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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Jan 31. 2024

아내와 떠난 마음 여행

어느 이른 아침 전날 맞추어 놓은 알람시계 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뒤척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얼굴 너머 단아한 모습 속에 우리 부부의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나와 함께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삼십여 년의 세월을 지내오며 아내는 고비마다 마음 졸이며 무던히도 잘 견디어 왔다.      


내가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치 잃었던 신발의 제짝을 찾은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혼에 골인했다. 

그러나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 셋을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우리 부부에게 시샘하듯 시련이 찾아왔다. 

우리 가족의 경제적인 삶을 지탱하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에서 국제행사의 책임자로 열흘 남짓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와서 잘 다니던 직장을 아무 대책 없이 그만둔다고 했을 때 아내는 놀라기도 했지만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아내는 내가 책임을 맡은 국제행사가 잘못되어 책임지고 사직하는 것으로 짐작했었다. 

나중에 내가 직장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듣고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거예요"

아내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새로운 생활은 대책은 없지만 평온한 실업자의 일상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혜안을 갖는 마음의 성숙을 가져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해야 할 일이 없게 된 나는 늘 부족했던 아침잠도 충분히 자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느긋하게 게으름을 만끽했다. 

아내와 함께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조조할인 영화도 보고 늦은 밤 아내와 손잡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시공간의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꿈만 같았던 자유로운 일상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요령이 없다 보니 생활의 리듬이 깨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른한 일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느 날 아침 베란다에 물끄러미 서서 아파트의 텅 빈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자기의 일터를 찾아 부지런히 차를 몰아 움직였고 듬성듬성 하얗게 드러난 주차장이 매서운 눈으로 게으른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베란다에 멍하니 서서 외딴섬에 혼자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이 가슴 깊이 밀려들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한동안의 자유로움은 점점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늦은 아침까지 누렸던 아침잠은 밤새 생각에 지쳐 잠이 들었다 깨었다 하면서 새벽을 지새우고 맞는 늦은 아침으로 변해갔다.      

나는 아내에게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침대에 누워서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내 모습에 아내도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아내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텅 비어 가는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하던 차에 아내가 마음 여행을 떠나자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 부부는 그 당시 살고 있던 동네에 성당을 다니며 부부 주말체험 프로그램 참가를 권유받았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ME 주말 프로그램은 금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일요일 오후까지 계속되는 프로그램으로 그때는 토요일이 휴일이 아니어서 휴가를 내어야만 했다. 

그당시 직장에서 맡고 있던 일들이 평일에도 정시에 퇴근이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휴가를 내기는 더더욱 어려웠었다. 


그렇지만 직장을 그만두고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다 보니 아내와 함께 마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ME 주말 프로그램 참가에 앞서서 프로그램에 대한 취지의 안내를 살펴보았다. 

'가톨릭교회가 결혼생활을 더욱 숭고하고 성스럽게 승화시키기 위한 운동으로서 부부 일치 운동 또는 행복한 부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ME 주말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었다. 


참가 날짜가 정해지고 우리 부부는 짐을 챙겨서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는 이미 ME 주말 프로그램을 다녀왔던 몇몇 부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반기고 축하하며 프로그램이 개최되는 곳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이어진 ME 주말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오리엔테이션에서 다른 부부와 상관없이 자기 부부에게만 서로 집중하도록 하여 부부 일치로 행복한 부부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본격적으로 진행된 과정에서 부부로서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방법에 관한 강의와 앞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실제적인 사례가 이어지면서 공감과 몰입의 시간을 만들어 갔다.      

부부간에 의사소통의 방법을 새로이 익히고 우리 부부에게 적용해 보는 2박 3일 동안 아내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프로그램 과정 중에 먼저 서로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내가 경제적인 준비도 없이 덜컹 결혼부터 하고 어렵게 시작한 신혼생활을 슬기롭게 헤쳐온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내 또한 결혼하고 세 아이를 기르면서 가정에 충실해 온 나에게 감사의 글을 진솔하게 담아 주었다. 


편지로 시작한 대화는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을 거쳐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마음속의 염려와 걱정으로 이어졌다. 

직장을 그만두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내의 격려가 힘이 되었지만 내 나름대로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대책 없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이러한 고심의 생각을 마음에 담고 있던 차에 아내와 차분하게 대화를 통해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내는 나의 고민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 

"당신이 선하게 세상을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다 잘 될거예요"

아내는 마음에 담은 격려를 해주었다.      

이렇게 ME 주말 프로그램 참가하여 사흘간의 마음 여행을 통해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로 우리는 더욱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가득 품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ME 주말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지역별로 참가했던 부부들의 모임이 선배 지도 부부와 함께 몇 주간 이어졌다. 이 모임에서는 각기 부부간에만 집중했던 ME 주말 프로그램과는 달리 현실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배 지도 부부는 그들이 아는 분이 경영하는 회사에 필요한 회계와 수출입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나를 추천해 주셨다. 

선배 ME 부부의 추천을 받고 회사 직무를 알아보니 내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분야의 일이었다. 


나의 형편을 듣고 나를 도와주려는 좋은 생각으로 나를 소개해 준 선배 부부에게 감사한 마음이 컸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고마움을 받고 나니 세상은 외딴섬에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속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내가 당장 경제적인 사정이 급해서 내 능력을 벗어난 분야의 일을 감당하기에는 오히려 그분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사양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 아파트의 텅 빈 주차장을 보면서 느꼈던 공허한 마음이 선배 ME 부부의 마음 씀씀이를 느끼면서 마음 깊이 따뜻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한 소중한 체험을 하면서 보낸 한 달 남짓한 실업자 생활은 사직서를 내고 그만두었던 직장에 다시 복직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길지 않았던 시간 속에 참된 삶의 방향을 걸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자리를 곧추어 앉아 잠든 아내의 얼굴을 다시 내려다보며 아내의 얼굴 속에 담긴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편해 보이는 아내의 잠든 얼굴에서 나와 함께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기쁨과 즐거움 속에 행복했던 긍정적인 감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여 있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나의 길지 않았던 실업자 생활은 세상을 살아가는 혜안을 주는 마음의 성숙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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