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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8. 2023

감정의 외로움

당구장에서 ~ 43

나잇값이 당구 점수와 더해져 책임이 붙으려 한다. 행여 주책없다는 소리 들을까 봐 조심스럽다. 의식해서인지 사람 만나는 일도 예전 같지 않고 대화마저 줄어드는 느낌이다. 소싯적 살갑게 정을 나누던 모습에서 삶의 활력을 얻을 때도 있었다. 대부분 스쳐가는 인연이었지만 술 한 잔 걸칠 때면 생각나기도 한다. 이해관계의 서먹함과 먹고살기 위해서 헤어지는 아픔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씁쓸하지만 사회가 바라는 일이니 어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도 이탈하는 세상인데 남남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


출입문을 염과 동시에 마주치는 눈빛은 관계의 출발점이다. 단골 구장이라 거의 모두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눈도장을 찍기 위해 주위를 살펴본다. 못 본 척 제 차례를 서두르기도 하고, 타격 자세를 취하려다 얼른 일어서서 눈빛을 교환하는 다정함을 건네주기도 한다. 행여 놓쳐버린 눈빛이 없는지 두르던 중 출입문이 열린다. 마주친 눈빛을 섬광처럼 반사하며 다른 사람의 눈빛을 흡수하려 애쓰는 눈치가 역 역하다. 초면에 감정이 살짝 상했던 친구였다.


당구장은 알게 모르게 감정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오늘은 어떤 감정의 고리가 연결될까. 이겨 먹기 놀이다 보니 더 그렇다. 다방면의 직업군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당구 이외의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직 당구에만 예민하게 군다. 주로 승리의 목표를 방해했을 때 충돌하게 된다. 쿠션을 세 번이냐 네 번 맞추느냐? 적 구를 먼저 맞추느냐 빈 쿠션이 먼저냐? 투 쿠션이냐 쓰리 쿠션이냐? 맞았다 안 맞았다. 봐주고 친다. 빨리 끝내지 않는다. 이유도 다양하다. 심할 땐 주먹다짐까지 한다.  


모퉁이 당구대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시합에서 평범한 옆 돌리기를 놓쳤다며 복귀하느라 열 올리고 있다. 울분까지 토하는 걸 보니 결정적 실수를 했나 보다. 너무 흔한 일이다 보니 지긋이 미소 짓는 쪽으로 표정 관리가 자동이다. 선택이 옳았다고 판단했지만 긴 쪽으로 쳐야 한다는 정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놓쳐버린 실수 때문에 상반된 주장을 강하게 내비치는 것 같다. 맞설세라 한쪽에서 짧은 쪽으로 쳐야 한다며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논리적으로 풀어봐도 얼마든지 인지할 수 있는데 아니라고 먼저 단정 짓고서 포문을 열어버린다. 조목조목 따져서 상식적으로 풀어줘도 아니라고 한다. 마치 여야로 쪼개지는 정치판을 보는 듯하다. 무언가를 감춰놓은 논리로 자기주장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맺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이며 목소리의 크기로 판가름 나는 모양새다. 머뭇거리다가 본전도 못 뽑을 상황이다. 이럴 땐 얼른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그 이미지는 주위 사람이거나 일류 선수들의 치는 모습에서 일 것이다. 물론 내가 선호하는 포지션이기에 고집하는 이유도 있을 테다. 머릿속에 나만의 것이 강하게 저장되어 있기에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운전 중 내 앞에 끼어든다든지, 앞에서 빨리 안 가고 머뭇거린다면 곧장 신경질을 낸다. 내 길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 거실에 누워서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외치는 부모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행위가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청소원을 해 봐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자식들에게 원망을 들어봐야 깨우치지 않을까.


감정의 충돌은 경험의 부족에서 붉어지는 현상이다. 고수일수록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실수할 확률이 줄어든다. 많은 경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 없듯 다양한 경험이 살아남는 방법이 된다. 최대한 이미지를 많이 모아 내 것으로 습득하는 현명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대의 지성들이 자유로운 연예를 수긍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상에서 나를 빼놓지는 못한다. 나름의 정리된 생각이 통하지 않을 때면 답답함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너와 나의 다름이 충돌하여 멍들 때도 있다. 수그러들 무렵이면 고스란히 외로움으로 남는다. 쉽게 고칠 수 없는 감히 고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면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땐 그 상처를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이려니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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