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세계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여행자의 눈으로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할 여건이 안 되는 나에게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이국적인 영상과 상큼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여행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유럽의 작은 마을을 시리즈로 소개하며 스위스 아펜젤이라는 도시에서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 방식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독특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매년 4월 말이나 5월 초 휴일에 3천 명 남짓한 주민들이 아펜젤 광장에 모여 마을의 주요 안건을 주민들이 내고 손을 들어 투표하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이다.
‘란츠게마인데’라고 불리는 주민들의 광장 모임은 정치적인 행사라기보다는 전통문화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일 년에 한 번씩 마을의 중요한 일을 주민 모두가 광장에 모여 직접 찬반투표를 하는 주민총회를 말한다. 그 마을의 어른과 아이들이 축제하듯이 치러지는 행사를 보기 위해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모여 구경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의 생활과 밀착된 의제를 안건을 다루며 안건마다 주민이 견해를 달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즉석에서 토론도 한다. 주민들은 '란츠게마인데'라 불리는 이런 주민총회를 축제로 인식하고 참여한다.
"란츠게마인데는 마을 주민들의 결속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한 주민은 인터뷰를 통해 힘주어 말했다.
나는 영상을 통해 마을의 문제를 주민들이 스스로 찾아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 과정을 거쳐 투표로 결정하는 생활 민주주의를 지혜롭게 실현해 가는 스위스 아펜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보았다.
이러한 기억 속에서 직장을 나와서 백수 생활 중에 우연히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마을계획단’ 활동을 하게 되었다. 마을계획단이란 스위스의 ‘란츠게마인데’처럼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자원을 찾아보고 마을에 필요한 의제를 주민총회를 거쳐 투표로 선정하여 추진하는 자치 조직으로 현재의 주민자치회 전신이었다.
지금 동네마다 있는 주민센터는 그전에는 동사무소라고 불렀다.
마을 주민 입장에서 동사무소는 출생신고를 하고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는 등 행정적인 일이 있을 때만 찾아가는 관공서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랬던 동사무소가 주민센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그 기능을 확대하여 실질적으로 주민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 각 지역에 유행처럼 번져갔던 지방자치시대 또는 지방분권시대를 지나며 강산도 변한다는 1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주민들도 민주시민으로서 자치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을의 삐뚤빼뚤 굽어진 길이 펴지고 어두웠던 골목이 조명으로 밝아지는 것이 그저 나라에서 해주는 혜택으로 생각하고 살아오던 너그러운 주민들의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들도 생겨났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연말이 다되어 뒤엎어서 새 보도블록으로 바꾸는 안타까운 현상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 주민들은 우리가 낸 세금이 올바르게 쓰여야 한다는 생각들이 주민자치라는 틀로 형성되고 있다.
내가 지금 사는 동네는 오래전에 주택재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단독주택이나 저층의 다세대 집들이 허물어지고 몇 년 사이에 70% 이상이 아파트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새로운 주거문화가 시작되었다.
나 역시 다른 동네에 살다가 이곳 아파트로 이사 와서 한동안 직장과 집이라는 이분법으로 동네는 그저 잠만 자는 베드타운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던 중 주민센터 마을계획단 환경개선분과 활동을 하면서 마을 주민들과 동네 뒷산에 쉼터를 조성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마을사업으로 확정되고 사업예산이 확보되자 뒷산에 쉼터에 벤치를 만들기 위해 부자재를 메고 땀을 흘리며 산을 올랐다. 벤치를 설치 작업을 마치고 주민들과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눈 대화 속에서 생활 편익을 위해 주민들 스스로 장소를 찾고 구청의 예산으로 쉼터를 조성하는 민관협치를 경험했다.
마을계획단은 이듬해에 주민자치회로 명칭이 바뀌고 내가 사는 동네는 주민자치회 시범 동으로 선정되었다.
나는 얼떨결에 참여한 마을계획단 활동으로 등 떠밀리다시피 주민자치회장에 출마하여 주민자치회장에 당선되었다.
주민자치위원으로만 머물며 때로는 올바른 일에 한 표라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소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주민자치회장이란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전에 직장 근무지에서 주민자치위원을 경험했었지만 주민자치회의 생소함으로 한동안 낯설었고 부담이 크기도 했다. 부담 백배의 상황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동 지원관의 도움으로 주민자치회 정기회의를 통해 분과구성과 임원 구성을 마치고 주민자치회의 새 틀을 짜기 시작했다.
