국 움직이는 순간 내 몸이 허공 속으로 날아가서 버스 앞쪽으로 처박혔다. 

꿈을  꾸는 듯한 무의식 상태에서 얼굴을 때리는 119 구조대의 손길에 눈을 떴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버스가 서울 시내에  버스 들어서면서 기사가 급하게 교차로를 건너려고 가속했다가 신호가 바뀌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날아가는 듯한 찰나의 순간에 앞 좌석에 앉은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나를 붙잡으려 해도 손이 닿지 않아 어찌할 수 없는 아내의 애타고 절박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버스출구 계단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119 구조대에 의해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뇌진탕에 갈비뼈 네 개가 부러지는 중상으로 한 달간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담당 의사는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찌르는 치명적인 상황은 피했지만 충격으로 뇌와 심장에 이상이 있어 위험하다며 MRA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다행히도 뇌와 심장비대증은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달 동안 직장에서는 나를 직장 밖으로 쫓아내려는 일이 꾸며지고 있었다. 


마침내 한 달 동안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허리에 복대를 차고는 회복되지 않은 몸을 추슬러서 퇴원 인사를 하러 이사장실에 들어섰다. 

그동안 교통사고로 자리를 비워서 죄송하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이사장은....

“왜 왔어 집에 가”라며 소리쳤다.      

황당한 상황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않고 지점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을 인내로 이겨내자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어두움 그림자는 가까이 오고 있었고 며칠이 지나서 이사장은 임시이사회를 소집했다. 

나를 실무책임자 직책에서 끌어내리고 후배 직원을 실무책임자로 올리는 안건을 상정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법인등기부상에 지배인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나를 지배인 등기에서 말소하는 안건을 나란히 올렸다. 

전국 어느 신협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이 몇몇 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표결 처리됐다.    

  

옛이야기에 간신 나라 충신 이야기가 있다. 

간신 나라의 최고의 충신은 가장 간사스러운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을 꾸미고 앞장서는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이사회를 마치자마자 전투에서 이긴 장수처럼 목표를 정하고 치열하게 나를 압박해 왔다.  

먼저 나를 직원들로부터 단절시키는 작업을 시작으로 자체감사를 들러리로 세워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직원들에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했다. 

훗날 보니 나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직원들을 압박하고 어떤 사실은 묘하게 둔갑시키기도 했다.      

좌천되어 지점 생활을 할 때 점심시간에 찌개를 따뜻하게 대피며 제시간에 식사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안타까워했던 나를 이들은 창구업무도 도와주지 못하고 자기만 먼저 점심을 먹는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뒤집힌 이야기들을 모아서 근무 수행능력 부족 및 업무 저성과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명령휴가와 동시에 대기발령을 내고는 나를 빼고 직원들과 워크숍을 떠났다.      

명령휴가가 끝나자 본점으로 끌려가 창구밖에 화장실 근처에 작은 책상을 놓고 그곳에 앉아서 근무하라며 가슴에 안내직원이란 표찰을 매달어 주었다. 


이틀을 그 자리에 앉아있으니 조합원들이 왜 전무님이 여기에 앉아있느냐며 묻기도 수군거리기도 했다. 

나는 조합원들의 물음에 내가 부족해서 교육 중이라고 대답하며 창피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창피함과 모멸감을 주려던 수작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던지 다른 신협을 합병하여 내가 조합원들을 잘 알 수 없는 지점으로 근무지를 배치했다. 

그들은 지점 현관문 앞에 내가 앉을 책상을 놓고는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더니 견디기 힘들면 나가라고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내가 희망퇴직을 거부하자 나사를 조이듯 더욱 정교한 압박이 오기 시작했다. 

앞잡이였던 간신 나라 충신은 어디서 베껴 왔는지 대기발령 직원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서 나에게 모멸감을 심어 주려고 애썼다. 

매일의 교육 일정표를 짜서 부하 직원들로 하여금 나에게 업무 교육을 시키게 하고는 과제를 내주어 손글씨로 A4용지 10장씩을 써서 다음날 아침에 제출하도록 했다. 

마치 대학 수험생처럼 눈을 비벼가며 새벽 두 세시까지 밤을 새워가며 과제를 작성하느라 볼펜을 쥔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겼다.      


압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서 친절안내 교육실습, 상품과 제휴카드 권유실습 일지를 작성하게 하고 쓴 내용을 트집 잡아 수차례의 경고장을 주었다. 

여기에 더해서 부하직원에게 업무교육을 받게 하고 직원들 앞에서 업무 시험을 치르그들로 하여금 교육 참여 태도와 시험평가 점수를 매기게 하여 교육 미수료 기준의 틀을 만들어 놓고 직권면직으로 위협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담대함으로 채워지고 모멸감을 이기려는 마음의 근육이 더욱 단단해졌다. 


이들의 비열함은 점점 더 강하게 내 심장을 파고들면서 치명적인 아픔을 주려고 애썼다. 

뜬금없이 파출 업무계획서를 만들어서 읽어보라며 주고는 만약 대기발령에서 복직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예금을 받아오는 파출 업무를 하게 된다는 엉뚱한 암시를 주었다. 

나는 오토바이보다는 자전거가 훨씬 났다고 응수하며 비열한 계략에 실망감을 주었다.      

자존심을 짓밟고 모멸감을 주는 조롱을 한 달 넘게 견뎌가며 내쫓으려는 자와 버티는 자의 싸움에서 끼여있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계속 버텨가는 것은 직원들에게 아픔을 주게 된다는 생각에 담대했던 마음에 균열이 생겨났다. 

10년 동안 정성으로 쌓아온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가시밭길보다 더 험한 길을 갈 작정으로 퇴직을 결심했다.      

대장간에 무쇠는 두드릴수록 더 단단해진다고 한다. 

그 시기에 겪었던 내 삶의 고난과 역경은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내 마음을 더 담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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