나와 주민자치위원들은 퇴근 후 혹은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모여 김밥 도시락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주민자치회 회칙을 만들고 분과회의를 통해 마을 의제를 발굴해 나갔다.
한 달에 한 번 정기회의를 통해 주민자치위원들과 의견을 나누며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 조금씩 이루어지는 느낌과 주민자치위원들이 마을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민관협력을 통해 주민자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민센터 동장님을 비롯한 동직원들과 주민자치위원들이 마음을 터놓는 합동 워크숍을 가졌다.
합동 워크숍을 통해 주민자치회와 주민센터가 협력하여 민관이 함께 해야 할 일을 협의하고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면서 주민자치위원들은 마을 의제를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정기회의를 통해 분야별 마을 의제를 가다듬으면서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주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주민자치위원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주민총회라는 생소한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실시한 이웃 마을들의 주민총회를 기웃거리며 우리 주민총회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사전투표로 며칠을 분주히 지나다 보니 우리 동네 주민총회 날을 맞았다.
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식전행사로 태권도 시범과 어린이 합창단 공연으로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주민총회의 본회가 진행되어 마을 의제에 대한 분과별 소개와 투표를 통해 마을 의제가 하나하나씩 정해졌다.
그날 갑자기 몰아친 가을 태풍의 영향으로 주민들의 참여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준비된 좌석을 모두 다 채우고 주민총회의 신선함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었던 소중한 자리가 되었다.
주민총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민관협력의 맛을 본 주민자치회와 주민센터는 우리 동네 축제 준비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우선 축제 행사의 큰 틀을 정하고 재개발지역 내에 새롭게 조성된 공원을 빌려 축제를 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절차를 거쳐 나갔다.
축제 장소가 정해지고 축제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고자 서로의 지혜를 모았다.
어려운 경제 현실에 주민들에게 협찬을 받는 것보다 지역주민들을 기반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농협과 새마을금고, 신협에서 협찬을 받기로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주민참여 체험형 축제를 성황리에 마치고 민관협치의 새로운 장에 스스로 ‘참 잘했어요’라는 칭찬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한 해 동안 활발하게 전개했던 주민자치회 활동이 코로나가 점령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지고 침체되기 시작했다.
주민자치회의 정기회의도 코로나가 삼켜버렸다.
만나서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엄지와 검지의 활약으로 카카오톡과 화상을 통한 비대면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주민자치회 정기회의를 모여서 하지 못하게 되자 최소한의 인원이 참석하는 분과별 소모임을 통해 마을 의제를 찾는 작업으로 전환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주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소통을 위한 주민총회를 온라인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개최했다.
주민총회는 주민자치회의 핵심이며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생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마을의 이야기 마당이다. 코로나로 인한 낯선 익숙함 속에서 계획했던 마을의 필요사업이 주민들의 투표로 주민총회에서 선정되어 비대면으로 실시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의 눈치를 보며 근근이 추진했던 자치활성화분과의 ‘동네 배움터’ 사업도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복지분과의 ‘홀몸 어르신과 함께하는 건강한 동행’ 사업도 반찬 건강꾸러미 전달로 사업을 바꾸어서 비대면으로 실시했다. 교육문화분과의 ‘우리 동네 육아 사랑방’은 아이들에게 어린이용 마스크를 만들어 동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전달했다.
환경개선분과의 ‘걷고 싶은 마을 길’ 사업은 천연주방세제 환경꾸러미를 만들어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바꾸어서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주민자치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주민이 마을의 주인이 되어 마을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주민자치인 것이다.
마을의 주인이 주민이라면 주민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주체도 주민이어야 하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많을수록 주민자치회가 활성화될 것이다.
주민과 행정이 서로 협력해서 민관협치를 통해서 주민들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주민자치의 긍정적인 체험은 계속되고 그 속에 주민의 힘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신협의 이사장으로서 사회적 순기능인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서 분주하게 나서고 있다.
또 하나의 역할로 우리 동네 주민자치회를 통해 주민들의 생활 편익을 도모하고 문화적 소통으로 서로 공감하는 이웃 간에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걸어서 마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덤으로 얻어 가는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